그녀의 눈물

사람의 아름다움

by sally

춘천행 급행기차가 역내로 진입하며 서서히 멈추자 나는 휴대폰을 꺼내어 예매한 좌석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창가 자리였다. 승객수가 다소 적은 객실에 예매한 이유도 조용히 사색을 즐기기 위함이다.(그 칸은 12명 좌석뿐이다.) 여러가지 생각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작은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일 때문에 다소 마음이 편치 않았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기차문이 열리고 중간문을 통해 예매한 좌석으로 시선이 먼저 닿자 이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분이 검은색 정장을 입고 통로 쪽에 앉아있었다. 창가 쪽으로 들어가려 하니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손에 든 (켜지도 않은 까만) 휴대폰을 넋 놓고 응시하고 있었다. 실례지만 안으로 좀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때서야 그녀가 다리를 옆으로 비껴 공간을 확보해 주었다.



창가자리에 앉아 차창밖을 보니 햇빛이 능선의 굴곡을 따라 아름답게 그려내며 계절을 지나가고 있었다. 사람의 호흡은 더딜지라도 계절은 어김없이 순리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자연에 비해 사람의 유한함이 문득 창문틈을 타고 낯선 공기로 밀려들어오는 것 같다는 느낌에 (애석한 기분이 드는 것은) 우리의 인생이 서로 사랑하며 살기에도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고 보면, 이 쓸데없는 감정들에 휩싸여 주먹만 한 내 심장에 차고 넘치도록 많은 눈물을 담았을 시간을 생각하니 허무함이 칼바람처럼 내 창자를 도려내듯 지나간다.


의자에 붙은 선반을 꺼내어 책을 놓았을 때, 통로에 앉은 그녀의 서러운 눈물이 고요한 객실 안으로 무겁게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굵은 눈물은 손등에 떨어져 흘러내렸다. 젊은 그녀는 가방을 열어 휴지를 찾지도 않았고,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가 보다 하고 책을 집중해서 읽으려 했으나 그녀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마른 체구에 윤기 나는 까맣고 긴 머리를 하고 있는 그녀의 옆모습에 시선이 자꾸 닿았다. 그녀는 존재의 온몸으로 객실 안을 희뿌연 슬픔으로 가득 채웠다. 사람의 눈물샘에서 어찌 저렇게 많은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 무슨 일이기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해도 저리 눈물을 쏟아낼 수 있을까.


소리 없이 흐느껴 우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生에 대한 밑바닥으로 내려가 근원적 질문을 다시 도출해 낸다. 살아간다는 것이 어쩌면 저리 슬픈 것일까.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기차는 길고 높은 다리 위를 건너고 있었다. 그녀의 서러운 눈물은 강으로 돌아가 대지가 흘리는 눈물과도 같았다.



까만 정장과 눈물. 여전히 고개 숙인 채 오직 손에 잡은 (까만 화면의) 휴대폰에만 시선을 둔 그녀를 뒤로 하고 나는 남춘천역에 내렸다. 김유정 역으로 한 정거장 상행선을 타기 위해 지하도를 내려와 건너편으로 걸어갔다. 맑은 날씨이어도 마음이 그녀의 눈물에 닿았는지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기차가 환한 불빛을 비추며 남춘천역으로 들어오고 나는 기차에 올라 문 앞에 서서 한 정거장 지나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김유정 역에 내려 건너편 역사를 가만 바라보니 기와지붕 처마 끝에 그녀의 서러운 눈물방울이 매달린 것 같았다.





지난날, y가 내게 그랬다. 왜 사랑에 대한 주제의 글만 쓰냐고.

내가 생각하는 인생이란 그랬다. 사랑하며 살기에도 유한한 내 존재에 회의감이 들었다. 그래서도 가끔 내가 믿는 신에게 반항하며 쓰디쓴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그가 지면으로 말하며 펼친 세계는 유한한 존재가 이해하려고 무던히 노력하지만 결국 나는 시선이 닿는 곳 이상 볼 수 없음에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에 통곡할 적이 많았다. 여전히 그의 세계를 상상으로만 이해하기는, (그래 한마디로 말하면) 봄날 형이상학 나무에 피어오르는 연분홍빛 꽃봉오리일 뿐이었다.



하지만 하늘의 까만 눈망울 같은 별빛을 바라보라. 하늘의 젖은 눈물 같은 달빛을 바라보라.

당신들의 눈빛도 눈물도, 맑고 빛나는 수정같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들인가를.

별빛처럼 달빛처럼 보이는 현상학적 안에서 (종교와 추론적 세계가 아닌) 우리는 그렇게 사랑하며 아름답게 살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어릴 적 초등학교 때 사람의 죽음을 보았다. 아버지의 여동생인 고모는 태어나면서부터 얼마 못 산다고 했다. (지금 나의 부모님은 모두 천상에 계시기 때문에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남해가 고향인 내 부모님은 일찍이 서울로 오셨고, 시골에서 고모의 병을 고칠 수 없어 서울로 모셔와 우리 집 작은방에 홀로 투병을 하고 계셨다. 어느 날 엄마가 작은방에 들어가시더니 대성통곡을 하셨고 난 그날 고모의 죽음 직전의 마지막 눈빛을 아직도 기억한다.



우린 그저 봄날에 흙을 뚫고 갓 피어난 여린 풀잎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출생도 죽음도 우리의 권한은 그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다. 이성의 한계 안에서 형이상학적인 신의 자리까지 논하기에도 우리의 생은 너무나 짧다. 그러기에 잠시라도 누구를 대적하며 원망하고 미워할 틈이 없다. 나를 스스로 증오의 창검 앞에 세울 필요도 없었으며 빈궁한 미움을 품고서 어둠에 거처할 필요도 없었다.


세상을 펼친 신에 대해 내가 그에게 반문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의 죽음을 바라본 내 눈물에 대한 것을 해명해 달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사람의 출생과 죽음은 하나의 선으로 연결된다. 生도 죽음도 하나의 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누군들 영생할 것인가.


열아홉 살 때부터 늘 사색에 잠겨야 했음은 가장 근원적인 (해답 없는) 질문을 찾는 것이었다. 하나의 원 안에서 돌다가 답을 못찾고 결국 생의 외줄 타기에서 아슬하게 걸어가다 흙으로 돌아감을 나는 앎이더라. 그렇다고 허무주의를 논하지 않는다. 사람은 그 존재 자체로 그리운 것들의 몸짓으로 살아가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사람이 生을 위해 견디며 슬픔으로 빚었던 눈물의 의미를 찾을 때 인생은 비로소 겨울빛처럼 맑고 아름답지 않을까.


아름다운 사람의 눈물은 숭고하다.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맑은 것이다.

어찌할 수 없는 유한한 사람의, 여린 풀잎의 몸짓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