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 중과 같게 이틀째 떠나는 학교에 출근하고 있다.
명분은 새 학년도 수업 준비, 과연 그럴까?
교사에게 학교는 어떤 장소일까?
단지 밥벌이를 위한 장소, 아이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장소, 교사 본인의 성취를 발휘할 수 있는 장소 등 학교라는 곳은 어떤 곳일까?
초등교사로 진로를 전향하기까지 꽤 오랜 세월이 걸렸다. 평이하게 교직에서 근무하는 선생님과 나는 꽤 차이가 있다. 공장 생활을 하던 내가 진로에 고민에 빠질 때, 초등교사라는 직업에 도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 당시 ‘교육대학에만이라도 다니면 좋겠다.’ ‘임용고시라도 응시해 보면 좋겠다.’‘상주에 있는 모교에 자전거 타면서 출퇴근을 하고 싶다.’ 등의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렇게
25살에 초등교사의 꿈을 품고, 32살에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20년 차의 경력 교사가 된 것이다.
사람은 변한다!
1. 결혼하면 변한다.
2. 자녀를 돌보면 변한다.
3. 신앙 생활하면 변한다.
되돌아보면,
나는 결혼하고 변하고, 자녀를 돌보며 변하고, 신앙생활 하면서 변했다.
그 와중에 초등교사의 직분을 받아 열심히 살고 있다.
동기보다 8~9년 늦게 교사가 된 지라 승진과는 거리가 멀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내린 두 가지의 결심을 하게 되었다.
하나.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를 잘 돌보자.
둘. 초등교사로서 전문성을 기르자.
첫 번째 결심은
1. 원 가정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의 원 가정은 자식들에 관심이 없었다.)
2. 초등교사로서 가장 큰 혜택은 자녀와 같은 학교에 근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 00고등학교에서 자녀 학생부 비리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타인의 시선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떠나는 학교에서
첫째와 6년, 둘째와 4년, 셋째와 3년을 함께 등교와 하교를 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연구부장 5년, 정보부장 1년, 체육부장 1년, 체육전담 6년, 담임 3년을 경험하였다. 무엇을 했을까 생각해 보니, SW 선도학교 운영, Wee 클래스 구축, 교육포럼 참가, 기관 인성 공모, 교육 연구동아리 운영, 수업전문가 응모, 도서 출간, 메이커 전문가 및 마스터 응모, 수업 나눔 및 체험 부스 운영, 과학대회, 체육대회 등 다양한 경험을 하였다.
시작은 단순했다.
나의 아이와 손잡고 초등학교 출근하고 싶었다.
그리고
7년 근무하고
다시 전근하고 돌아오고
2년 근무하여, 총 9년을 본교에서 근무했다.
떠나려니
발걸음은 떠나지 않는다. 어제부터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출근했지만, 오늘도 출근하였다.
그래서
오늘은 컴퓨터에 인수인계할 자료만 남기고 모두 삭제하였다.
그럼 내일부터는 출근하는 학교가 달라질까?
일반 직장과 다르게 교사는 학교가 고정적이지 않다.
그래서 학교라는 장소의 변화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크다. 이민한다고 표현하면 맞나?
암튼, 학교라는 곳은 몸의 익숙함보다는 맘의 안식처라고 생각이 든다.
사실
멍한 상태라 주절주절 정리되지 않는다.
이제 떠나야 하고, 이제 떠났다.
p.s.
한 학교에 9년을 지낸다는 것 어떤 의미일까?
함께 해서 좋은 점:
아이들 곁에 있고 싶은 마음에 한 학교에 함께 머물렀다.
쉬는 시간에 뛰어노는 나의 아이를 볼 수 있었고,
수업 시간에 공부하는 나이 아이를 볼 수 있었고,
체험학습 갈 때 ‘잘 가’하며 마중 나갈 수 있었고,
운동회 때는 아빠로서 달리기할 수 있었고,
담임 선생님과는 수시로 자녀에 대해 상담할 수 있었고,
몇 번은 안 되지만, 세 자녀와 함께 등교하는 그림 같은 모습도 만들었고,
학습 준비물을 대신 챙겨 줄 수 있었고,
사인이 필요한 가정통신문에 바로 확인해 줄 수 있었고,
내 아이의 친구들과 친해질 수 있어 좋았고,
수업이 끝나면, 아빠를 찾아와 오는 아이에게 용돈을 줄 수 있었다.
함께 해서 불편한 점:
한 학교에 머물기 위해, 보직교사를 원치 않았지만, 담당해야 했고,
학교 업무 중 주인 없는 업무가 나를 찾아왔고,
학교 업무에 모범이 되어야 하므로 최선을 다해야 했고,
아이의 친구들이 학교에 함께 있는 터라 수업에 더 준비해야 했고,
아이가 보고 있으므로 더 열심인 교사의 모습을 지녀야 했고,
학교폭력 사안이 발생했을 때, 학교폭력 담당은 아니지만, 몇 번 중재의 역할을 해야 했고,
(왜? 학부모님을 잘 알기에)
동료 교사 또는 후배 교사가 아이의 담임이 되면, 누구보다 깍듯하게 모셔야 했고,
학부모님의 민원이 들어 오지 않도록 최대한 공평하게 학생들을 대했고,
소소한 학부모님의 학교에 대한 민원을 일차적으로 받아야 했었다.
그래도
세 아이와 함께한 학교생활이 행복했노라 이야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