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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파이 Jan 27. 2024

고상한 목소리

진상의 냄새를 풍기는 자

파이집은 배달앱을 안 쓴다. 

대부분 예약주문이라 굳이 배달앱을 쓸 필요가 없다. 

전화나 문자, 카톡으로 주문을 받는다.

문자나 카톡에 비해 전화주문은 목소리를 직접 듣기 때문에 상대를 파악하기 쉽다.

목소리 톤과 쓰는 어휘, 억양으로 이젠 대략 어떤 성향인지 알듯하다.

오늘도 전화를 받았다. 

30분 내로 방문해서 여러 종류 파이를 구매하겠다는 손님이었다.

아마도 처음 주문하는 손님이었을 것이다.

우리 파이집은 평소엔 호두파이만 만들어 둔다.

다른 종류는 예약이 들어오면 만들기 시작하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방문에는 준비가 어렵다.

이런 사정을 설명했더니 손님이 볼멘소리로 호두파이 3판을 예약했다.
주문을 받았지만 곧장 준비하지 않았다.

잠시 후 문자가 왔다.

주문을 취소한다는 내용이었다.
아까 통화할 때 손님의 목소리로 나는 이미 주문을 안 할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급하게 시작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젠 목소리만 듣고도 주문취소를 예견할만한 경지에 이르렀다며 혼자서 빙긋 웃었다.

내가 전화를 받았을 때 본능적으로 꺼리는 목소리가 있다.
바로 고. 상. 한. 목소리다.

정확히 표현하면 고상한 척하는 목소리다.
고상한 척하는 목소리는 위험 신호가 감지된다.

그런 목소리는 대부분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과한 서비스를 요구하거나 이상한 트집을 잡는다.

진상의 스멜이다.

정말 고상한 목소리도 있다.

나는 그 목소리를 공손한 목소리로 칭하고 싶다.

공손한 목소리는 무리한 요구도 없고 서비스에 대한 언급도 없다.

이후에 파이를 잘 먹었다, 선물을 잘했다 등의 인사도 보내주신다.

비슷한 듯 다른 두 목소리.
얼핏 들었을 땐 둘 다 고상한 목소리.
차이점은 무엇일까?


고상한 척하는 목소리는 본인이 우위를 선점하고 싶어 한다. 내가 돈을 낼 거고 그러니 내 요구를 맞춰달라는 표현을 하며 은연중에 상대를 무시한다.

이런 사람일수록 나는 단호하게 대하는 편이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부분은 여기까지이며 더 이상은 안된다는 선을 긋는다.

오히려 본인에겐 더 손해인데 스스로는 스마트하게 행동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공손한 목소리는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존중하는 화법을 쓴다.

상대를 존중함으로써 자신도 존중받는다는 것을 안다.

이런 분들에겐 나도 마음의 문이 열려 뭐라도 더 챙겨드리고 싶어 진다.

나도 사람인데 나에게 뭐라도 하나 더 빼가려는 사람보다 호의적인 사람에게 마음이  간다.

실제로 만나보면 높은 확률로 후자가 더 생활에 여유 있는 분들이다.

생활에 여유 있는 사람들이 마음에 여유가 있는 건지 그 반대로 마음 여유생활여유로 이어지는 건지는 모르겠다.

고상한 척하는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본인의 사회적 지위나 동네에서의 영향력, 내가 알 거라고 생각하는 자기 지인과의 친분을 내세운다.

본인의 미래 가치도 주장한다.

네가 이번에 잘해주면 담에 더 많이 주문하겠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근데 경험적으로 그건 그때 말뿐이다.

여기에 딱 맞는 사람이 갑자기 떠올랐다. 이 분은 나에게 차단당했다.

예약자 성함을 말해달라 했더니 본인을 오○○ 권사님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교회를 안 다녀봐서 권사가 교회 내에서 얼마나 높은 지위인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예약자 명단에 본인 직위를 넣고 님까지 스스로 붙이는 사람은 남녀 통틀어 처음이었다.
뒤이어 남집사 소개로 주문한 거니 할인을 해달란다.

나는 남집사가 누군지 모른다.


이번에 잘만해주면 앞으로 교회 행사 때 큰 주문을 많이 해주겠다 자기 미래 가치를 선전했다.
결국 할인 해주고 며칠 뒤 입금을 받았다.
그런데 입금한 지 몇 시간 만에 환불을 요구했다.


주문 취소의 이유는 자기가 지금 제주공항인데 거기서 오메기떡을 샀단다.

그래서 호두파이가 필요 없어졌으니 취소한단다.

??????

대량 주문이어서 나는 이미 낼모레 주문을 위해 재료 준비를 마쳐둔 상태였고 취소는 어렵다고 했다. 

그랬더니 이미 오메기떡을 샀는데 어떡하냔다.
그럼 나는 어떡하죠?

그동안 본인이 주장한 사회적 지위와 본인 지인과의 친분, 미래가치 선전은 모두 가차 없이 버렸다.

말이 통할 거 같지 않으면 그냥 빨리 손절하는 편이 편하다. 환불을 해주었다.

미안하긴 한지 다음에 꼭 다시 주문한단다.
"제가 아줌마 뭘 믿고 다시 주문을 받겠어요. 손님한테는 주문 안 받습니다~" 하고 끊었다.
그리고 연락처는 차단.

이 오메기떡 오권사님이 대표적으로 고상한 척하는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


내가 그렇다고 점쟁이도 아닌데 목소리만 듣고 다 알 순 없다.
그래도 수년간 이리 깨지고 저리 깨져가며 훈련이 되었는지 고상한 목소리는 감별이 가능하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게 생겼다.


아... 이 사람은 진짜 고상한 분이다.
아... 이 사람은 조심해야 하는 고상한 척하는 사람이다.
거기에 대응하는 내 마음의 준비를 한다.

상처받고 싶지 않으니까.

내 딴에는 최선을 다해줬는데 무례함으로 돌려받으면 누구라도 상처받는다.

그래서 서비스직이 힘든 것이다.

우리가 만나는 판매원이, 배달부가, 전화상담원이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영혼까지 괴롭힐 권리는 우리에게 없다.

그들은 게임 속 NPC가 아니다.

그걸 가끔 사람들이 잊는 것 같다.

그들도 나와 같이 존중받아야 할 사람들이라는 걸.


나는 어딘가에서 고상한 척하며 무례한 요구를 하지는 않나 돌아본다.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을 경계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서비스직 근무자들은 진상 고객에게 너무 상처받지 말자.

그들과 가족으로 함께 사는 사람들도 있다.

내 가족이 아니니 나는 얼마나 다행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측은한 마음이 들며 잊어버릴 수 있다.


아까 그 오메기떡 오권사님이 내 엄마라면 내 시어머니라면 그 변덕에 나는 얼마나 시달림을 당했겠는가.

다행히도 내 가족이 아니다.

차단해도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다.
내 영혼까지 다치지 말자.

그럴 가치가 없다.


법륜스님께서 그러셨다.
"누군가 나에게 쓰레기를 줬다면 두고두고 들고 다니며 열어보고 속상해할 것이냐. 쓰레기인 줄 알고 그냥 버려 버릴 것 이냐.
그냥 버리면 아무 일도 아니다. 너에게 쓰레기를 준 사람은 기억도 못하는 일에 혼자 쓰레기를 계속 열어보며 상처받지 마라."


서비스직에서 일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평온이 함께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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