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도시, 청주

by 로우어


12년의 암기와 세뇌 교육의 결과라기엔 나의 수능 성적은 처참했다. 오히려 제일 높았던 모의고사보다 점수가 더 내려갔다. 안될걸 알지만 담임선생님과의 진학상담 때 '교대는 힘들까요?'라고 넌지시 물어봤다. 힘들 거라는 대답에 이어 충청권 국립대는 어떠냐는 물음이 돌아왔다. 아무런 생각이 없어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로 대학을 가면 연희동에서 하숙집을 운영하시는 이모집에 신세 질 수 있다는 엄마의 말들은 가능성이 없는 빈 껍데기 같은 소리였다.. 설령 성적이 잘 나왔다한들 무슨 수로 서울에 있는 대학 등록금을 마련한단 말인가. 어차피 안 되는 일이다. 애초에 마음에도 없는 소리인걸 안다. 말과 다르게 엄마는 고등학교 내내 지역 간호대학을 졸업하면 취업도 잘 되고 집에서도 다닐 수 있다고 3년 동안 날 설득하려고 했다. 내게 그 말은 곧 대학을 안 가면 안 되겠니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빨리 일을 하기를 바랐기에 내가 하고 싶은 전공은 엄마에게 중요하지 않다. 너무나 미안했지만 내가 정한 학교로 가기로 했다. 늘 엄마 말을 따랐지만 그것만은 양보할 수 없었다.


대학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친구와 조치원행 기차를 탔다. 조치원역에서 내려서 청주로 가는 시외버스에 올랐다. 난생처음 밟아보는 충청도 땅과 웅장한 학교 건물. 고향을 벗어나 본 적 없는 내겐 새로운 세계다. 가슴이 벅차고 빨리 대학생 신분이고 싶었다. 언니가 입던 여성스러운 롱 코틀 입어도 더 이상 어색하지 않았고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모든 게 나를 반겨주고 나를 위해 돌아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낯가림이 심한 데다 궂은 날씨 탓에 신입생 ot도 참석하지 못했던 나는 입학하고도 한동안 혼자였다. 선배들은 예쁜 신입생, ot때 친해진 신입생 주위에만 모여 있을 뿐.

용기를 내어 동기들과 조금씩 가까워졌고 그럭저럭 적응했지만 낯선 감정, 이방인의 기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19년의 인생 대부분을 수동적으로 살아왔기에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하고 혼자서 해나가는 게 되려 힘들었다. 주체적이지 못하는 스스로가 안타깝고 짜증 났다.


주인집 위 2층의 작은 원룸. 미니 냉장고와 작은 싱크대만 덜렁 있는 방. 낯선 도시에서 내가 발 뻗고 잘 수 있는 유일한 공간. 고향 집은 죽도록 싫지만 엄마는 매일 보고 싶었다. 외롭고 슬퍼도 애써 씩씩하게 전화를 받았다. 밥 잘 챙겨 먹고 있냐는 목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나고 목이 잠겨서 길게 통화할 수가 없었다. 외로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 같아서 강한 척을 해야만 했다.


대학생이 되고 처음 맞는 겨울방학에는 아빠 때문에 집에 가는 게 싫어서 학교 근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낮에는 카페였다가 저녁이 되면 호프집으로 분위기가 바뀌는 곳이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손님이 한 명 있는데 항상 해 질 무렵 창가 자리에 앉아 병맥주 한 병을 주문하시던 중년의 여인이다. 창밖을 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있던 그녀가 어린 나의 눈에는 참으로 여유롭게만 보였다. 지금은 지는 해를 보며 혼자 술 한잔 기울이는 그녀의 기분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녀에게도 사는 게 마냥 쉽진 않았을 것이다. 사장 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저녁엔 혼자서 가게를 지켰는데 손님들이 들어오면 너무 긴장됐다. 구운 오징어가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유일한 안주였는데 처음엔 그것마저 못해서 센 불에 태워먹었다. 죄송하다고 꾸벅 고개 숙이며 사과하는 것도 처음인 것 같다. 내 힘으로 돈 버는 일을 한다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낯설지만 조금씩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세기말부터 불어닥친 인디밴드 열풍에 '닥쳐, 닥쳐'를 외치던 크라잉넛에게 완전히 매료되었고 그들을 보러 서울로 첫 상경을 했다. 12월의 홍대 라이브클럽은 열기가 넘치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내가 꿈꾸던 라이브 공연의 에너지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더 큰 세상의 맛을 보고 나니 왜 서울로 모여드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정말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19년 동안 태어나서 자란 곳을 벗어난 적 없는 내가 1년 뒤에는 서울 홍대의 밤거리를 걷고 있다니. 공연을 마치고 나오는 캡틴락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고 생수를 건넨다. 타지에서의 1년이 19년 동안의 나와는 전혀 다른 나를 만들어냈다. 뜻밖의 나의 모습에 스스로 놀라는 동안 조금씩 용감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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