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는 호텔과 백화점만 가봤는데

탄핵집회를 가는 날이 오다니

by 로우어

코로나에 걸려 몸이 축축 늘어지는 와중에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했다. 마침 기말고사 한국사의 현대사가 시험범위인 큰 아이는 자기가 아는 그 계엄이 맞냐고 기겁을 했고, 해외에 있던 남편은 카톡을 연신 보내며 믿지 못했다. 뉴스에서는 이미 포고령을 화면으로 보여줬고 큰 애와 나 둘이서 국회에서 계엄해제가 의결되는 것까지 보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부터 매일 새벽마다 자꾸만 눈이 떠졌고 12일 목요일의 기가 막힌 29분의 담화는 구석에 처박아 놓은 응원봉을 꺼내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금요일, 학교에서의 수업을 마치고 지하철을 타고 국회 앞으로 갔다. 집회에 간다는 내게 조심하라는 동료 선생님의 말에 괜스레 긴장되었지만 막상 집회현장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내 옆의 세븐틴 팬인 앳된 소녀들과, 앞줄에 보이던 아이유의 어린 팬들. 주변엔 k팝 응원봉을 손에 쥔 젊은 여성들이 가득했고 함께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며 저녁을 맞았다. 행진을 시작하는 순간 '그대에게'가 흘러나왔고 다 같이 여의도의 빌딩숲을 걸으며 떼창 할 때의 그 기분은 표현하기 힘들 만큼 벅찼다.


앞에 펜스가 있다며 조심하라고 알려주며 넘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힘으로 펜스를 버텨준 젊은 여성들. 이승환의 무대를 보기 위해 kdb건물 쪽으로 끝없이 모이는 군중들에게 더 이상 모일 공간이 없다며 돌아서 가야 된다고 주최 측의 말을 크게 전달해 주던 아저씨. 그 누구보다 질서 있는 모습으로 서로의 안전을 위해 조심하던 사람들을 잊을 수 없다.


덕질해 본 사람으로서 황금 같은 금요일 저녁, 자신의 최애 직캠 영상을 보며 쉬는 게 가장 행복한 순간임을 안다. 그러나 그 안락함을 포기하고 집회현장까지 나온 응원봉 무리의 모습은 얼마나 대견하고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내가 소중히 간직해 왔던 정의와 신념이 누군가에 의해 빼앗기고,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던 그날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계엄 트라우마는 한동안 지속될 것이고, 탄핵이 가결된 오늘의 설레는 이 기분도 잊지 못한다.


새로운 시작이 되길 바라며 오늘부터는 그 일이 있기 전의 시간들처럼 푹 잘 수 있기를 바란다.









#촛불집회#계엄트라우마#응원봉#탄핵#다시만난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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