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악마가 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무엇이 진짜 ‘나’인지 알 수 없었다. 핀란드의 고요한 숲, 알 수 없는 적막함이 나를 삼켜간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한국으로 유학을 가겠다는 말을 꺼내자, 부모님의 얼굴은 순간 굳어지더니, 이내 붉게 물들었다. "왜 하필 한국이지?" 엄마는 내 결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너는 그곳에서 행복할 것 같니?”
중력에 짓눌린 어깨는 한없이 처진 채, 터벅터벅 계단을 올라갔다. 방문을 조심스레 열고 침대에 누웠다. 몸을 뒤척이다가, 방구석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실눈을 뜨고 자세히 바라보니, 거기 안의 무언가가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만치 그 순간이 놀랍지 않았다. 그때 나는 알 수 있었다. 나의 안에, 그 어떤 것이 숨어 있다는 것을.
또 다른 나를 보며, 지껄였다. ‘정말 자유롭게 내가 결정을 내린 것일까?’ 아니면, ‘이미 누군가가 나의 운명을 정해두었을까?’
어느새, 아침이 밝아오는 풍경은 눈부시게 평온하다. 차가운 공기가 맑고 투명하게 느껴지며, 새벽의 차가운 미풍이 호수 위를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하늘은 어스름한 회색에서 차츰 연한 푸른빛을 띠기 시작하고, 먼 산맥은 흐릿한 실루엣으로 떠오른다. 조용한 마을은 이제 막 깨어나는 듯한 기운을 내뿜었다. 그때, 부엌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레나! 이레나, 일어나야지. 오늘 중요한 날이잖아!”
엄마의 목소리는 다정하면서도 무언가 서둘러야 할 사람처럼 들렸다. 나는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고, 부리나케 이불을 걷어찼다. 양치하는 도중, 부엌에서는 음식을 준비하는 소리가 일정하고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핀란드식 아침은 늘 소박하다. 오늘 아침에도 엄마는 빵을 굽고, 생선 파이와 함께 간단한 치즈, 요구르트를 준비할 것이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부엌으로 내려가 보니, 웬일로 정성스러운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커피와 함께 전통적인 라이 브레드와 연어가 놓인 그 모습은 익숙하면서도 멀어질 것 같은 풍경이었다. 그 적막을 깨고 엄마가 조심스럽게 묻기 시작했다. “알아보니 거긴 분단국가라며? 휴전 상태인 나라에, 네가 왜 굳이 그리 가려고 하는 거야?”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엄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질문을 이어갔다.
“핀란드에서 유럽 어디든 갈 수 있어. 가까운 스웨덴이나 독일, 아니면 미국으로도 갈 수 있잖니. 근데 왜 하필 전혀 모르는 동양의 작은 나라로 가는 거니?”
나는 조금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엄마, 그건 내가 결정한 거야. 그리고 한국은 위험한 곳이 아니야.”
“그곳은 분단국가잖아! 언젠가 또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했어. 아무리 네가 좋아해도, 딸을 그런 곳에는 보낼 수 없어.”
엄마와의 대화가 점점 격해지던 중, 아버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마당에서 들어온 듯, 차가운 공기가 짙은 외투에 묻어 있었다. 아침의 냉랭함을 끌고 들어온 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거실을 가로질러 우리가 있는 식탁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말없이 테이블 끝자리에 앉았다. 손에는 뜨겁게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잔이 들려 있었고, 이내 딸과 아내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강하게 의사를 표현하는 순간, 아빠는 살며시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그의 얼굴은 무겁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 침묵 속에는 고민과 염려가 스며 있었다. 드디어, 아빠가 말문을 열었다.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단단했다.
“이레나, 부모가 딸을 위험한 곳에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너를 걱정해서야. 해외에 나가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낯설고, 어려울 수 있어. 그곳이 한국이든, 미국이든, 어디든 말이야. 고향을 떠나면 언제나 그리운 법이지.”
나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엄마, 아빠. 한국은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하지 않아. 그리고 그곳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있어. K-pop으로 유명한 ‘BTS’, ‘블랙핑크’도 그렇고, 한국 음식은 정말 맛있어. 삼겹살, 김치, 그 음식들은 핀란드에서는 맛볼 수 없는 것들이야.”
“그리고 한국의 문화는 정말 특별해. 핸드폰 문화도 발달하고, 패션도 혁신적이야. 사람들은 모두 친절하고, 핀란드와는 전혀 다른 활력이 있어.”
엄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네가 그곳에서 영원히 살지 않을 거라는 걸 알지만, 그곳은 네가 생각하는 만큼 편안한 곳이 아닐 수도 있어.”
나는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건 내가 감당할 수 있어! 그리고 내가 선택한 일이에요. 고등학교를 마치고 난 후, 한국에서 공부하는 게 제일 좋아요. 꼭 가고 싶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고, 엄마는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정말 거기에 가겠다고? 너 미쳤니?"
갱년기에 접어든 엄마의 불안정한 목소리에 맞춰, 나 또한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왜 그렇게 나를 믿지 않는 거야? 난 내가 선택한 일을 할 거야!" 그리고 입에서 무심코 나온 "젠장, 나도 내 인생을 살 권리가 있어!"라는 말은 평소엔 절대 하지 않았을 욕이었다. 부모님도 꽤 충격받은 눈치였고, 나 역시 내뱉은 말에 놀랐다.
대화는 점점 더 어긋나기 시작했다. “넌 지금 네가 뭘 하는지도 모르는구나. 세상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야. 넌 아직 어린애처럼 굴고 있어.”
나는 눈물을 참으며 울먹였다. "어린애 아니야!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거야, 아무리 반대해도 상관없어!" 자유의지를 결코, 무너뜨릴 수 없다는 생각에 더욱더 강하게 맞섰다.
아침을 먹다 말고, 부엌에서 뛰쳐나와 침대에 몸을 다시 던졌다. 가슴이 터질 듯 숨이 가빠왔고, 머릿속은 복잡했다. ‘왜 이렇게 어지러울까?’ 그저 한국에 가고 싶은 게 아니었다. 대학 진학 문제와 함께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문제였다. 나는 부모님에게 종속되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을 해야 하는 독립적인 존재라고 믿었다. ‘이건 나의 의지라고. 아무리 부모님이 반대해도 선택한 길을 가겠어.’ 창문을 통해 밝게 쏟아지는 햇살을 바라보며 분노를 삭였다. 다시 몸을 일으켜 학교에 가려는 순간, 문밖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마음이 조금 흔들리기도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