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이기도 했고, 동시에 자유를 상징하는 날이기도 했다. 슬그머니 집을 나서자, 차가운 바람이 나의 뺨을 스쳤다. ‘아 오늘은 늦으면 안 되는데.’
졸업식이 열리는 강당에 들어섰을 때, 북유럽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친구들의 웃음소리는 따뜻했다. 우리나라의 졸업식은 긴 연설 없이도 의미가 깊었고, 교장 선생님은 담담하게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며 졸업장을 수여했다. 나는 차례를 기다리며, 손에 한가득 땀이 고였다.
"이레나 뢰이칸도,"
교장 선생님의 목소리가 이곳에 울려 퍼졌고, 의연하게 단상으로 걸어나갔다. 졸업장을 받을 때, 저 뒤편의 객석에 앉아있는 부모님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엄마는 눈물을 글썽이며 딸을 자랑스러워하는 듯했지만, 그들의 눈길을 피하려 시선을 재빨리 돌렸다.
간결한 졸업식이 끝나고, 하얀 모자를 쓴 학생들이 기념사진을 찍느라 기쁨과 아쉬움이 뒤섞인 탄식은 당분간 끊이지 않았다. 나는 부모님을 찾는 대신, 조용히 뒷걸음질 치듯 운동장 구석 벤치로 걸어갔다. 여전히 차가운 바람이 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흩날렸다. 멀리서 친구들이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마리, 사라, 그리고 요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걸어왔다. "이레나, 축하해! 우리가 드디어 끝냈어!" 마리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응, 드디어 끝이네. 하지만 시작이기도 하지."
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아, 이제는 모두가 새로운 길을 가야 해. 하지만, 네가 한국에 간다는 건 아직도 믿기지 않아."
"네 선택을 존중해, 이레나." 사라는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이제 어른이 된 것 같지 않냐?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지만, 선택과 집중이 있다면, 길이 열린다고 했잖아. 네가 한국을 선택한 건 네 의지고, 그게 바로 널 이끌어줄 거야." 다른 친구도 웃으며 말했다. "한국, 진짜 먼 곳으로 가는구나. 우리가 널 자주 보지 못하겠지만, 그 선택이 너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줄 거라고 믿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쩌면 새로운 문화와 삶의 방식이 나를 변화시킬 수도 있겠지.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거야.“
"역시, 확실해." 요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우리 중에서 제일 강한 의지를 갖췄잖아. 네가 뭔가를 선택하면 그게 옳은 길이 될 거야."
요나의 미소에서 따스함을 느꼈지만, 그 순간도 금세 지나갔다. 하나둘 운동장을 빠져나가는 뒷모습이 점점 희미해지는 기억처럼 흩어졌고, 그 흐릿해져 가는 장면을 그저 바라봤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시간은 결코, 멈추지 않으며, 여기도 이 순간마저 변화한다’
비어가는 운동장은 어느덧 고요해졌다. ‘선택’이란 무엇일까? 길은 언제나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있고, 걷기로 한 길은 끝없이 이어지지만,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지 누구도 알 수 없으니.
운동장에 홀로 남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괜스레 부모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 공허 속에서 자유의지라는 힘은 나를 또 이끌기 시작했다. 엉덩이에 묻은 흙먼지를 천천히 털고 일어나 집에 도착하니, 부모님이 나를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으나,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엄마, 기억나? 그때 말해줬잖아. 숲속에서 이상한 그림자를 보았다고”
엄마는 순간 당황한 듯, 나를 쳐다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아, 그 얘기 말이니? 산속에서 나타난 ‘히시’ 말하는 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엄마가 정말로 그걸 봤다고 했잖아. 그런데 그게 진짜였을까?”
엄마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침묵했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휴 이레나, 뜬구름 잡는 소리 그만해라. 그건 내가 직접 본 거야. 그 당시에는 분명히 거기에 있었고, 지금은 사라졌을 뿐이지. 아무도 믿지 않지만, 난 봤어.”
"맞아, 그거." 나는 기억을 되짚으며 말을 이었다. "그때 엄마가 진짜로 그걸 봤다고 했지? 그런데 아무도 믿지 않았잖아. 혹시 그때, 눈보다 뇌가 먼저 인식한 건 아닐까?“
*히시(Hiisi)*라는 악령. 핀란드 신화와 전설에서는 히시가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고, 산이나 숲속에서 길을 잃게 만드는 등 두려움을 유발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고대 핀란드 사람들은 히시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숲속을 조심해서 다녀야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엄마는 그날의 기억이 다시 떠오르는 듯했다. "글쎄…. 그때는 정말로 본 것 같았어. 하지만 인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정말 뇌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덧붙였다. "아무튼, 그때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았지."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면… 한국에 가는 것도 그런 걸까? 내 선택이 진짜라고 믿고 싶지만, 어쩌면 그것도 뇌가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몰라.” 엄마의 경험과 자신의 결정을 연결짓는 순간, 내가 선택한 길이 어쩌면 '히시'와 같은 미지의 것인지 궁금했다.
"이레나, 너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정말로. 하지만 부모로서 너를 위험한 곳에 보낸다는 건,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야." 주름진 눈가를 살짝 문질렀다. "어렸던 너에게 그 도깨비 같은 이야기를 들려줬을 때도 밖은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시켜주고 싶었던 거야. 항상 널 지켜주고 싶은 마음뿐이었어. 그때도, 지금도 마찬가지야.“
아빠는 소파에 앉아 두 손을 깍지 낀 채,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레나, 우리가 네 선택을 막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야. 단지 부모로서, 네가 선택한 길이 안전하지 않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더 깊은 목소리로 이어갔다. "네가 고집이 세다는 건 알고 있어. 어렸을 때부터 그랬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우리가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잖니.“
엄마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리는 항상 네가 선택한 길을 존중하려 했어. 하지만 한국이라는 나라…. 전혀 알지 못하고, 그저 뉴스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들밖에 떠오르지 않아. 너를 그곳에 보내는 게 정말 옳은 선택인지. 우린 여전히 의문스러워."
나는 부모님의 표정을 보며 그들의 불안과 걱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은 나의 선택을 존중하려 하지만, 부모로서의 두려움과 딸을 지키고자 하는 본능이 교차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넌 우리가 사랑하는 딸이니까…. 네가 너무 먼 곳, 너무 낯선 곳으로 가는 게 두려운 거야."
아빠는 고개를 숙이며, 무겁게 덧붙였다. "우리는 네가 성장하고 독립하는 걸 기쁘게 생각해. 하지만, 네가 한국에 있다면, 맞닥뜨리게 될 것들을 알 수 없는 상황이니. 우리가 걱정하는 것도 당연하겠지."
엄마는 나의 손을 잡았다. 따스한 온기가 현실로 이끌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한국에 대한 열망이 치솟고 있었다.
한편, 내 눈에 보인 엄마는 나를 붙잡고 싶은 마음과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응원해야 한다는 두 가지가 충돌한 듯 보였다. "넌 정말…." , "한때, 내 아이를 보호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 보호가 벽이 될까 두렵다" 숨을 들이마시며, 다시 한번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고민했는지 안다." 흔들리는 목소리와 꽉 쥔 손길은 불안했지만, 마음속에서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는 듯 보였다. 딸이 어린아이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어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그 순간.
"하지만 네가 진정으로 그곳에서 무언가를 찾고 싶다면…. 그게 네가 원하는 길이라면…. 우리가 널 막을 수는 없겠지. 모르겠다, 이레나.“
부모님과의 대화를 마치고, 천천히 방으로 돌아왔다. 발걸음은 가벼워야 할 순간이었지만, 선택의 무게는 그리 가볍지 않았다. 문득, 시선이 화장실에 머물렀다. 스르륵 밀고 들어가자, 희미한 조명이 살며시 몸을 비췄다. 타일 바닥에 발을 딛는 순간, 발끝으로 전해지는 차가운 감각과 화장실의 공기는 묘하게 진했다. ‘내가 선택한 길, 그 끝에 뭐가 있을까?’ 샤워하면서, 손에 들린 칫솔로 천천히 이를 닦아냈다. 마저, 입안을 헹군 뒤, 거울을 마주하니. 건너편 그 공간은 여전히 자신의 판박이였지만, 속임수를 쓰는 듯 어딘가 일그러져가고 있었다.
‘넌 누구니? 혹시, 앞으로 너와 거래를 하게 될까? 혹은 이미 거래를 마친 거니?’
두 손을 모아 쥐고, 무언가 불가해한 존재를 향해 외쳤다. “인생이란 끝없이 이어지는 교차로. 그곳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끝없이 결정을 내려! 한국으로 떠나는 것. 수많은 갈림길 중 하나일 뿐이야. 그 대가가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 선택은 곧 자아를 새롭게 깎아내리는 칼이기도 하니까!”
그날 밤, 인식이란 선택에 따라 시야가 바뀌고, 그로 인해 인생의 방향 또한 바뀔 거라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