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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환 Oct 01. 2024

제1화 핀란드 소녀

 ‘선택’하다

 다시 밝아온 아침은 마냥 차가웠다. 창밖 전나무 숲은 고요했으나, 그 고요함 속엔 평온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늘은 늘 잿빛으로 물들어 있고, 해가 떠 있는 시간이 짧아지면 그늘은 길게 내려앉는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에게 깊은 우울을 드리우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북유럽만의 독특한 숲 내음과 싸늘한 공기는 어딘가 이질감이 존재했다.

 핀란드에서의 마지막 날, 그 작은 동양의 나라를 처음 알게 된 순간이 기억의 조각 하나하나가 흩날리듯 스쳐 갔다. 그날의 감각은 분명 어딘가 생경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으로 다가왔다. 

 눈 내리는 겨울밤이었다. 바깥은 하양으로 뒤덮여 숨을 죽이고 있었지만, 내 방만큼은 환한 불로 눈부셨다. 유튜브에서 우연히 본 K-POP 영상이 생각났고. 대비되는 두 나라의 문화가 자꾸 시야에 아른거렸다. 그곳의 밤은 낮처럼 항상 밝았으며, 거리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곳에서의 답답함을 날려줄 수 있는 새로운 세계였기에. 그곳의 에너지는 나를 매료시키기 충분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한글도 왠지 색달랐고 쉬웠다. 핀란드어의 복잡한 굴절과 비교해, 한글의 규칙성, ‘ㄱ’, ‘ㄴ’, ‘ㅁ’과 같은 자음과 모음의 조합이 자연스럽게 맞춰지는 놀라움을 선물했다. "어머, 이건 마치 기하학적 패턴 같잖아!" 

 화면에 집중하며 자막을 따라갔다. 빛나는 K-POP 아이돌들의 활력이 전해지며, 그들의 언어에 시선을 고정하고, 눈동자는 좌우로 움직이며 음절을 쫓았다.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멜로디는 평소에 듣던 음악과는 달랐다. 이 음악은 귀에 꽂히자마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그 비트에 맞춰 리듬을 타며 몸을 들썩였다. 그리고 어느새, 그 낯선 기호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교재에 적힌 ‘안녕하세요’라는 단어를 처음 발음했을 때처럼, 나의 몸과 혀끝은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였다. 무엇보다 이 언어의 직관적 조합은 ‘자유로움’을 선사한다고 생각했다. ‘이 언어는 나를 가르치지 않고, 내가 스스로 길을 찾게 해주는구나.’ 

그때 나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을 보았고, 한국이라는 나라를 새로운 관문으로 입장하는 하나의 열쇠라고 인지했다.

      


 학교에서는 세계사를 배우던 중, 선생님은 자신이 알고 싶은 나라를 탐험해보라는 과제를 내주셨다. 나는 어김없이 한국을 고르고, 그곳의 역사를 탐구했던 날도 얼핏 떠오른다. 그곳은 시간을 따라 변화해 온 나라이기보다는 끊임없는 침략과 고난 속에서 재탄생한 곳이었다. 과거 속에 얽힌 사건들—외세의 침략, 식민지 시대, 분단의 아픔—이 모두가 하나의 거대한 드라마처럼 다가왔고, 책 속에 갇힌 이야기가 아닌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점이 나를 더욱 흥분시켰다. 

 사회부문에서는 독창적인 전통문화와 현대적인 대중문화가 공존하는 모습이 독특했다. 한옥과 초고층 빌딩이 공존하는 풍경,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하며 K-POP 콘서트를 즐기는 아이러니한 모습이 온갖 상상력을 자극했다. 

 ‘빨리빨리’ 문화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리나라의 여유롭고 느린 일상과는 전혀 다른 이 속도감.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그리 신속하면서도 효율적인지 궁금증을 자아냈다. 핀란드에서는 버스를 한참 기다리며 각자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일상이었지만,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움직이는 방식, 그리고 지하철이 몇 분 차이로 끊임없이 다가오는 모습은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하물며, 여자에게도 안정감을 주는 나라였으니. 밤거리가 밝게 빛나고, 물건을 훔치는 도둑이 드물어 늦은 시간에도 혼자 다닐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 모든 것이 법의 시스템보다는 사회적 신뢰로 똘똘 뭉친 질서의 결과라니.’


 음식 역시 그곳에 가려는 주요한 이유였다. 유튜브 영상에서 본 김치, 비빔밥, 떡볶이 등은 이국적이면서도 맛있어 보였다. 핀란드 음식과는 전혀 다른, 강렬한 맛이 나의 감각을 자극했다. 우리 집은 주로 생선, 감자, 빵을 주식으로 삼았지만, 한국 음식의 다양성은 새로운 미식 세계를 열어주기에 충분했다.


 그 후, 상담실에서 선생님과 나눈 대화도 기억 속에 또렷이 자리 잡고 있다. 상담실로 향하는 긴 복도를 천천히 걸으며 눈에 익은 풍경들을 바라봤다. 회색빛 창밖으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숲과 무겁게 드리운 하늘, 그리고 그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한적한 교정. 

교실은 유난히 조용했다. 어떤 친구들은 개별 책상에 앉아 나름대로 학업에 집중했고, 누군가는 컴퓨터를 켜고, 또 다른 누군가는 창밖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 있다. 모두가 각자의 공간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보냈으며, 편안한 니트와 청바지, 혹은 무채색의 옷,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 등등 전통적인 틀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복장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상담실 문을 열자, 차분한 미소를 띤 선생님이 창가에 앉아있었다. 이곳의 벽은 최소한의 액자만이 걸려 있었고, 전통적인 교무실과는 달리 서류와 책들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었다. 창문 너머로는 눈 덮인 자작나무 숲도 희미하게 보였다. 

 “어떻게 지냈니, 이레나?” 선생님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동시에 모든 선택을 존중하는 말투였다.

 "한국의 대학에 지원하려고 해요." 결심을 굳히며 말을 꺼냈다. "새로운 환경에서 도전해보고 싶어요."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래, 이레나.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는 건 항상 의미 있는 일이지. 근데, 어째서 한국이니?"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서는 질문이었다. 나조차도 미처 깨닫지 못한 진정한 이유를 파헤치려는 듯한, 은밀한 자극을 던진다고 해야 할까. 나는 순간 멈칫했다. ‘그저 한국이 흥미로워서, 색다른 문화를 경험해보고 싶어서’라고 쉽게 말할 수도 있었지만, 선생님의 의도는 그런 피상적인 대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으니.

 "다른 친구들처럼 유럽의 명문 대학이 아니라…. 한국이라니, 대단히 독특한 선택이야." 선생님은 계속해서 조용히 말했다. "너의 결정이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해. 어쩌면 네가 이곳에서 느끼는 무언가를 반영하고 있지 않니? 자율적이지만 어딘가 제한적이고…. 자유로운 듯하면서도 답답한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일지도 몰라. 맞지?"

 선생님의 예측은 빗나가지도 않았지만 정확하지도 않았다. 핀란드의 교육 시스템은 자율성을 중시하지만, 어느 순간 그 자율성이 나를 옥죄는 하나의 울타리로 작용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이 생겼고, 그래서 한국의 대학에 지원하는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때 선생님의 질문에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뇌에서 일어나는 번잡한 상황을 누군가에게 설명하기는 또 다른 문제였으니까.

 "선생님 저, 한글을 배우고 있어요, 한국어를 배우는 게 쉽진 않지만, 그 언어가 뭔가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 뒤로,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소녀의 낭만적 환상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는요, 선생님. 전공은 토목공학으로 지원하고 싶어요. 자연이 주는 재료들. 물과 흙이 정말 흥미로워요. 그것들이 자연 그대로 존재하는 것도 멋지지만, 사람의 손으로 인공적인 요소—철근이나 콘크리트 같은—를 더해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과정도 매력 있어요."

 선생님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네가 말하는 건 자연과 인공의 결합이 주는 조화로움이 흥미롭다는 거로군. 그리고 그 인간의 창조물로 시민들이 편리해지니까."

 "맞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흙과 물은 중력에 의해 아래로 흐르지만, 철근과 콘크리트는 강하고 고정적이죠. 그런데, 그 둘을 함께 사용해서 다리를 놓고, 건물을 세울 수 있다는 게 놀라워요. 그게 마치….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만나서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 같아요."

 "너는 정말 도전적인 아이구나. 네가 준비를 잘했길 바라지만,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교육을 받았던 우리의 방식과는 많이 다를 거란다. 그리고 네가 지원하려는 학교는 경쟁이 아주 치열할 텐데, 그곳의 커리큘럼이나 교육 방식도 너에게 맞을지 고민해 봤니?"

 "네. 한국은 핀란드와는 달라요. 하지만 그게 바로 제가 선택한 이유예요. 그곳의 에너지와 속도, 그 모두가 저를 끌어당겨요. 전 그곳에서 제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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