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하다(2)
원서를 접수하고 몇 달이 지나, 한국의 미래대학교에서 합격 통지서를 받았을 때의 설렘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주말 오후, 집에서 만화책을 읽고 있었다. 핀란드의 낮은 해가 나지막이 지평선에 걸쳐 있을 때, 바람은 가볍게 창문을 두드리며 평온한 분위기를 더했다. 나는 한껏 책을 몰입한 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때, 멀리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레나! 우편 왔다!"
책을 책상에 내려놓고, 조심스레 거실로 향했다. 아빠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약간 들떠 있었고, 봉투를 흔들며 소파에 앉아있었다. 떨리는 심정을 감추며 아빠에게 향했다. 그러다,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무언가 예상치 못한 것이 다가올 때의 불안과 함께 이상한 설렘이 교차했다. 우표에는 낯익은 대학 로고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게 뭐니?" 아빠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순간 당황스러워 "아, 그냥…. 우리 학교에서 온 거야. 작은 프로젝트 관련된 것일지도 몰라." 대답을 모호하게 얼버무렸다.
아빠는 눈살을 찌푸리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봤다. "프로젝트라고? 그거 한국어 아니야?"
"응, 요즘 국제적으로 이런저런 프로그램들이 많잖아. 그중 하나일 거야." 나는 서둘러 봉투를 잡아당기며, 그의 눈길을 피했다.
"그래…. 그런데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구나."
"나중에 이야기할게요, 아빠."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아빠는 눈치가 워낙 빠르기에, 대충 알아챘을 것이다. 내 손도 이미 살짝 떨리고 있었으니.
봉투를 손에 든 채 2층으로 향했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은 자연스러워 보였지만, 속으로는 어지러울 만큼 복잡한 감정이 뒤섞였다. 첫 번째 계단을 밟을 때부터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이게 정말 가능할까?' 한 걸음씩 계단을 오르면서, 두려움과 기대가 뒤엉킨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마침내, 계단 끝에 다다르자, 낯익은 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손잡이를 돌리며 잠시 숨을 고르니, 벅찬 감정이 잠시나마 눌리는 듯했다.
이 방은 상상 속에서 계획을 세우고, 모든 결정을 내렸던 나만의 작은 세계다. 오늘 이 순간, 그것이 현실로 바뀌려는 찰나였다. 들어오니, 익숙한 책상과 의자가 자리하고 있었지만, 그날따라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조용하고 고요했으나, 그 적막함이 곧 깨질 것이라고 직감했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봉투를 손에 쥔 채, 멍을 때렸다. 그리고 봉투를 뜯기 전의 그 몇 초는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손끝에 닿는 종이의 감촉, 가슴속에서 느껴지는 묘한 두근거림. 그것이 설렘이든 위구심이든, 그 순간은 모든 감정이 뒤죽박죽이었다. 안의 서류가 같이 찢어지지 않도록 가장자리부터 봉투를 뜯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서류를 꺼냈는데…. 그 안에는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단어가 선명히 찍혀 있었다. ‘합격’ 눈앞의 글자가 순간 흐릿해질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이것이 정말….’
‘이제 부모님도, 친구들도, 이 나라까지…. 정말로 떠나는구나.’
침대에서 일어나, 늘 앉던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의자의 나무 질감이 익숙했지만, 그 편안함에 숨어 있는 무언가가 나를 잡아끌고 있었다. 다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발걸음은 자연스레, 침대로 또 향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시간이 나를 따라잡으려는 듯이 천천히 지나갔다. 침대에 몸을 눕히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며, 뇌에서 일어나는 생각도 멀리 흘러갔다. ‘지금 이 순간도, 곧 과거가 되는 걸까? 지금의 나는 바로 그 과거가 된 나일까?’
침묵 속에서 시간만 끊임없이 흘러간다. ‘거울 속에 보였던 나는… 정말 나였을까? 아니, 그건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는 또 다른 내가 아닐까?’ 그곳에 비쳤던 모습은 분명 나 자신이었음에도, 그 표정과 눈빛은 어딘가 어색했다. ‘그때의 내가 과거라면, 지금의 나는 현재이고, 내가 맞이할 한국에서의 나는 미래겠지.’ 이처럼, 나는 자아가 세 가지로 나뉘어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보이지 않는 실에 의해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처럼, 시간이라는 무형의 손에 이끌려 여기서 저기로, 과거에서 미래로 이동하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아는 변하고 움직인다….’ 마법의 주문처럼 나지막이 중얼거리니, 몸은 곧 잠으로 빠져들었다. 의식이 없는 꿈에서조차 거울 속에서 마주했던 그 녀석이 다시 떠오르며, 거짓된 얼굴처럼 다가왔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비니, 창밖으로 희미한 새벽빛이 어슴푸레 방을 비췄다. 짐은 이미 다 싸놓았지만, 떠난다는 현실이 갑자기 무겁게 다가왔다. 조용히 문을 열고 거실에 들어서자, 평소보다 더 고요한 공기가 감싸왔다. 나의 인기척을 들은 아빠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레나, 공항까지 데려다줄게."
나는 그 따뜻한 제안에 미소를 지었고, 고개를 끄덕였다. 몇 발자국 더 나가자 풍기는 향기— 새벽부터 엄마가 준비한 냄새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카렐리안 파이(Karjalanpiirakka)가 오븐에서 갓 구워져 나왔고, 짭짤한 버터와 달걀을 올린 파이의 향이 공기 중에 은은히 퍼져 코끝을 간지럽혔다.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엄마가 환하게 웃으며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너 좋아하는 것들로 아침 준비했어. 먹고 가야지, " 엄마는 새벽부터 준비한, 정성이 깃든 음식을 나의 앞에 내밀었다. 나는 그 파이와 차를 마시며, 고요한 순간들을 차곡차곡 마음에 담았다. 그리고 몇 분 뒤, 아빠가 차 키를 들고 거실로 들어와 말했다. "출발할 준비 됐니?"
자동차는 고요한 공기를 가르며 부드럽게 도로를 달렸다. 그때, 아빠가 문득 입을 열었다. "한국까지 가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니?" 핸들을 살짝 돌리며, 고개도 살짝 돌렸다.
"약 13시간 정도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참 신기한 일이지. 시간이라는 게 흐르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고." 잠시 후 깊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사실, 가족이라는 것도 우연의 연속으로 만난 것 같지 않니? 너의 고조할머니와 고조할아버지도 그 오래전 전쟁터에서 총칼을 피해 우연히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우리가 있을까? 운명처럼 보이지만,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들어."
물리학 교수인 아빠의 말이 점점 철학적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느꼈지만,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긴 어려웠다. 어렸을 때부터, 종종 난해하고 복잡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리고 오늘은 평소보다 더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만약 중력이 없다면," 그는 이어 말했다, "네가 가려는 곳은 3차원이 아닌 2차원 평면일 뿐일 거야. 우리가 느끼는 깊이감은 사실 중력이 만들어내는 착각이지. Z축이 없으면 진정한 ‘일그러진 이상’을 경험할 수 없을 거야."
"시간은 흐르지 않아, 공을 위아래로만 던지는 동영상을 거꾸로 재생한들, 뇌는 아무 문제를 인지하지 못해. 그 이유는 중력이 좌우가 아닌 아래로만 방향감을 주기 때문이야. 너도 중력이 벗어난 세계에 가면, 시간의 개념이 무너질지도 몰라."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빠가 말하는 '일그러진 이상'이라는 표현은 나에게 너무 낯설었다.
"그리고 이레나가 전공하려는 토목공학도 물리학의 일종이니, 나중에 그 흐름을 알 수 있을 거야." 아빠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차분하게 덧붙였다. "어쩌면 너에게도 우리의 유전이 흐르고 있는 게겠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렇게 아빠의 독백이 끝나고, 차는 어느새 공항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창밖으로 조용히 흘러가는 도로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무심한 차들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질서 있게 이동했다. 공항에 도착하자, 아빠는 떨리는 손으로 트렁크를 열고 짐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캐리어를 끌고 로비로 들어서니, 눈앞에는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물결이 펼쳐졌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사람들이 서 있었고, 체크인 카운터는 길게 줄 서 있는 승객들로 분주했다. 공항 특유의 활기와 서두름, 곳곳에서 들려오는 다양한 언어들이 내 뇌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리고 환한 불빛 아래에서 반짝이는 유리 바닥, 여행객들의 두꺼운 외투에 묻은 찬 공기, 먼 곳에서 불어오는 미래의 기운이 내 감각을 곧추세웠다.
공항의 유리창 너머로 비행기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부모님과 마지막 대화를 나눴다. "이레나, 이렇게 너를 떠나 보내기가 쉽지 않다는 걸, 너도 알고 있지?" 아빠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예전부터 반복되는 말을 또 꺼냈다. 그의 눈은 나의 얼굴을 응시했지만, 그 이면에는 아쉬움과 걱정이 엿보였다.
"알아요, 아빠. 걱정 끼쳐드릴 일은 없을 거예요. 자주 연락할게요!" 아빠의 얼굴이 조금 굳어지려던 순간, 엄마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꼭. 자주 연락하고. 넌 우리의 외동딸이잖니" 그녀의 목소리는 따뜻하면서도 떨렸고, 나는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감추기 위해 급히 고개를 돌렸다.
"신분증, 여권, 비자 다 챙겼지?" 아빠는 딸의 상황을 하나라도 더 챙기려는 애틋함이 묻어 있었다.
"물론이죠, 다 챙겼어요."
"대학에선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거 맞지?, 먹는 건 괜찮을까? 한국 음식은 핀란드 음식이랑 많이 다를 텐데…"
"여기서 만들어 먹었을 때는 모두 맛있었어요. 그리고 잘은 모르겠지만, 인생은 원래 모험이잖아요." 웃으며 대답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바쁠 테고, 그 과정에서 더 성장할 거에요."
부모님은 딸의 의연한 대답에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들은 나를 놓아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불안과 걱정이 역력했다.
잠시, 창밖을 둘러본다. 고요한 풍경, 하늘을 수놓은 푸른빛의 나무들, 겨울이면 하얗게 덮이는 눈밭, 차가운 공기 속에서 느끼던 자연이 모두 뒤로 물러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공상에 젖어있던 찰나, "이제 시간이 다 됐구나." 아빠는 담담하게 말하며, 한 손으로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숨을 들이마신 후, 짧지만 무거운 포옹을 나눴다. 그리고 발걸음을 떼면서도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뒤로 남겨진 그들의 묵묵한 응원은 뒤통수에 그대로 얹힌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