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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환 Oct 01. 2024

제2화 낯선 세계, 낯선 시선

 ‘인식’하다

 인천공항에 발을 내디딘 순간, 공기 중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여기도 겨울은 춥구나…’ 내심 중얼거리며 패딩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유튜브 속 화려한 서울의 활기찬 거리는 따스한 조명으로 넘실댔는데, 실제로 발에 닿은 땅은 생각보다 서늘했다. 겨울의 냉기가 공항 출입구 사이로 스며들어와 뺨을 스쳤고,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폐 속을 꽉 채웠다. 패딩 속에 몸을 더 깊이 파묻으려는 본능은 익숙했으나, 넓은 대리석 바닥의 반사된 빛은 아찔했다. 높이 솟은 천장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았고, 그 아래로 끝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의 거대한 흐름이 친숙함을 앞질렀다. 공항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지만, 자신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때 비로소 새로운 세계에 들어섰음을 실감했다. 

 주고받는 한국어 대화, 짐가방이 쿵쿵거리는 소리, 수많은 안내 방송이 귀에 울리니 가슴은 살짝 겁을 먹은 듯했다. 무의식적으로 주변의 모든 소리를 하나씩 인지하며, 짐 찾는 곳으로 급하게 향했다. 바퀴 소리가 바닥을 긁고 지나가면서, 커다란 유리창 밖으로는 한국의 밤하늘이 보였고, 나의 눈에는 그것조차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예약된 시간에 맞춰 출입구로 나섰다. 밖으로 나와 공항 택시를 타기까지, 뇌는 귀와 눈으로 들어오는 온갖 신호를 끊임없이 내 방식대로 처리해 나갔다. 유럽과는 사뭇 다른 질서정연한 광경이 눈에 들어올 찰나, 정시에 배차된 기사님이 친절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서울 프린스 호텔까지 가시는 거죠?"

 "네, 맞습니다."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택시 기사님은 둥글넓적한 얼굴에 소박한 인상을 풍겼다. 가늘게 찢어진 눈매는 오랜 세월 도로 위를 누빈 사람답게 날카로웠다. 뒷문을 손수 열며, 환하게 웃는 얼굴엔 동양인 특유의 온화함도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유튜브에서 보던 한국인들과는 조금 달랐다. 영상 속, 매끈하게 편집된 모습이 아닌 살아있는 온기가 느껴지는 존재여서 그런 건가.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한국인과 같은 공기를 나누는 건 처음이구나…." 내심 혼잣말을 되뇌었다. 기사님과 짐을 싣고, 차 안에 들어서자마자 히터 바람이 온몸을 휘감았다. 장시간 비행의 여파로 몸은 금세 노곤해졌고, 잠시 눈을 감고 싶었다.

 "어디서 오셨어요?"

 "아, 핀란드에서요."

 "오, 멀리서 오셨네요. 서울까지는 꽤 거리 있긴 한데, 혼자 오신 거예요?"

  나는 애써 고개를 끄덕였고, 한동안 기사님과의 대화는 이어졌다.

 "아따. 한국말 잘하시네. 여기 혼자 오신 거 보니까 공부하러 오셨나 봐요? 한국 대학에 다니려고요?"

 "네, 맞아요. 대학에 다니게 될 거예요."

 "무슨 전공하시려고요?"

 "토목공학이요." 

 최대한 간단히 대답하며 피곤한 얼굴을 감추려 애썼다. 졸음이 쏟아졌지만, 기사님의 끝없는 질문에 차마 눈을 감을 수 없었다. ‘한국 사람의 정이라는 게 이런 건가?’ 참 친절한데. 조금 부담스럽네.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적당히 대답하면서도 점점 얼굴에 피로가 묻어나는 걸 감출 수 없었다. 어느새 눈꺼풀이 무거워지더니, 낯선 세상과의 신호음이 끊겼다. ---- 그리고 얼마 지나, 희미하게 들려오는 택시 기사님의 목소리가 멀리서 귓가를 두드렸다. 

 "학생, 다 왔어요." 

 그 순간, 맥아더 장군이 외친 ‘Fire’ 소리가 겹쳐 들렸다. 세계사 책에서 배운 인천상륙작전의 한 장면이었다. 적막을 깨는 첫 조명탄이 하늘을 가르며 쏘아 올려졌던 그때. 전투가 시작될 준비를 알리는 빛이 어두운 바다를 찢어놓듯, 내 잠을 깨운 것은 그의 목소리였다. 잠 속에서 평온하게 숨죽이고 있던 내 뇌는 전장 속 병사들처럼 단번에 깨어났다.

 현실 세계로의 상륙은 나름 빠르고 확실했다. 그리고 어떤 꿈을 꾸었는지 분명 기억하고 있었는데, 눈을 뜨자마자 그 기억은 증발하듯 사라지고, 알 수 없는 허전함만 남았다. 차에서 이미 내렸던 기사님이 뒷문을 열어주었고,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면 된다는 손짓을 했다. 막 깨어나서 그런지 손이 조금 무거웠다.

‘아, 드디어 도착했구나.’ 주위에 화려하게 빛나는 간판을 올려다보며, 예약해 둔 호텔로 들어갔다. 고요한 로비, 은은한 조명이 비추는 대리석 바닥, 약간의 피로를 달래주는 그 차분함 속에서 체크인을 마치니, 까만 카드키가 손에 들렸다. 이곳은 내가 개강 전까지 1주 동안 머물 장소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호텔의 방은 702호. 호텔 방에 도착해 호실 번호를 보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내가 참 이 호실로 예약했었지…. 7과 2라는 불안한 조화.’

"7이라는 게 무슨 의미일까? 이 호텔 방이 나의 인지적 경계를 시험하는 장소인 것 같네."

“띠디” 소리와 함께 천천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혼자만의 공간에 들어서니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지만, 동시에 자신이 이곳에 온 것도, 이 방을 예약한 것도 뭔가에 의해 결정된 것처럼 느껴졌다. "설마, 뇌가 만든 환상이라면…. 또 다른 꿈속에 있는 걸까?" 

그리 높지 않은 7층. 서울의 야경은 픽셀로 구성된 디지털 화면처럼 또렷하면서도 인위적이다. 각지각색 다채로운 빛, 고속으로 움직이는 승용차들, 그리고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도시의 소음이 현실인지, 꿈인지 헷갈릴 정도로 기이하고 괴상했다. '내가 지금 이곳에 있는 게 맞을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뇌가 만들어낸 환상일까?' 

 무거운 여행용 가방을 한쪽에 밀어두고, 침대 가장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곧바로 엄마와 아빠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도착했어, 엄마. 아빠도 옆에 있지?" 피곤한 목소리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화면 속 부모님의 얼굴은 걱정스러움과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무사히 도착했다니 다행이다, 이레나. 어때, 한국은? 낯설지?"

 "응, 아직은…. 좀 낯설어. 근데 괜찮아, 호텔도 좋고."

 아빠가 화면 너머로 손을 흔들며 말했다. "잘 쉬고, 내일은 천천히 움직여. 괜히 무리하지 말고."

 통화를 마치고 나서, 호텔 방의 온기에 몸을 기댔다. ‘내일은 머리 좀 해야겠다. 빨간 머리는…. 아무래도 한국 사람들 눈에는 좀 이상하지 않을까.’

 짐을 정리할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긴 했지만, 몸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팔다리는 무거운 추를 단 것처럼 힘이 빠져가서 그런지, 차가운 타일 바닥을 딛고 싶지도 복잡한 샤워를 준비할 에너지도 없었다. 뇌의 명령에 굴복한 육체는 침대로 나를 끌어당겼다. ‘뇌도 쉬어야 하는 걸까?’ 

몸을 눕히려다 말고, 갑자기 무언가 불편했다. 손은 무의식적으로 목 뒤로 향했고, 익숙한 동작으로 훅을 풀었다. 얇은 끈이 어깨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오자마자 한 손으로 들어 올려 공중에 던지니, 침대 옆으로 가볍게 착지했다. 나에게는 하루의 끝을 알리는 작은 의식이라고 해야 할까. 그제야 긴장이 풀리며 온몸이 녹아들었다. ‘내 몸이 다시 내 것이 된 기분이야.’     


 아침 햇살이 블라인드 틈을 비집고 들어와 어느새 망막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눈을 비비며, 천천히 일어나 샤워를 하고 난 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깨끗이 씻겨진 피부와 새로 화장을 한 얼굴은 낯설지 않았다. “역시 난 예쁘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왠지 모를 자신감이 되살아났다. 오늘은 미용실에 예약해 둔 날. 

 지하철을 타기 위해 복잡한 개찰구 앞에 서자, 눈앞에 나타난 노선도를 보고 잠시 어지러웠다. 색색의 노선들이 마치 개미굴 같기도 했고, 미래의 어느 지점에서 만날지도 모를 다양한 '자아'들로 갈라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공항에서 산 교통카드를 손에 쥔 채, ‘어디로 가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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