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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환 Oct 02. 2024

제2화 낯선 세계, 낯선 시선

'인식'하다(2)

 "도와줄까요?" 뒤에서 다가온 또래로 보이는 남자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검은 머리에 깔끔한 코트를 입은 그는 친절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네, 감사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전혀 모르겠어요."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교통카드를 보여주었다.

 "아, 처음이신가 봐요. 어디 가세요?"

 "홍대로 가고 있는데, 노선이 너무 복잡하네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노선도를 자세히 살피더니,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혹시, 대학생이세요?" 살짝 미소 지으며 물었다. 또래 같았으니 자연스럽게 나이를 물어본 것이었다.

 "저요? 서른셋이요."

 '서른셋이라고? 분명 내 또래인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속으로 동양인의 동안에 감탄하며, 나도 모르게 그를 더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럼 나는 한국인한테 어떻게 보일까?’ 마음속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고마워요” 다시 한번 진심을 담아 말하자, 그 남자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말없이 떠났다. 카드를 꽉 쥔 채 그가 가르쳐준 노선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러 갈래의 노선… 이 모든 길이 내 결정으로 이어질까? 아니면 전혀, 다른 내가 되어 다른 길로 가게 될까?'라고 망상을 펼치며, 개찰구 위의 센서에 카드를 대고 지나갔다.

 

 플랫폼에 도착했을 때는 깔끔하게 정리된 역의 모습과 한결같이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열차는 약속이라도 한 듯 정각에 맞춰 도착했다. 그때 어디선가 익숙지 않은 선율이 흘러나왔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것은 한국 전통 음악 '아리랑'이라고 한다. 미세하게 들리는 그 멜로디는 지하철 도착을 알리며, 다른 차원의 세계로 초대하는 듯했다. "칙칙, 쓱" 시민들의 발걸음에 맞춰 미끄러지듯 플랫폼과 완벽하게 일치하여 정차했다. "띠리리링~" 하는 전자음을 타고,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고요함을 가르듯 소리 없이 밀려 들어왔다. 사람들은 신속하면서도 질서 있게 탑승하고, 닫히는 순간까지도 혼란스러움 없이 움직였다. 

 내부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조용했다. 모두 각자의 세상에 잠겨 있었고, 스마트폰 화면을 응시하거나 조용히 음악을 듣곤 했다. 의자에 앉자마자 느껴지는 깨끗함, 그리고 바닥에는 한 점의 쓰레기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 정말 미래도시 같은데?"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 말하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어디서나 잡히는 와이파이 덕에 해외로의 통신도 원활했다. 신기하게도 전광판에는 영어, 일본어, 중국어가 모두 표시되어 있어, 외국인들에게도 편리한 시스템이라는 점에 또 한 번 놀랐다.

 지하철이 터널을 빠르게 가로지르며 갑자기 밝은 빛이 들이닥쳤고, 한강의 광활한 풍경과 도시가 눈앞에 펼쳐졌다. 거대한 물줄기가 도심을 가로지르며, 강 너머로는 롯데타워가 우뚝 솟아 있었다. ‘여긴 정말 모든 게 다르구나.’ 

 핸드폰을 꺼내 들고 셀카를 찍으려 하다가, 여전히 잠에서 덜 깬 듯한 얼굴을 보니 또다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찰칵’

 사진 속 배경은 바깥풍경이 희미하게 보였지만, 문자창을 열었다. 그리고 '여긴 이렇게 멋져요!'라고 짧게 적어, 사진과 함께 엄마에게 전송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미용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여기는 외국인 전용 삽으로 유명한 곳이라더라." 스스로 중얼거리며, 가게 앞에 다다랐다. 미용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주로 서양인 고객들이었고, 그들의 눈부신 금발과 화려한 색감이 무성했다. 이곳은 동양인보다는 서양인의 취향에 맞춘 스타일링으로 이미 평판이 자자했다. 우리가 원하는 색조, 머리 길이, 그리고 각자의 얼굴형에 맞춘 세련된 스타일. 

 '역시나, 외국인들 마케팅에 성공했구나' 이곳에서 염색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가게로 들어서자 한 디자이너가 환한 미소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예약하셨나요? 어떤 스타일을 원하시나요?"

 "네. 제 이름은 이레나입니다. 빨간 머리를 유지했었는데…. 노란 머리로 바꾸고 싶어요. 그리고 어깨까지 짧게 커트하려고요."

 디자이너는 핸드폰을 스크롤하며 여러 스타일을 머릿속에 그렸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 길이 커트와 노란 머리…. 알겠습니다. 그럼, 화면과 같이 금발을 좀 차분하게 할까요? 아니면 밝고 화사하게 가시겠어요?"

 거울 속 얼굴을 눈으로 훑으며 결정했다. "차분하게 부탁드려요. 너무 화사한 건 저한테 좀 부담스러울 것 같아요."

 "좋아요, 그럼 차분하고 자연스러운 톤으로 금발을 맞춰드릴게요. 그리고 커트는 어깨선으로 깔끔하게 정리하겠습니다."


 염색약이 머리카락에 스며들고 가위질이 귓가에 울리는 그 순간, 눈앞에 비친 건 분명 자신인데 그 모습이 어색했다. 금빛 머리가 어깨에 흩날리며 형체를 잡아갈수록 더욱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동그랬던 거울이 왜곡된 그림자처럼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주변의 모든 사물이 실제와 비현실의 경계에 있는 듯했다. 색, 소리, 감촉마저….  “이게 진짜 나 맞아?”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거울 막은 얇은 것 같으면서도, 한없이 두꺼워 나 자신을 이방인으로 만들어버리고 있었다.

 계산대 앞에 서서, 카드를 내미는 얼굴에선 애써 부드러운 미소가 흘러나왔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끝내 지워지지 않는 찝찝함도 있었다. 문을 나설 때도 또 다른 자신이 내 뒤에서 나를 응시하는 듯한 이 기분. 

 놀랍게도, 가벼워져야 할 머리카락보다 그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더 무거웠다. 거리를 거닐다 보니, 어느새 손끝은 이미 얼어붙었고, 새로 커트한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흩날리며 얼굴을 휘감았다. 지독한 염색약이 뿜어져 나오는 가운데, 홍대 거리도 여러 향과 소리가 섞여 있다. 거리공연을 하는 젊은이들의 기타 선율은 익숙했던 헤비메탈의 강렬한 비트와는 다른 감미로운 분위기를 선사했고, 달빛처럼 잔잔하면서도 서정적이다. 나의 발걸음은 그에 맞춰 부드럽게 움직였고, 구름 위에 잠시 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늘어선 포장마차에서는 김이 피어오르며, 어묵과 떡볶이의 진한 향이 입안에 금세 침을 고이게 했다.

 

 하지만 몇 걸음 더 내딛자, 미용실에서 느꼈던 이질감이 또다시 주변의 모든 것을 압도했다.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길거리의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려 했지만, 이 모든 것이 너무도 환상처럼 느껴져 손이 덜덜 떨렸다. 그리고 다시 호텔로 돌아온 뒤로는 여기에 갇힌 듯이 이틀을 보냈다. 대학교 오리엔테이션까지는 앞으로 3일, 개강까지는 5일.

 평소 같았으면 호텔 수영장이나 사우나에서 여유를 즐겼을 텐데, 이번엔 그럴 마음조차 생기지 않았다. 룸서비스를 시키거나, 호텔 복도가 한산할 때쯤 빠르게 내려가 조용히 아침을 해결하고 돌아와 넷플릭스를 틀었다. '왜 이렇게 움츠러들고 있는 거지? 내가 원하는 게 이건 아니었는데…'

리모컨을 손에 쥔 채, 텔레비전 화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무심코 버튼을 눌렀다. 채널을 하나씩 넘길 때마다 화면이 바뀌었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뇌가 자동으로 지시를 내린 듯, 손가락만 리모컨 위에서 움직였다. '클릭', '클릭', '클릭' 


 화면은 쉴 새 없이 바뀌었고 드디어 익숙한 장면이 눈앞에 스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손이 멈췄다.

 ‘Lost in Translation’

스칼렛 요한슨이 낯선 도시에서 고독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이자, 무의식적으로 화면에 빨려 들어간다. 고요한 호텔 방, 텅 빈 서울의 겨울밤과 묘하게 겹쳐지는 그 분위기 속에서 명대사를 기억해냈다.

 "난 점점 내가 누군지 잊어가고 있는 것 같아."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터질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리모컨을 바닥에 던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호텔 밖까지 울릴 만큼 크게 외쳤다.

 "난 점점 내가 누군지 잊어가고 있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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