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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환 Oct 02. 2024

제2화 낯선 세계, 낯선 시선

 ‘인식’하다 (3)

 호텔 방 거울에 비친 나는 여전히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하지만, 목소리가 두 개로 쪼개진 듯한 느낌. 하나는 스칼렛의 대사, 그리고 하나는 나의 외침. 손을 거울에 대고 생각했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나일까?'     


 다음날,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뭔가를 결심한 듯 행동하기 시작했다. "뭐 어때? 바람이나 쐬러 가자." 나름의 확신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방을 나서며 문을 세게 쾅 닫았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면서도 발걸음은 이전보다 빠르고 거침없었다. 누군가 뒤에서 나를 밀어붙이는 것처럼, 손은 이미 아래를 향하는 화살표 버튼으로 향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다다다다 눌러대니, 문이 열렸고 서둘러 들어가 거울에 비친 눈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분노에 가까운 표정이 담겨 있다.

 막상 거리로 나서자, 어디로 갈지 몰랐던 나는 무작정 발길을 옮겼다. 그러다가 자연스레 '미래대학교'로 향했다. ‘아무래도 내 뇌는 며칠 후의 일정을 확인하려고 핑계를 대는 것 같아.’ 스스로 타이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 핑계가 꽤 그럴듯하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학교라는 명분, 다소 합리적인 듯하면서도 다분히 충동적인 이 발걸음. 그렇게라도 목적지를 정해준 것에 대해 묘한 안도감이 흘러나왔다. ‘앞으로 다니게 될 학교니까… 가봐도 괜찮잖아? 궁금하기도 했고.’


 캠퍼스는 현대적인 유리 건물이 푸른 하늘 아래 번쩍거리고, 그 옆으로는 오래된 전통 건축물들이 줄지었다. 세련된 기하학적 구조물과 고전적인 기와집이 한 공간 안에 어우러져, 시대와 역사를 초월한 듯한 감각이 신비로웠다. "여기, 나쁘지 않네." 캠퍼스를 천천히 걸었다. 아직은 휴강 기간이라 학생들로 붐비지 않는 캠퍼스는 예상보다 쾌적했고, 복잡한 거리에서 벗어난 탓인지 마음도 가벼웠다. 널찍한 광장에 흩날리는 잔잔한 바람에 노란 머리칼을 흩날리며, 평화로운 자신을 잠시 느꼈다. ‘내가 이곳과 일부가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이 순간만큼은 이방인이라는 감정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진 기분이었다.

 

 아스팔트는 생각보다 매끄럽고 차가웠다. “우리나라 아스콘(아스팔트 콘크리트)과는 뭔가 다르군.” 핀란드에서의 아스콘은 겨울철 눈과 얼음에 맞춰 내구성이 강하게 설계되었고, 미끄럼 방지 처리가 더욱 거칠었다. 반면, 서울의 아스팔트는 더 매끈해 보였지만, 그 안에 담긴 기술적 차이 그리고 날씨와 기후에 맞춘 건설 방식이 분명히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아래 깔린 보도블록도 유심히 살펴보았다. "한국은 왜 이렇게 정교하게 블록을 맞췄지? 핀란드에서는 이런 패턴보다는 자연스러운 디자인을 선호하는데…." 블록의 작은 균열과 경계선 하나하나도 눈에 들어왔다. 이방인의 시선으로만 바라보던 도시가, 이제는 토목공학을 전공할 학생으로서의 시선으로 점차 달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발끝에서 느껴지는 아스팔트의 차가움을 가로지르며, 어느새 학교 중앙의 연못 앞에 다다랐다. 잔잔히 흔들리는 물결을 바라보며 고요한 평화 속에서 머물다가, 또다시 걸음을 옮겨 중앙도서관을 구경했다.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니, 책장에 빼곡하게 채워진 책들이 숨을 죽인 듯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 광활한 공간을 구석구석 탐험하는 자신을 상상했다. 어릴 적 소녀로 돌아가 마음껏 뛰어다니며 구석진 곳까지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딘가 익살스러우면서도 우스운 행동에 ‘까르르’ 맑고 투명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 맞다! 이태원으로 가면 나 같은 이방인이 많겠지?"      


 서울의 다른 지역에서 느꼈던 시선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외국인들이 자주 보였다. 각기 다른 언어들이 섞여 흘러나오고, 익숙한 언어도 곳곳에서 들려왔다. 오랜만에 기분이 풀리는 것을 몸으로 느끼며, 그 기분은 자연스레 길가에 있는 한 카페로 이어졌다. 익숙한 나무 향과 실내장식이 눈에 들어왔다. 핀란드에서 종종 들르던 카페들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높은 천장과 따뜻한 조명이 어우러진 공간, 구석구석 놓인 작은 화분들, 차분하게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


 주문대 앞에서는 고민할 것도 없었다. 핀란드에서 자주 마시던 커피와 시나몬 번을 주문하며, 이곳이 마치 오래 알고 지낸 공간인 듯 익숙했다. “커피 하나 주세요. 그리고 시나몬 번도요.” 친근한 향이 코끝을 자극하며, 한층 더 안락한 분위기가 다가왔다. 따뜻한 커피잔을 손에 쥐고 테이블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I think we should go to the gallery this afternoon. What do you think?” “Yeah, that sounds perfect. Maybe we can grab something to eat afterward.” 들려오는 영어 대화도 낯설지 않았다. 이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시나몬 번의 맛이 혀끝을 감싸자, 그리웠던 감각들이 되살아났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도, 이곳만큼은 나의 뿌리를 찾은 듯했다. 아스팔트 바닥의 차가운 감촉을 비교하던 내가 이제는 따뜻한 카페 안으로 피신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2시간 정도 흘러, 사람들의 대화는 가라앉았고 어느새, 이태원이라는 호기심도 끝나가더니, 마음 한구석에서는 또다시 새로운 것을 갈망했다.


 문득, 머릿속에 잠깐 스쳐 지나갔던 용산기념관이 떠올랐다. 세계사 수업 중 잠깐 나왔던 그 한국 전쟁이 탐험의 목적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금세 시선을 돌려 그곳으로 향했다. 도착하자, 광장 한가운데서 펄럭이는 수많은 국기에 눈길이 멎었다. 하늘 높이 휘날리는 깃발들은 한국을 도우러 온 나라를 상징했다. 각각의 국기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었고, 그들은 모두 같은 목표를 위해 싸웠다. 이국적이면서도 묵직한 역사의 향기가 꽤 진했다. 기념관으로 이어지는 복도는 고요하고 경건했다. 양쪽 벽에는 전사자들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 비석 위로 수많은 전사자까지. 각각 이름은 하나의 삶을 의미했다.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어 그 돌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중앙 입구로 들어서면, 커다란 벽화에는 총성이 울리던 그날들의 기록이 담겨 있었고, 그 시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벽을 따라 이어진 사진들, 그리고 설명들. 핀란드와의 연결고리를 더듬으며, 그동안 접했던 역사를 다시금 떠올렸다.

 곧이어 나는 핀란드 내전과 한국 전쟁의 흔적에서 공통점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나라의 분단, 이념에 의한 학살, 그리고 잔혹한 전쟁의 상처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핀란드 내전'을 검색해, 과거 좌우익 내전을 다시 확인하는데 몰두했다. 1918년 핀란드의 내전은 러시아 제국의 붕괴 후 국가주도권을 두고 벌어진 참혹한 전쟁이었다. 좌우익 간의 대립으로 벌어진 이념 학살과 전쟁이 지금 이 한국 땅에서 일어난 역사와 비슷했다. 검색 결과를 스크롤하며, 빠르게 읽어 내렸다. 3개월간의 내전, 수만 명의 희생자, 학살당한 자들보다 더 많이 죽어간 포로들….

 손가락은 끊임없이 화면을 넘기며, 여러 자료를 훑어 내려갔다. 헬싱키 중앙역 앞의 핀란드 국립 미술관에 남아있는 탄흔 등등.


 한국의 전쟁과 분단은 아직 끝나지 않은 현실이지만, 핀란드는 오래전에 지나간 역사였다. 그러나, 이 두 전쟁의 흔적들은 모두 인간의 삶에 깊은 상처를 남긴, 이념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핀란드에서 경험했던 안정적인 ‘정상성’과는 전혀 다른 이 한국의 복잡한 역사적 현실에 몰입한 채, 박물관의 공간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더 많은 자료를 찾아냈다. 그럴 때마다 내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정열적이었다. 전시된 자료를 꼼꼼히 읽고, 설명문을 사진으로 몰래 찍으며, 구글을 통해 관련된 문헌을 뒤지기까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학자였다고 해야 할까….

 기념관을 모두 둘러보고 나오자,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밤이었다. 서늘한 바람이 피부를 스치며, 종일 나를 휘감았던 공기를 서서히 덜어내는 듯했다. 밤공기가 전하는 상쾌함도 잠시, 기념관 안에서 본 수많은 기록과 희생이 이따금 머릿속을 떠돌았다. ‘신념이라는 것이 그렇게나 강렬할 수 있구나.’

 이념은 때로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현실을 덮어버릴 만큼 강력하다.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 하는 뇌의 엇나감과 고집스러움도 흥미로웠다. ‘뇌는 왜 이렇게 오류가 많을까? 이념과 신념이란, 결국 뇌가 만들어낸 하나의 착각일지도 모르겠네. 이 모든 것이, 어쩌면 자아라는 허상에 불과한 건 아닐까.’


어둠 속에서 공기의 냉기가 점점 깊어지자, 사고는 점점 더 무겁고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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