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하다(4)
호텔로 돌아가는 길, 이곳의 밤은 여전히 분주하다. 차들의 불빛은 뚜렷하게 흘러가고, 도로 위를 빠르게 스치는 소리는 소용돌이처럼 나의 귀에 울린다.
호텔 문을 열고 들어설 때, 하루가 끝났다는 안도감보다 자신을 다시 호텔로 이끈 그 발걸음들조차 또 하나의 거대한 착각으로 다가왔다. 그 뒤로 나는 호텔에서만 꼬박 사흘을 보냈고, 그 시간은 따뜻하고 흥미롭게 흘렀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창밖의 전망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했다. 서울의 거리는 이른 시간도 분주함이 멈추지 않았고, 나는 도시의 리듬을 천천히 익혀가는 기분이 들었다. 침대에 앉아 커튼을 열고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얼굴을 내밀며 잠시 모든 걱정을 잊어보기도 한다. 점심 무렵이면, 부모님과 영상통화를 했다. 핀란드는 아침이 막 밝아오는 시간, 화면 너머로 비치는 핀란드의 햇살은 무색할 만큼 하얗다. 그 익숙한 모습을 볼 때면, 잠시 그리움에 잠겼다.
“잘 지내고 있니?” 느릿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졸음이 묻어나는 엄마의 물음이 먼저 들려왔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듯한 모습이었다. 아빠도 옆에서 차 한 잔을 들고 어렴풋이 웃으며 인사했다.
“응, 잘 지내. 여기 한국은 생각보다 재밌어. 학교가 시작되면 더 바빠지겠지. 어제는 근처 카페도 가봤어. 핀란드랑 비슷한 느낌인데, 괜찮더라.”
“그래도 아직은 낯설지?” 졸음에 겨우 눈을 뜬 아빠가 한 모금 마시며 말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응, 조금. 그래도 점점 익숙해지고 있어. 사람들도 친절하고…. 뭐, 전혀 다른 세상 같기도 하고.”
엄마는 여전히 꿈속에 있는 것처럼 조용히 미소 지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적응해. 새로운 곳에서는 시간이 좀 걸릴 거야.” 부모님의 졸린 목소리와 차분한 응원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따뜻함을 주었다. 마치 그들이 곁에 있는 것처럼, 나는 한국 생활 이야기를 조금 더 풀어놓았다. “그리고 아침에 밖을 나가면 여긴 생각보다 춥지 않아. 햇살이 좋거든.” 부모님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화면 너머에서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하루 중 가장 즐거웠던 시간은 넷플릭스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며, 이곳의 언어와 문화를 접할 때였다.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이 익숙했던 일상과 너무도 다른 이야기를 펼쳐가자, 해맑게 웃음을 터뜨리며, "이곳에서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걸까?"라고 물었다.
하루의 끝에는 한국 음식 배달 앱을 통해 새로운 메뉴를 주문해보는 꽤 재밌었다. 초밥, 불고기, 김치찌개 등 다양한 음식들이 나의 입맛을 자극했다.
새벽이 깊어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조용히 24시간 열려있는 무인편의점을 향했다. 그곳은 마치 밤의 도시에서만 깨어있는 별처럼, 밝은 조명이 유리창을 통해 새어 나와 있었다. 걸음을 옮기며 속삭이듯 '무인이라니…'라고 읊조렸다. 사람 한 명 없이도 완벽하게 운영되는 이 시스템은 조금은 낯설고도 신기했다. 자일리톨 껌을 눈여겨보았다. 고국에서 늘 보던 제품도 어쩐지 흥미로웠다. 껌을 하나 집어 들고, 다른 진열대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진열대 속에는 다양한 음료와 간식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새벽 공기에 어울리는 따뜻한 음료를 고르며 혼자서도 기분 좋게 중얼거렸다.
'정말로 이 시간에도 이런 곳이 열려있다니, 경이로워.' 편의점 한편에 준비된 전자레인지에 간단한 음식들을 데우며 혼자만의 공간에 있듯 편안한 기분에 젖었다. 음료와 따뜻한 간식이 교차하며 입안에서 느껴지는 색다른 조화는 작은 행복을 선물했고, 새벽 공기를 마시며, 핀란드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한국의 편리함과 신비로움에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다.
알람이 요란하게 "삐-삐-삐-" 울렸다. 벽을 타고 퍼져나가는 소리는 방 전체를 가득 채우며, 아침의 정적을 깨뜨렸다. 눈을 비비며, 작은 눈곱들을 떼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육체는 다소 느릿하게 움직였지만, 정신은 번뜩 깨어났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쓸어 넘기며,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오늘이 그날이구나…." 가슴 한쪽에서 설렘이 느껴졌다. 창문 너머로 살짝 보이는 하늘은 잿빛으로 차분히 물들어 있었다. '오늘만은 절대 늦지 말아야지.' 머릿속에는 이제 곧 있을 대학 생활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세수하러 욕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약간 서두르듯 빠르게 이어졌다. 물이 "철컥-철컥" 쏟아져 내렸고, 얼굴에 닿는 차가운 물은 잠을 휘날려버리게 충분했다.
가야 할 길은 부담스럽지 않았다. 한 번 가보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길을 익혀두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드는지 새삼 깨달았다. 버스를 타고 캠퍼스로 향하는 동안, 창밖을 바라보며 머릿속에서 길을 다시 한번 그려봤다. 그리고 어제보다 훨씬 더 자신감 있는 발걸음으로 정문을 들어섰다. 오리엔테이션이 열리는 대강당까지는 쉽게 찾을 수 있었고, 남들보다 강당 입구에 일찍 도착했다. 문은 묵직한 철제 프레임 안에 단단한 나무가 접합된 형태였다. 광택이 나는 것 같으면서도, 오래된 흔적이 군데군데 스며들어 있었다. 손잡이를 잡아당기려니 금속 특유의 감촉이 손끝에 스며들었다. 힘껏 밀어야 했다. 문이 열릴 때는 깊고 무거운 "쿵-" 소리가 공명처럼 울려 퍼지며, 강당의 내부가 천천히 드러났다. 앞으로 걸으니 반작용으로 인해 그 무게감이 등 뒤로 닿았고, 이 문이 대강당의 웅장함을 예고라도 하듯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에 앉을까 고민하며, 두리번거렸다. 위를 올려다보면, 높이 솟은 천장이 하늘 높은 줄 몰랐고, 좌우로 머리를 흔들면, 줄지어 늘어선 의자들이 공연장을 연상케 했다. 그리고 중앙에 자리 잡은 커다란 무대에는 무언가를 준비하는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커다란 현수막이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고, 그 위에는 굵은 글씨로 "미래대학교, 토목공학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직사각형의 플래카드는 반짝이는 흰색 천에 인쇄되어, 대강당의 전경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몇몇 직원들은 조명을 조정하고 있었다. 하나둘씩 설치된 조명들은 강렬한 빛을 발사할 준비를 마친 듯, 각도를 맞추는 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나머지 몇 명은 커다란 스피커 앞에서 음향을 테스트하는지, 짧게 "윙-" 하는 저음의 울림이 대강당 전체에 퍼졌다. 오리엔테이션이 점점 생명을 얻고 있는 것처럼, 준비하는 모든 손길에 긴장감과 설렘이 묻어나왔다.
나는 맨 앞자리로 걸어가 빨간 의자에 조심스레 앉았다. 부드럽고 약간은 미끄러운 가죽의 촉감이 엉덩이로부터 전해졌다. 의자에 몸을 기댔을 때는 쿠션이 천천히 나를 감싸 안으며 약간의 반발력을 주었고, 차가운 가죽이 잠깐 등을 스치다 이내 체온으로 데워갔다. 이런 미묘한 흥분, 그러나 그것을 내보이지 않으려는 차분한 태도가 대강당의 기운과 맞아떨어졌다고 해야 할까.
몇 분이 지나자, 다른 학생들도 하나둘씩 줄지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거운 문이 열릴 때마다 바깥의 빛이 학생들 뒤로 길게 드리우며, 대강당에 섬세한 파동을 일으키고서는 차가운 바닥 위로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