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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환 Oct 02. 2024

제2화 낯선 세계, 낯선 시선

‘인식’하다(5)

 정시가 되면서, 대강당의 조명이 약간 어두워지고 무대 위로 누군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구두가 바닥을 스치는 소리는 메아리쳤고, 그 소리가 점점 선명해질 때마다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흰 와이셔츠 차림, 와이셔츠 안으로는 희미하게 비치는 메리야스가 보였다. 그의 차림새는 평범하면서도 어딘가 조금 촌스러운 듯했지만, 특유의 젠틀함도 섞여 나왔다. ‘한국인은 정장을 저렇게 입는구나.’ 그리고 나의 시선은 넥타이로도 향했다. ‘요즘 주식에 관심이 커져서 그런가. 빨강도 아니고 초록도 아니네~’ 

 그는 무대 중앙에 서서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 "아, 아—" 짧은 테스트 후, 소매를 걷어 올리자, 하얀 배경 위로 거대한 PPT 슬라이드가 화면에 떠오르며, 조명은 그의 형체만을 감싸 안았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숨을 한두 번 고르더니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연수입니다. 1학년을 담당하게 될 책임 교수이자, 앞으로 여러분이 공부하게 될 토목공학과의 일원입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작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교수는 손을 들어 간단히 인사를 받으며, 이어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은 중요한 첫걸음을 뗀 것과 같습니다. 앞으로 많은 배움을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토목공학의 역사를 간단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명확했고, 학생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토목공학은 전자공학, 컴퓨터공학과는 다르게, 미 육군 공병의 정신이 많이 깃들어 있죠. 우리는 시민을 위한 기반시설을 만들고, 자연과 공존하는 인공구조물을 설계합니다." 발표가 이어질 때마다 PPT 화면에는 거대한 댐과 다리, 도로가 차례로 나타났다.


 나는 교수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좀 지루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학생들의 얼굴에도 피로가 살짝 묻어났다. 그때 교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런 이야기는 재미없죠? 여러분들은 취미가 뭐예요? 저는 개인적으로 심리학에 관심이 많습니다." 집중하지 않던 학생들 사이에 작게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지막으로 1학년들의 일정을 언급했다. "미리 학사에서 여러분의 수업을 조정했으니, 수강신청을 따로 하지 않아도 됩니다. 입학과 동시에 만나는 첫해는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시기를 최대한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질문이 있거나 상담이 필요하면 언제든 저를 찾아오세요. 문은 항상 열려있습니다. 1년 동안 잘해봅시다." 교수는 눈빛을 주며 말했다. "아. 그리고 외국인 신입생도 있으니 여러분의 배려를 부탁합니다." 그 말은 나를 겨냥한 듯, 교수님의 말투에서 기묘한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나를 신경 써주는 것 같아서 묘하게 기분이 좋군.’

 그 순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금발 머리와 파란 눈을 가진 이방인이라는 외형적 특성이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시선들 속에서 나는 점점 더 투명해져 가는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 옆을 둘러보니, 내 양 옆자리가 텅 비어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누구도 이 낯선 존재 곁에 앉고 싶지 않은 것처럼.

 그 순간, 한 남자가 조용히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가 앉으면서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가 느리게 감돌았다. 그 향기는 이른 아침 산책 중 만나는 숲 속의 차분한 나무 향과도 같았고, 그 속에 담긴 은밀한 따스함도 공존했다. 혼란은 순식간에 잦아들었고, 가볍고 상쾌한 공기가 다시금 내 주위에 맴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남자와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 '인식'이라는 것이 단순히 눈에 비치는 물체나 사람을 관찰하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표면에 그친 채 흘려보냈던 무언가가 서서히 드러나는 듯, 그제야 '본다'라는 것이 눈앞의 형상을 넘어선 것임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쉽게 말하자면, 그 존재의 본질을 알아가는 과정임을 전혀 알지 못했다. 


 드디어 개강일, 괜히 캠퍼스를 한 바퀴 돌고 강의실에 들어섰다. 강의는 "일반물리학", 나에게 익숙해진 낯선 공간.

 오리엔테이션의 그 남자가 조용히 내 옆자리에 다시 앉았다. 특별히 눈에 띄는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마음은 그에게 서서히 끌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의 존재감은 공기 중에 숨어, 보이지 않는 중력처럼 부드럽게 나를 끌어당겼다. 그가 조금씩 팔을 움직일 때마다 뇌 속의 뉴런 하나하나가 재구성되는 것 같았다. 무언가 비현실적인 공간 속에서 더욱 생생하게 다가오는 이 느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붙잡아보려 했지만, 이미 내 주변에서 묘한 설렘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편, 물리학 교수님은 힘의 3가지 기본 상호작용을 설명하며, 칠판에 적었다. "중력, 전자기력, 그리고 핵력. 이 세 가지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법칙을 지배하는 기본 힘입니다." 

 그리고 중력에 대한 설명이 시작되자, 교수는 손을 들어 공기 중에 무언가를 가볍게 쥐는 듯한 동작을 했다. "중력은 모든 물질을 끌어당깁니다. 우리가 발을 디딘 이 땅도, 우주의 거대한 별들도, 모두 중력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어지는 전자기력과 핵력에 대한 설명도 공기를 가리키며 입자들의 움직임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전자기력은 일상 속에서도 우리를 감싸고 있으며, 핵력은 원자 속에서 보이지 않지만, 끊임없이 우리 주변에서 작동하고 있는 힘이었다.

 갑자기, 교수님은 가볍게 손을 목에 대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목이 좀 아프네요. 잠시 쉬도록 합시다." 

 그 순간, 그 남자는 고개를 돌려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안녕, 나는 곽재동이야. 혹시 교환학생이야? 아니면 유학 온 거야?" 태연한 목소리였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그 질문은 참으로 설렜다.


 시계의 긴 바늘은 무심하게 제자리를 돌며 두 번의 완벽한 원을 그렸다. 그제야 교수님은 한 손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강의실은 이미 어느 정도 소란스러워지고 있었지만, 그의 침착한 목소리는 여전히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자,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그 말이 끝난 뒤, 장난기 섞인 눈이 반짝였다. “아직 1학년이니까요, 너무 공부에만 몰두하지 마세요. 연애도 좀 하시고… 하고 싶은 건 다 해보세요.”

 강의실은 가벼운 웃음과 흥분이 뒤섞여 웅성거렸다. 교수님은 웃으며 학생들을 바라봤다. “인생은 짧고, 대학 생활은 더 짧으니까요.” 마지막 말을 덧붙이며, 강의실에서 홀연히 나갔다.

 책을 가방에 넣던 중, 옆자리 그 남자는 또다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월요일은 물리학 강의밖에 없거든. 다른 일 없으면, 나랑 차 한잔할래?"


 우리는 근처 카페로 향했고, 나는 커피잔을 손에 쥔 채로 재동의 여러 질문에 답했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이상하게도 신선함보다는 이질감이 느껴져. 내가 어딘가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느낌도 들거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설명했다. "그게 바로 인식의 오류야.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어떻게든 자신을 설명하려고 해. 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눈으로 보고, 머리로 이해한다고 느끼는 것들이 실제로는 아주 얕은 곳에 머물러 있기도 하거든. 너는 지금 한국에서 많은 것을 보고 있지만, 정말로 그 본질을 인식하고 있는 걸까?" 

 그의 설명을 곱씹으며, ‘한국에서 느낀 감정이 문화적 차이가 아니라, 더 깊은 차원에서 일어나는 문제이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품었다.

 그는 한 손으로 잔을 돌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은 결국, 우리 뇌가 만들어낸 하나의 페르소나, 즉 가면 같은 거야. 유아에게 페트병은 문을 따는 도구일 수 있지만, 어른에게는 그저 물을 담는 용기일 뿐이잖아. 우리가 그런 식으로 세상을 인식해."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핀란드에선 너무 자연스러운 것들이 여기선 다르게 느껴져. 하지만 난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좋아."

 그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처럼 열린 사람이라면, 그게 가능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에게는 그게 쉽지 않아." 그는 한 손을 들어 허공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한국은 외세의 침략을 많이 겪었어.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인식을 받는 게 두렵나 봐. 동질감을 유지하려는 성향이 강해. 만약 네가 남들과 조금 다르다고 평가받으면, 그걸 인정하기 힘들어해."

 날카로운 분석은 계속됐다. "한국의 주입식 교육도 마찬가지야. 모두가 같은 것을 보고, 같은 방식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배워왔거든. 인식을 바꾸기란 쉽지 않지. 여기서 살아가려면, 적어도 네가 인식했던 것들에 대해 다수의 동의를 얻어야 해."

 그 말에 한참을 고민했다. 내가 보아온 세상, 내가 믿어왔던 진실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자신의 인식을 어느 정도는 바꾸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의 대화가 재밌어서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인식과 인지의 차이는 뭘까? 둘 다 비슷하게 느껴지는데, 정확히 뭐가 다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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