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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환 Oct 02. 2024

제3화 연애와 결혼

‘계산’하다

 그는 그 질문을 할 줄 알았다는 듯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좋은 질문이야. 간단하게 말하면, 인지는 세상을 바라보는 ‘수단’이라면, 인식은 그 세상에 대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어.” 그는 한 손을 천천히 들어 자신의 앞을 가리키고, 다른 손은 가슴께로 가져가며 그 경계 사이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형상화하듯 움직였다.

 “우리가 뭔가를 ‘인지’하는 건, 단순히 그 존재를 알아채는 거야. 예를 들어, 네가 옆에 있는 나를 보는 건 인지야. 눈, 귀, 그리고 뇌에서 정보를 받아들이는 과정이야. 일종의 생리학적인 반응이랄까? 너의 뇌가 물리적 신호를 처리하는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따라갔다. “하지만 ‘인식’은 그 정보를 너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거야. 나를 보고 ‘그는 친절해 보인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인식이야. 인식은 너의 경험, 기억, 감정, 심지어는 무의식적인 편견까지 모두 포함된 해석 과정이지. 비슷한 단어이지만, 오묘한 차이가 있다고 해야 할까?”

 목이 탔는지, 이번에는 커피가 아닌 물 한 모금을 마시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걸 쉽게 설명하자면, 물리학적으로는 ‘인지’가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정보가 뇌에 도달하는 것이라면, ‘인식’은 그 정보를 뇌가 해석하고 더 높은 차원의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야. 그러니까, 인지는 객관적인 정보 처리라고 보면 되고, 인식은 그 정보가 너의 주관적인 경험과 감정을 거쳐 의미를 형성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지.”

 그의 말을 들으며, 그 차이를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내가 한국 문화를 느끼는 방식도 인지에서 그치지 않고, 내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인식이 바뀔 수 있다는 말인가?”

 그가 나의 눈을 바라보며 설명을 이어갔다. 그 와중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인간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아.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지. 자신을 위협하는 것들을 걸러내고, 필요한 것만 받아들여서 보호하려는 방식이지. 그니까 오류의 덩어리들이야.”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인간의 감정과 욕망은 대부분 이런 인지에서 비롯돼. 뇌는 우리가 세상을 해석하고 대응할 수 있도록 복잡하게 작동해. 만약, 우리가 필요로 하는 감정이나 욕망이 부족하거나 지나치게 넘치면, 인지 과정을 조금만 손대는 것으로도 치유할 수 있어. 예를 들어, 외부적 개입으로 뇌의 인지 기능을 조정하면 감정의 왜곡도 고칠 수 있지.”

 그는 손가락을 들어, 내 얼굴 앞으로 휘저었다. “하지만 말이야, 이 인지를 송두리째 뽑아버리거나, 무리하게 개입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건 마치 균형을 잃는 것과 같아. 생존에 필수적인 인지 작용이 무너지면, 정신이 폭주하거나, 심지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어.”

 나는 그의 설명을 들으며 그에게 더욱 깊이 이끌리는 감정을 느꼈다. 그의 목소리는 공간을 메우며, 나의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해 주는 듯했다. 그리고 매력적인 외모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지닌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단순히 설명하는 게 아니라, 내가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설레는 감정은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감정은 점점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고, 무심코 그에게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네가 설명할 때마다, 자꾸 그 물리학 교수님이 손으로 휘두르면서 말하던 게 떠오르더라. 교수님이랑 너, 고등학교 동문이야? 아니면 비밀리에 무슨 손동작 학회라도 다니니?”


 기숙사로 돌아온 뒤, 얼굴이 달아올랐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발로 밀쳐냈다. "그 재밌지도 않은 농담을 왜 했지? 고맙다는 말이나 제대로 할 걸." 아직도 머릿속에는 그 남자의 웃음소리와 다정한 눈빛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또 그 아이 볼 수 있을까?’ 괜스레 설렘이 밀려와 이불을 움켜쥐고 얼굴을 파묻는다. ‘내가 왜 그랬을까?’ 하며, 허공을 바라보기도 하다가, 자신을 달래려 쓴웃음을 지어보기도 한다. 

 "이것도 인식의 오류일까?" 이 모든 게 뇌의 장난일 뿐인가 싶으면서도, 흥얼거리는 콧노래와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개강과 함께 기숙사를 배정받았다. 호텔에서 며칠간 머물렀던 그 방 번호와 일치하는 호수였다. 이건 그저 우연일까? 한동안 그 의미를 곱씹다가, 어차피 더 깊이 생각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곳은 앞으로 1년간 머물게 될 공간이었다. 다행히도 전액 장학금으로 입학했고, 덕분에 기숙사비도 무료였다. 

 룸메이트 이름은 한보라. 배정표를 받았을 때,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세 글자는 A4용지 한 귀퉁이에 내 이름 옆에 정자로 적혀 있었다. 처음에는 ‘외국인끼리 룸메이트가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다른 나라에서 온 학생과 함께 살면 서로의 문화적 차이를 조금 더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한국인과 같은 방을 쓰게 되다니… 보라라는 그 아이가 혹시 불편하지는 않을까? 한국인이 낯선 외국인과 생활하는 게 얼마나 익숙할까? 괜한 걱정이 마음을 앞섰다. ‘혼자 방을 쓰는 게 익숙했던 나에게도 쉽지 않을 거야.’ 

 아직 그녀는 기숙사에 오지 않았다. 개강 후, 일주일 안에만 입실하면 된다는 규칙이 있으니, 언제 올진 알 수 없다. 어쩌면 내일, 아니면 마지막 날에야 짐을 풀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배꼽시계가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벌써 저녁 6시 반이라니.’ 


 식당으로 향하려고 복도로 나서려는 순간, 문 너머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작은 웅성거림이 점차 귓가에 더 가까워졌다. 문이 살짝 열리자, 까만 머리에 동양 특유의 눈매, 그리고 아담한 체구를 가진 소녀가 부모님과 함께 짐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안녕! 네가 이레나구나? 내가 너랑 룸메이트래!”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웃음은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뒤따라오던 그녀의 부모님도 나를 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아, 우리 보라가 외국인 룸메이트랑 같이 지내게 된다니… 정말 예쁘게 생겼네! 잘 부탁해요." 

 나는 그들의 친근한 인사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곧 그녀의 이름이 ‘한보라’라는 것을 떠올렸다.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어눌한 한국어 발음으로 입을 뗐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레나입니다. 안녕 보라야."

 보라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겼다. "저녁은 먹었어?"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지금 가려던 참이었어." 

 "그럼 같이 가자! 엄마, 아빠 짐은 제가 알아서 풀게요. 여기까지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부모님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부모님은 보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잘 지내고 자주 연락해."라고 당부했고, 그녀는 내 손을 가볍게 이끌어 기숙사 문밖으로 나서서 부모님을 함께 배웅했다. 보라의 부모님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차에 올라타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나도 엄마, 아빠가 떠올랐다. 공항에서 포옹을 나누고 헤어졌던 날이 아련하게 스쳐 지나간다. 매일 핸드폰 화면 속에서 봤던 부모님은 항상 밝게 웃으셨지만, 오늘따라 멀게만 느껴졌다. 눈가가 서서히 뜨거워질 찰나에, 보라는 나의 손을 강하게 당겼다. "늦겠다. 빨리 안 걸으면, 우리 밥 없어!"


 보라와 나란히 걷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다정함과 활발함에 조금씩 안도감을 다시 느꼈고, 우리는 그렇게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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