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하다(2)
우리가 함께 생활하게 될 기숙사는 그 크기와 구조만으로도 체계와 계획을 알 수 있다. 나중에 토목공학 개론 수업을 들으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BTL 방식으로 지어진 신식 건물이다. 'Build Transfer Lease'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민간 사업자가 기숙사를 건설한 후 학교에 넘기고, 학교는 이를 다시 임대받아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구조였다.
20층에 달하는 높이로, 외형은 현대적인 서울의 아파트처럼 깔끔하고 곡선을 가미한 디자인이었다. 일반적인 아파트와 다른 점을 꼽자면, 긴 복도를 따라 방들이 줄지어 있다는 것이다. 복도는 정돈되고 계획된 느낌을 주었고, 그 길이가 꽤 길어서 방에서 식당이나 로비까지 가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리기도 했다. 근처에는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농구코트도 있었다. 여기서 매 저녁이면 남학생들이 모여 에너지를 한껏 발산했다.
방 내부도 역시나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있다. 각 방은 대략 10평 남짓의 크기로, 두 명이 생활하기에 적당한 공간이었다. 기본적으로 책상과 침대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고, 자그마한 옷장과 수납공간이 있었으며, 창문 밖으로는 탁 트인 풍경이 보였다. 생활 방식으로는 저녁에 기숙사 인원 점호가 있다. 그 시간에 학생들이 모두 방 안에 있는지를 확인하곤 했는데, 10시 반까지 기숙사 안으로 들어와야 했다.
지금 보라와 함께 걸어가고 있는 그 식당은 기숙사에서 5~10분 정도 걸어가면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있어서 매우 편리했다. 중앙도서관까지 가지 않아도 가까운 거리에 식당이 있다는 건, 공부에 지친 학생들에게 큰 위안이었다.
첫눈에 봐도 꽤 넓고, 군더더기 없는 공간이다. 여러 줄로 나열된 긴 테이블과 의자, 그 위로는 고요하게 내려앉은 조명이 무리 지어 있다. 벽면은 약간의 색채만을 더해 평범함 속에서도 나름의 따뜻함을 더해준다. 큰 창문에서는 외부의 햇살이 들어오기 때문에, 학생들은 이따금 바깥을 내다보며 수저를 들었다.
메뉴는 그날그날 바뀌는 것 같았지만, 늘 쌀밥이 기본이었다. 국과 함께 나오는 다양한 반찬들도 있었고, 때로는 볶음요리나 찜 요리가 나왔으나, 핀란드에서 먹던 빵과 고기 위주의 식사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특히, 기숙사 식당은 한 업체가 운영하고 있어서 메뉴의 폭이 좁았다. 중앙도서관 근처의 식당에서는 A, B, C, D 코스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던 반면, 여기서는 그날의 메뉴를 그대로 따라야 하는 점이 아쉬웠다. 한국인들에게는 익숙한 식단이겠지만, 나에게는 매일 쌀밥이 나오는 것이 조금은 고역이었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반복되는 식단에 물리기도 했다. 가끔은 보라에게 "오늘은 밀가루가 필요해!"라고 장난스레 말하면, 우리는 웃으며 빵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따뜻한 빵을 한입 베어 물 때마다 고향을 떠올릴 수 있었다.
개강하고 한 달 지나서였나…. 밥과 국은 어떻게든 숟가락으로 떠먹을 수 있었지만, 반찬들이 늘 문제였다. 미역과 콩나물, 특히 콩자반은 내 뜻대로 따라주지 않았고, 젓가락 끝에서 자꾸 미끄러져 나갔다. 보라는 나를 보며 한참 웃더니, "너 젓가락이랑 전쟁하는 거 같아!"라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던졌다.
저녁에 방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짓궂은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이레나, 줄 거 있어." 그녀는 무언가를 내밀었고, 그 안에는 은색 포크가 반짝이고 있었다. "짠! 서프라이즈!" 나는 놀라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두 나라의 문화 차이가 이렇게 유쾌할 수 있구나 싶었다.
한동안 포크는 유용했지만,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고 싶었다. 젓가락을 제대로 사용해보기 위해 인터넷을 뒤져보니 ‘외국인 전용 젓가락’이라는 이름이 붙은 보조 젓가락을 판매하는 중이었다. 그건 젓가락 끝에 고무 밴드가 달려, 쉽게 음식을 집을 수 있게 도와준다고 한다. 택배가 도착하고 의기양양하게 보조 젓가락을 꺼냈을 때, 보라는 다시 한번 배꼽을 잡고 웃었다. "이레나, 한다면 하는구나? 정말 노력파야! 나중에 젓가락 대결 한 번 하자!"
비로소 1년이 지나고, 젓가락은 두려운 도구가 아닌, 나의 또 다른 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한편, 영화나 책에서 보던 낭만뿐이라는 대학 생활의 막연한 기대는 엇나가는 줄 알았다. 일반물리학에 이어 마주한 수업은 ‘대학 수학.’ 칠판에 써진 공식과 교수님이 휘두르는 분필은 제법 딱딱했지만, 신입생으로서 첫 학기는 종이 위에 새롭게 그려나가는 캔버스였다고 해야 할까.
월요일에는 한 과목만, 나머지 날들은 하루에 두세 과목이 전부였으니, 18학점 정도의 시간표는 그리 빡빡하지 않았다. 토목공학과 관련된 주요 과목은 일반물리학과 대학 수학 정도였지만, 그 외에는 교양 영어, 창업일반론, 체육, 패션과 심리학 같은 과목들이 섞여 있어서 크게 부담되지 않았다. 책보다도 친구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었던 시간.
‘아. 보라가 기숙사로 들어온 후, 그녀는 자연스럽게 내 곁을 지켰다. 우리 관계는 빠르게 가까워졌지만, 왠지 모르게 재동과의 거리는 차츰 멀어졌다.’ 수업시간이나 복도에서 가끔 눈이 마주치면, 서로의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는 종종 나의 시선 끝에 머물렀고, 머릿속엔 작은 고민이 스쳐 갔다.
시간이 흘러, 한 달쯤 되었을 때, 재동은 갑자기 내게 다가왔다. "내 친구들을 소개해줄게. 너 기숙사 룸메이트인 보라랑 같이 만나자." 그 속엔 우리 사이 거리를 좁히려는 의지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속도를 높이며 앞장섰다. 눈빛엔 조급함이 비쳤고, 발걸음은 점점 더 빠르게 어딘가로 향했다. 보라와 팔짱을 끼고 걷는지라 그의 발을 맞추기 여간 힘들어, 숨이 탁 막혀올 찰나에 그가 뒤돌아보며 씩 웃었다. “친구들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교양수업을 듣던 건물들과는 달리, 이곳은 동시대와 어긋난 듯했다. 햇살은 건물에 쉽게 닿지 않았고, 외벽은 언제나 짙은 적색의 어둠에 잠겨 있었다. 동양의 풍수지리학으로 본다면, 이 자리는 분명 좋은 기운을 품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안에 흐르는 냉기는 공대 특유의 음산함을 떠올리게 했으니 말이다. 아직 전공을 듣지 않아 앞으로도 드나들 일은 거의 없었지만. 재동의 발걸음은 그 건물의 1층 한가운데로 향했다.
2학년부터 만나게 될 응용역학, 유체역학 등등 까다로운 전공과목들 사이에 커피추출기가 한쪽 구석에서 은은하게 커피 향을 퍼트렸고, 그 옆에는 쿠키나 음료 판매기들이 나란히 서서 선배들의 목을 축여주었다. 곳곳에 걸린 포스터와 공모전 안내문들이 덕지덕지 벽지를 덮었고. 중간중간에 배치된 푹신한 소파와 원형 테이블은 서로 간의 경계를 부드럽게 허물어, 학생들이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누도록 이끌었다.
우리는 그렇게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각종 미적분 공식으로 뒤엉켰던 수업이 막 끝난 직후였지만, 그 누구도 숫자와 기호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제일 먼저 눈에 띈 친구는 무하였다. 짙은 갈색 머리가 어깨에 살짝 닿을 정도로 내려앉은 그는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오! 다들 모였네?” 보라와 나를 빙 둘러보며 “누가 소개해 줄 사람 있어? 아님. 그냥 각자 알아서 할래?”
무하는 항상 그랬다.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재주가 있었고, 그의 말 한마디에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한편, 판승은 조용히 그 뒤에 서 있었다. 그의 단정한 셔츠와 뿔테 안경 너머로 깊은 생각이 묻어나는 눈빛은 늘 진지했다. 말이 많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 무하의 유쾌함과 묘하게 균형을 이루었다. 그가 처음으로 나에게 입을 뗐을 때는, “토목공학에 흥미가 많다면서? 너는 어떤 과목이 관심이 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평소에는 사람들이 잘 묻지 않는, 본질적이면서도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의 말 한마디는 내가 앞으로 이들과 나눌 수 있는 대화의 깊이를 가늠케 했다.
엘레나는 밝고 생동감이 넘쳤다. 그녀는 미국에서 온 친구로, 입가에 항상 미소를 띤 채, “오, 여기가 휴게실 맞지?” 하며 들어왔다. 나와 같은 금발 머리가 빛에 반사되어 더욱 빛나 보였다. 엘레나는 첫인사부터, 내 손을 잡고 "너 정말 한국에 잘 왔어!" 하며 활짝 웃었다.
각자의 성격이 이때부터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무하는 끊임없이 농담을 던졌고, 판승은 조용히 경청하며, 때때로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댔다. 엘레나는 나와 자주 눈을 마주치며 내 반응을 살피거나 장난을 쳤고, 재동은 대화를 듣다가도 어느새 생각에 잠긴 듯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때로 보라와도 가깝게 지냈는데, 그 둘은 굳이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통하는 공감대가 있었다. 당시에, 그 관계가 무척 궁금했지만, 따로 묻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