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하다(3)
캠퍼스는 광활하고, 시간은 늘 흐르며, 인간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인연을 만난다. 우리는 곧 다 같이 웃고 떠들며, 때로는 지루한 수업을 참아내기도 한다. 교수님들의 목소리가 쏟아지는 강의실을 벗어나 복도에 설 때면, 각자의 대학 생활이 함께 그려지고 있었다. 그 대학 생활을 함께하는 것은 사람뿐만이 아니다. 학교 앞 거리로 통하는 문은 세 곳이 있었다.
한국인 학생들은 세 갈래 길을 정문, 중문, 그리고 후문이라고 불렀다. 이름은 간단하지만, 각 문은 나름의 개성을 지녔다. 정문은 그야말로 학교의 얼굴. 넓고 화려한 대로를 자랑하며, 마치 '이곳이 바로 우리의 캠퍼스다'라고 외치는 곳이었다.
후문은 조금 달랐다. 조용하고 차분하며, 약간은 '공부하는 사람들의 피난처' 같은 느낌을 주었다. 아무래도 원룸이 많았고, 자취하는 학생들의 주거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중문은 학생들의 작은 왕국과 같았다. 상업지역으로 카페, 서점, 옷 가게, 그리고 각종 먹거리가 즐비했다. 특히 '인스타 감성'이라는 말이 여기서 시작된 듯했다. 다양한 카페에서 찍은 사진들이 피드를 장식하며, 학생들 사이에서 중문은 대학 생활의 상징이 되었다. 우리도 그 대열에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그곳에 발을 내딛자, 무심결에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마돈나!’라며 감탄하고, 프랑스에서는 ‘오 라 라!’라고 표현하지만, 나는 그 특유의 핀란드 감탄사인 'Oho!'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옆에 있던 보라와 재동은 내 추임새를 듣고 웃음을 터트렸고, 그 뒤로 내 감탄사는 대학 생활 내내 장난스러운 유행어가 되었다.
엘레나는 미국에서 온 만큼, 반응도 다채로웠다. “Oh my God, this is so freaking cool!”이라며 빠르게 쏟아내는 말들 속에서 우리는 종종 그녀의 속도감에 놀라곤 했다. 때로는 “Dude, this is sick!” 같은 슬랭도 섞였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서로의 반응을 보며 깔깔 웃었다. 코인 노래방에서 목청껏 노래를 부르며 서로의 숨겨진 노래 실력을 평가하기도 했고, 내가 좋아하는 BTS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피시방에서는 배틀그라운드에 몰입한 나머지 현실을 잊기도 했다. "야, 이레나, 너도 이 게임 한 번 해볼래?" 재동이 나를 향해 무거운 게임용 마우스를 건넸을 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화면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하는 건데?"
재동은 친절하게 게임을 설명했지만, 내 손은 자꾸 키보드에서 헤맸다. 옆에 있던 무하는 갑자기 내 옆으로 다가와 모니터를 휙휙 넘기더니, "이레나, 핀란드에서는 게임 안 해?"라고 물었다. 그리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인터넷에서 무언가를 찾았는지, 이내 눈을 번쩍였다. "야, 너희 나라, 게임 강국이네! 3D 게임 개발 엄청 잘하잖아!" 핀란드는 실제로 "앵그리 버드(Angry Birds)"를 만든 로비오(Rovio)부터, 클래시 오브 클랜(Clash of Clans)으로 유명한 슈퍼셀(Supercell)까지 세계적인 게임사를 여러 보유한 나라다.
게임을 마친 후, 근처의 익숙한 맥줏집으로 향했다. 아늑한 노란 조명이 은은하게 비추는 작은 선술집, 나의 머리 색과도 제법 잘 어울렸다. 테이블 위엔 바삭한 치킨과 감자튀김이 정갈하게 그릇에 담겼다. 겉은 바삭, 속은 촉촉하게 튀겨져 나왔고, 고소한 김치전의 냄새도 주방에서 풍겨온다. 간간이 흘러나오는 팝송으로 달궈진 분위기, 첫 잔을 기울이며 하루의 끝을 정리하는 순간이었다. 유리잔을 들어 올리니, 아빠가 기울이던 맥주잔이 떠올랐다. 시원한 라거를 홀짝 마실 때마다, 그의 잔을 몰래 마시려 입을 대곤 했는데, 그 맥주 맛은 늘 강렬하고 깊었다. 하지만, 이곳 맥주는 도수가 낮고, 특유의 맹맹한 맛이 입안에 남는다. 한 모금 삼킬 때마다 '2% 부족'
술잔이 몇 번 오고 가고, 알딸딸한 기분이 점차 퍼져갈 때, 판승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확률과 통계에서 배운 건 결국, 미래를 예측한다는 거였지. 우리가 다들 어떤 선택을 하든, 그건 무의식적으로라도 확률을 계산하는 거야. 가능성이라는 미지의 수치를 가지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말이야. 하지만….” 술잔을 천천히 기울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게 진짜 가능한 걸까?”
무하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받았다. “말은 그렇지. 예측할 수 없는 감정이나 충동까지도 계산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사랑도 확률이 있어?”
나는 그들의 대화를 조용히 들으며, 문득 재동과 나의 관계를 떠올렸다. ‘사랑도 확률일까?’ 머릿속에서 숫자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와의 우연한 만남, 그 후의 대화, 그리고 우리의 관계가 이어질 가능성. 내 머릿속에서 그 모든 순간이 공식처럼 흘러갔다.
끝에 다다라 분위기는 점점 느슨해졌고, 엘레나는 지친 우리에게 미국식으로 "Cheers!"라고 외치며, 잔을 들었다. “You know, back in the States, we’d totally do a keg stand right about now,” 술기운에 취해 서로를 부축하며 기숙사로 돌아오는 모습은 그야말로 광대가 아닐 수 없었다. 야심한 밤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팔짱을 끼고 휘청거리면서, 세상이 다 우리 것이 된 듯한 기세로 떠들었다. 엘레나는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 술기운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듯, 발랄하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을 안내했고, 나머지는 축 늘어진 어깨를 부둥켜안고 물고기처럼 졸래졸래 그 뒤를 따랐다.
기숙사에 도착하자, 갑작스레 들이닥친 술기운에 속이 울렁거렸다. 씻으려고 샤워실로 들어가 물을 틀었을 때, 머릿속에는 온통 재동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비누 거품을 몸에 바르면서도 그의 미소가 떠올랐고, 그와의 대화를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덜컥거렸다. ‘오늘 밤 보라에게 이 이야기를 할까? 아니면 조금 더 기다릴까?’ 씻는 동안 내내 재동에 대해 입을 열까 말까를 고민하며, 쑥스러움과 상의하고 싶은 열망이 뒤섞였다. 어쩌면 보라가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수건으로 머리를 툭툭 닦으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꼭 말을 해야겠어.' 거울 속 입 모양은 나를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는 순간, 문득 고개는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눈에 띈 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또 다른 나. 분명 같은 얼굴인데, 눈은 일그러졌고, 입 모양은 헤죽헤죽 웃고 있었다. 피곤해서 그런가, 아니면 술 취해서 그런가. 눈을 비비고 다시 거울을 보았다. 평소처럼 서 있는 내 모습. ‘뭐야.’
욕실을 나오자마자, 보라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침대에 몸을 반쯤 기대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내가 다가오자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했고, 마음이 벅차올라 내 안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전부 밖으로 쏟아냈다. "보라, 나…." 말을 시작하자마자 얼굴이 뜨거워졌다. “재동에 대해서 말하려고….”
보라는 순간 눈을 빛내며 기대어 앉더니, 눈에서 장난기 어린 호기심이 번뜩였다. “말해봐! 너도 남자에게 마음이 생긴 거야?”
나는 속에 쌓아둔 이야기를 이리저리 늘어놓았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눈은 더 반짝였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너, 남자 처음 만나보지?" 미소 너머로 그녀의 확신이 느껴졌다.
"남자는 관심 없으면 말도 안 걸어. 그게 기본이야. 재동이가 널 계속 쳐다보는 거, 그게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 나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보라의 말을 곱씹었다. “진짜? 근데 너희 둘은 왜 이렇게 다정해?”
그녀는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를 의심하는 거야? 재동이가 나한테 붙어있는 건 전부 너에 관한 질문이었어. Stupid!" 나의 팔을 톡 치며 웃더니, 종이와 연필을 가져와서는 일정표를 그리기 시작했다. "잘 들어, 내가 다리를 놔줄게. 이번 주말에 같이 나가자. 자연스럽게 얘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볼게. 거기서 뭔가 느껴지는지 한번 봐봐."
그 덕분에 재동과 단둘이 데이트를 할 수 있었다. 보라는 '우연처럼'이라며 우스꽝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한껏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일러줬다. “절대 먼저 말을 걸지 마. 기다려, 재동이 먼저 다가오게 해. 그리고 눈빛! 눈빛으로 말을 걸어,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