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영환 Oct 02. 2024

제3화 연애와 결혼

‘계산’하다(4)

 데이트는 보라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갔다. 우리는 카페에 앉아, 서로의 손이 닿을 듯 말 듯 한 미묘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커피잔을 들어 올리려던 내 손끝이 테이블 위로 드리운 재동의 그림자에 살짝 스쳤다. 그 작은 접촉에 내 심장은 한순간에 폭발할 것처럼 뛰었고, 순간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 창문에 스치는 미풍, 그리고 그의 어깨너머로 흐릿하게 반짝이는 저녁노을. 모든 것이 보정 필터를 거친 듯, 더 밝고 아름답게 보였다.

 그의 무심한 말 한마디가 나를 긴장하게 했다. "너는 핀란드에서도 이런 분위기를 즐겨?"라는 말에는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이런 데이트는 처음이야."

 보라의 조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계속 웃어, 너무 진지하게 굴지 말고.' 그 말을 상기하며 가볍게 웃었지만, 재동과의 대화는 점점 더 깊어졌다. 그의 눈이 나를 바라볼 때마다 내 심장은 빠르게 뛰었고, 그가 무심코 내 눈을 피할 때마다 보라가 가르쳐준 대로, 눈으로 그를 붙잡으려 애썼다. 우리는 함께 걷다가 손끝이 또 한 번 닿을 뻔했지만,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사랑에 빠질 때 분비되는 도파민과 옥시토신이 온몸을 타고 흐르며 모든 감각이 살아 숨 쉬었다. 그의 목소리, 걸음 소리, 그리고 그날의 공기마저도 전부 새로웠다. 

 그날 밤, 우리는 도심을 벗어나 조금 외곽에 있는 오래된 폐기물 처리장의 철거지로 향했다. 이상한 장소라고 생각했겠지만, 그곳은 우리가 함께 머물며 말을 나누기엔 완벽했다. 기이하게도, 그 공간엔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부서진 벽돌과 녹슨 철골들 사이로 달빛이 은은하게 흘러내렸고, 밤바람은 알 수 없는 언어로 속삭였다. 

 그는 현실적인 사람이라 이런 장소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가질 리 없었다. 그저 "여기 진짜 특이하네"라며 어깨를 으쓱였을 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항상 내가 볼 수 없는 부분을 보고 있는 듯했다.

 우리는 한참을 걸었다. 별다른 대화 없이 걷는 동안 나는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보라는 "절대 먼저 말을 꺼내지 마라"라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엔 다르다고 생각했다. 내가 입술을 움직이기 전, 그가 먼저 나를 향해 섰다.

 "이레나."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심장은 뛰지 않는 듯 무덤덤했다. "네가 핀란드에 가든, 한국에 남든 난 네 옆에 있고 싶어."

 그의 말은 마치 사전에 잘 준비된 수학 공식처럼 정확했다. 재동은 언제나 이렇게 실용적이고 이성적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그가 정말 나를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현실을 직시하며 말하는 그가 내 곁에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고백이었다. 그저 화려한 말보다는 이런 단조로운 진심이 나를 깊이 흔들었다.

 모든 것이 흐릿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가 나를 부드럽게 끌어안았을 때, 나는 그 따뜻함 속에서 우리가 함께 있겠다는 진심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걸 보며, 그 역시 평소와는 다른 무언가를 느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 달빛이 우리를 감싸 안으며 주위의 폐허가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다. 버려진 철골과 부서진 벽들이 이상하게도 따뜻하고 아늑했다. 그날 밤, 처음으로 세상이 선명하게 아름다워 보인다고 느꼈다. "그렇다. 나는 남자친구가 생겼다. 그의 이름은 곽재동."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며칠 뒤 연애를 시작한 날, 친구들은 축하 인사를 건넸다. 보라는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바라봤다. "내가 말했지? 너희 둘은 딱 어울린다고!"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그사이는 꽤 중요한 이벤트가 있었다. 바로 체육대회 시즌. "강철 토목"이라는 응원 호칭은 어쩐지 거슬렸다. 강철이라는 단어는 여자에게는 지나치게 무겁고, 차가우며,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껴졌다. 때때로 이 호칭이 남성 중심의 토목공학과의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과의 성비는 남자 9, 여자 1 정도로 극단적으로 남성이 많았다. 그런데도 남자들은 그렇게나 외모를 신경 쓰며, 꾸미고 나타났다. 

 나는 그들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마, 이들도 나름의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경상계열의 여학생들에게도 체육학과 다음으로 인기가 많았던 토목공학과. 

 그들은 다른 과 여자들과의 미팅이나 소개팅 확률을 높이기 위해, 자신을 더 어필하려는 의도에서 그렇게 꾸미는 것이 아니었을까. 특히, 체육대회에서 그 과시적인 태도가 절정에 달했을 때가 있었다. 그날은 전자공학과와의 축구대회였다. 경기 심판은 체육과 학생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불공정한 판정을 연이어 내렸다. 심판이 레드카드를 다시 꺼내 드는 순간, 우리 선수들은 참아왔던 분노가 끓어올랐고, 마침내 그 감정이 폭발했다. 한 선수가 험상궂은 얼굴로 운동장 끝에 놓인 우리의 골대를 쳐다보더니, 주변의 눈치도 보지 않고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는 곧바로 골대를 양손으로 잡고, 철근을 옮기듯 그 거대한 구조물을 뒤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땀방울이 그의 이마를 타고 흘렀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다른 선수들이 하나둘 그를 도와 골대는 운동장 뒤편으로 5m 이상 끌려갔다. 심판은 멍하니 그 장면을 지켜봤고, 관중들은 웅성거렸다. 결국, 그 경기는 판정패로 끝났지만, 그 장면은 학생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회자 되었다.


 한편, 여자들은 체육대회에서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그저 응원하는 것뿐. "Teräksinen siviilitekniikka" 듣기만 해도 얼마나 무겁고 어울리지 않는 호칭인지! ‘강철’이라는 단어는 핀란드에서 흔히 쓰는 표현도 아니고, 토목공학이라는 학문에 붙일 만큼 매력적인 단어도 아니었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MT를 떠나는 버스는 시끌벅적했다. 경기도 가평까지 물드는 활기는 대학교 1학년 만의 특권이었다. 단풍이 물들어가는 산길을 지나는 동안, 재동은 단연코 그 중심에 있었다. 그는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마이크를 쥐고 연신 농담을 던지고 있었다. 그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뒤편에 앉은 나에게도 들려왔고, 몇몇 사람들은 그의 웃음 바이러스에 전염되었다. 가평에 도착해서도 내 남자친구는 주도면밀했다. 그는 술 게임을 제안했고, 모두를 휘어잡는 자신감은 더욱 매력적이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점점 더 사랑에 빠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다사다난했던 1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한동안 모두가 몰두했던 시험이 끝나자 기숙사는 어느새 조용해졌다. 복도에는 발걸음 소리만이 메아리쳤고, 방 안은 묘하게 비어있었다. 보라는 시험이 끝나자마자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의 푸른 산과 바다가 그녀를 기다린다며 설레는 표정으로 가방을 싸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보라는 늘 그렇듯 활기차게 나갔지만, 고향으로 향하는 날만큼은 그녀도 잠시 고요해졌다. 그리고 그녀가 떠나고 난 기숙사 방은 그만큼 조용해졌다.

 나는 기숙사 창밖을 바라보며 친구들이 하나둘씩 떠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 남은 건 평소보다 더 차분한 서울의 겨울 하늘이었다. 기숙사 친구들은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여행을 떠났다. 시끌벅적하게 떠들던 시간이 어느새 그리워질 줄이야.

 하지만 재동은 달랐다. 그의 고향은 대전이었지만, 그에게는 고향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그게 바로 나였다. 그는 1주일에 두 번씩 서울로 올라왔다. 따로 일정이 없는 주말이나 휴일이 되면 대전에서 KTX를 타고 50분 남짓 달려왔다. 서울역에서 만나던 우리의 짧은 데이트는 너무나 특별한 시간이었고, 기차역에 내리면 묵묵히 웃으며 기다리는 그의 모습은 늘 똑같았다. 

 "이제 슬슬 날 보러 대전에 와야 하는 거 아니야?" 그는 장난스럽게 말을 던지곤 했지만, 나는 서울에서 그와 만나는 시간이 좋았다. 


 그러한 시간에도 현실은 존재하는 법. 학기의 끝자락, 쌓인 과제와 시험이 끝났다고 해서 책임감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제 남은 건 결과였다. 비록 시험은 끝났지만, 한 해 동안 쌓아온 노력이 어떻게 평가될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성적을 확인하려면 인터넷으로 몇 번의 클릭만 하면 되는 시대지만, 굳이 캠퍼스 중앙 연못 근처에 있는 본부로 향했다. 기계 앞에 다다라 학생증을 슬쩍 넣고 몇 초간의 기다림.

 기계는 고철 덩어리답게, 무심하게도 찰칵 소리를 내며 성적표를 토해냈다. 인쇄된 종이를 손에 들자, 그토록 확인하고 싶었던 결과가 종이 위로 박혀 있었다. 나름 상위권 성적. 일반물리학 A+, 대학 수학 A0, 패션과 심리학 A0…. 등등 예상했던 대로지만, 성적표를 손으로 직접 만져보는 감촉은 기이했다. 한 직원이 옆을 지나가며 살짝 웃음을 머금은 채 물었다. "요즘 다들 인터넷으로 확인하는데, 뭐 하러 여기까지 오셨어요?"

 뭐랄까, 그 말도 맞지만, 처음으로 성적표를 손에 쥐는 행위는 나만의 진중한 의식이 담겨 있다. 나도 이 학교의 구성원이 된 듯한? 

 그리고 졸업까지는 아직 멀었지만, 한국에서의 잔류, 핀란드로의 귀향, 그 사이에서 진로도 고민해야 했다. 내가 선택해야 할 최적의 코스는 어디인지….     


 P(한국취업): 한국에서 취업할 확률

 P(핀란드 귀향): 핀란드로 돌아갈 확률

 C1: 한국에서의 경제적 안정

 C2: 핀란드에서의 가족과의 유대

 공식은 이랬다.



 노트에 적은 풀이에 따르면, 각각의 경우에 따른 확률은 아래와 같다.

 Case 1: 한국에서 취업할 확률이 70%, 핀란드로 돌아갈 확률이 30%, 한국에서의 기회에 더 높은 비중(1.2)을 둔 상황에서는, 한국에 남을 확률은 약 77.78%.

 Case 2: 한국에서 취업할 확률이 60%, 핀란드로 돌아갈 확률이 40%, 각각의 기회에 거의 비슷한 비중을 둔 상황에서는, 한국에 남을 확률은 약 64.71%.

 Case 3: 한국에서 취업할 확률이 80%, 핀란드로 돌아갈 확률이 20%, 한국에서의 기회에 더욱 높은 비중(1.3)을 둔 상황에서는, 한국에 남을 확률은 약 88.14%. 


 앞으로 취득할 정보와 경험에 따라서도 추가 조정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대로만 간다면, 한국은 경제적으로 안정을 누리기에 높은 확률을 주지만, 나를 기다리는 가족과의 유대도 그만큼의 무게를 지녔으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