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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환 Oct 03. 2024

3화 연애와 결혼

'계산'하다(6)

 어느 여름날, 휴가를 나온 재동과 함께 인천 바다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우리는 차를 타고 인천의 한적한 해변까지 갔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모래사장을 걸었다. 바닷물이 밀려왔다 밀려가며 두 사람의 발을 살짝 적셨다. 그리고 그날 재동은 해변에서 나를 꼭 안아주며 속삭였다.

“힘들면 언제든 나한테 말해. 너 혼자 모든 걸 짊어지지 않아도 돼.”

 그 말은 큰 위로가 되었고, 우리의 관계가 여전히 굳건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와의 사랑은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안식처였다. 군에서 전역하기 전까지, 휴가 때마다 소중한 시간을 함께 보냈고, 그 시간은 대학 생활에 있어 가장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어느덧 3학년 2학기가 되면서, 그의 제대가 눈앞을 두고 있었다. 그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오랫동안 열심히 계산해 온 공식이 이제는 효력을 다해버린 듯한 느낌. 확률을 계산해 미래를 예측하는 행위는 나에게 일종의 안심을 주는 행위였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불확실한 삶 속에서 잠시나마 나침반 역할을 해준 허상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동이 돌아온다는 것은 예상된 미래였지만, 그 미래가 막상 닥쳤을 때의 감정은 그 어떤 공식으로도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재동이가 전역하고 처음으로 캠퍼스에 다시 나타난 날, 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들고 나오다 그를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옆에 보라가 있다는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녀는 재동의 팔짱을 끼고, 해맑게 웃고 있었다. “이레나!” 보라가 먼저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재동이 전역했어! 그래서 내가 학교 구경 좀 시켜줬지 뭐야.”

 나는 살짝 당황한 듯 웃었다. "그래서 학교 구경만 시켜준 거야?"

보라는 웃으며 "뭐, 구경은 핑계고 재동이랑 오랜만에 수다 떨고 있지! 이제 너도 좀 부지런히 시간 좀 내서 이 사람 좀 챙겨."

 재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보라가 잘 챙겨줘서 고맙지. 중간에서 너도 챙겨주라고 하더라.”

 나는 괜히 미소를 지었지만, 속으로는 왜 팔짱까지 끼고 있는지 살짝 의아했다. 보라는 나에게 재동을 밀쳐내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너희, 둘만의 시간이 왔어! 이제 전역했으니 서로 할 말이 많을 텐데, 난 빠질게. 잘해라, 둘 다!” 보라는 장난스럽게 재동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가뿐히 사라졌다. 우리는 어색한 침묵 속에서 머물다가,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보라, 생각보다 쿨하더라. 너랑 친할 만해."

 “맞아, 쿨하지. 그러니까 앞으로는 내 남자 친구한테 너무 들러붙지 않게 해야지.”

 재동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


 휴가 때마다 짧은 만남에 익숙해졌던 두 사람에게, 이제는 전역 후의 새로운 일상이 펼쳐질 터였다.

 부산의 해운대에서, 한적한 바닷가 모래 위를 걸을 때, 그의 손을 잡고 이어지는 긴 선이 나의 삶에 어떤 의미로 남을지 생각했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속에서 만났다는 점이 늘 흥미로웠지만, 한편으로는 불안의 근원이었다. 제주도의 푸른 바람 속에서도, 귤나무밭 사이로 걸으며, 문득 스쳐 가는 생각도 항상 같았다. ‘이 관계가 나의 삶을 안정적으로 이끌어줄 수 있을까?’

 나는 늘 마음속에서 모든 가능성을 계산해보고 있었다. 우리의 관계, 결혼, 그리고 삶의 방향성. 이 복잡한 방정식을 풀지 않고는 안 될 것 같았다. 나와 재동은 서로 다른 두 물체가 우주를 떠돌 때도 많으므로, 그 궤도를 계산해야만 했다.

 밤이면 밤마다 노트북 앞에 앉아 결혼이라는 미래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결혼이란 것은 단순한 확률 이상의 것을 요구했다. 1학년 때 배운 수학으로 확률만 계산하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여기엔 변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물리학과 토목공학의 공식을 끌어와 그 복잡한 관계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결혼 안정성 평가 공식

 또한, 추가적인 부차적 변수를 고려해야 했다. 두 사람이 함께 살 때 생길 수 있는 물리적 거리, 재정 상태, 감정적 요동, 그리고 직업적 안정성을 포함한 모든 가능성을 수식에 반영했다. 그 결과로 나온 건 매우 복잡하고 난해한 수식이었다.


 한국으로 온 지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공학사 학위를 손에 쥐었지만, 한국에서의 생활이 만족스러웠고, 당장 설계사 회사를 지원할지, 석박사 통합과정을 밟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시공사는 현장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여자에게는 불편했고, 기업에서도 선호하지 않았다. 

 연구실 문을 두드리기 전에 잠시 숨을 고르며, 내가 계산한 확률을 상기했다. 문을 두드리자, 교수님은 여느 때처럼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아주셨다. 김연수 교수님은 나를 앉히고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차분히 말을 꺼내셨다.

 "이레나, 한국에서 더 오래 머물 계획이라면, 석박사 통합과정이 맞는 선택일 거예요. 토목공학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내려면 시간을 들여야 하고, 이미 기반을 잘 다져놨으니 충분히 잘 해낼 겁니다."

 하지만 그 순간, 경제적 안정성이라는 확률 너머에서 떠오르는 한 가지가 있었다. 그건 바로 내가 이 길을 왜 걷고 있는지, 그리고 학문 공부를 더 깊이 들어가야 할 이유였다.

 "교수님, 왜 석박사 통합과정을 선택했냐고 물으신다면, 좋은 기업을 들어가기 위한 성적과 성취 때문만은 아닙니다. 제가 토목공학을 선택한 이유는 구조물을 설계하고 시공하는 일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의 기초를 탐구하고 싶어서였어요. 마치 우리가 땅을 깊이 파고 들어가면 더 단단한 지반을 찾는 것처럼, 저도 제 자아와 이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어요."

 교수님은 나를 주의 깊게 바라보셨다. 그 눈빛은 마치 내 속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렇다면, 이 과정에서 자네가 찾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교수님은 한참 동안 나를 쳐다보며 질문을 던지셨다.

 "저는…. 이 세상이 정말로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어요. 과학과 기술, 이론은 우리를 더 나은 세상으로 이끌어주지만, 그 이면에 숨어 있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보는 현실이 거대한 시뮬레이션인 것처럼…. 그래서 이 현실을 만들어가는 자연과 인공 간의 경계가 무엇인지. 근본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들어 보고 싶어요."

 교수님은 한동안 조용히 앉아 계셨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내 말이 조현병 환자처럼 들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교수님은 곧 고개를 끄덕이시며 말했다.

 "이레나, 학문은 종종 우리를 현실적인 답변으로 이끌지만, 그 답변이 언제나 전부는 아니지요. 과학이 밝혀내지 못하는 것들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탐구하는 것도 중요한 과정입니다. 석박사 과정에서 내가 계속 자네를 지도하길 바란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 자네의 호기심이 이 모든 것을 이끌고 있기 때문이네."

 나는 교수님의 말에서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내가 찾고 있는 그 무언가가 교수님도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교수님께서 저를 계속 지도해 주실 건가요?" 나는 살짝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했다.

 교수님은 미소를 지으시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물론이지. 자네가 그 답을 찾을 때까지 내가 함께할 걸세. 자네가 토목공학이라는 구조 속에서 찾으려는 진리는 그 이상의 무언가니까."


 교수님과의 상담 후, 한국에서 더 오래 머무르기로 부모님께 통보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사실, 나는 4년 동안 핀란드에 돌아가지 않았다. 고향이 그리울 때도 있었지만, 한국에서의 새로운 생활에 점점 더 익숙해졌고, 결국 부모님은 나의 최종 결정을 듣자마자 직접 한국으로 오시기로 했다.

 부모님이 한국에 도착한 날, 나는 처음으로 재동이를 부모님께 소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빠는 인천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내가 남자친구를 만나고 있다는 걸 처음 듣고 놀랐던 듯했다. 엄마는 전화로 그런 얘기 한 번 하지 않더니, 왜 이제야 말하느냐고 나무라셨다. 엄마도 그럴 게, 평소 통화할 때조차 남자친구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으니까.

 공항 출입구 앞에서 부모님을 기다리며 발끝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사람들은 제각기 수많은 이야기와 짐을 들고 지나갔지만, 그 순간 나에게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부모님께 재동을 어떻게 소개할까? 무엇을 먼저 말해야 할까? 아빠는 비행기 안에서 남자친구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여러 질문이 쏟아질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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