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붐비는 인파 속에서 부모님의 얼굴이 보였다. 아버지는 큰 여행 가방을 끌며 피곤한 얼굴로 나를 찾아냈고, 엄마는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엄마, 아빠!” 그들 앞에 다가서며 포옹을 하며, 인사를 나눴다. 따뜻한 재회도 잠시, 아버지는 대뜸 물었다. “그래서, 그 남자친구란 친구는 언제 소개해 줄 거냐?” 피곤함에 묻힌 표정 속에서도 그의 눈은 날카로웠다. "아, 그건… 천천히 얘기할게요. 저녁 먹으면서 얘기하자고요." 엄마도 아빠 쪽을 살짝 쳐다보며 조용히 끄덕였다. 무언가 물어보고 싶다는 눈빛이었지만, 나 역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공항 로비를 나서는 동안, 부모님은 내 옆에서 걷고 있었지만 공기는 그리 가볍지만은 않았다. 부모님을 태운 차가 서울 시내로 들어서자, 나는 일부러 대화를 돌리려 애썼다. "서울 신기하죠? 내일은 경복궁도 같이 가봐요." 아빠는 애써 둘러대는 말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식당에 도착해 자리를 잡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뜨거운 국물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뚝배기가 준비되고 있었고, 부모님은 물을 한 모금씩 마시며 기다렸다.
부모님이 한국에 오신다고 했을 때, 첫 식사로 무엇을 고를지 꽤 오랜 시간 고민했다. 이국적인 메뉴도 많았지만, 부모님에게는 진정한 한국의 맛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낯선 음식에 너무 당황하지 않도록 해야 했다. 매운 김치찌개나 불고기를 갑작스럽게 소개하면 입맛에 맞지 않을까 봐 걱정되었고, 너무 평범한 양식은 서울에 온 첫 식사로는 부족해 보였다. 그리하여 고심 끝에 선택한 메뉴는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을 지닌 '설렁탕'이었다. 부모님을 데리고 간 곳은 북촌 근처의 작은 전통 한식당으로 나지막한 한옥 스타일 인테리어에 따뜻한 나무 테이블, 작은 마당이 있는 식당이었다. 밖에서 보기에는 허름해도 나름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고즈넉한 분위기와 함께 은은한 냄새가 감돌았다. 어둡지 않은 따뜻한 조명 아래, 깔끔하게 정돈된 그릇들과 메뉴판이 눈에 들어왔다.
부모님께서는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데 살짝 어색해했지만,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한참 동안 낄낄댔다. “설렁탕은 사골을 푹 고아 만든 국물로, 아주 부드럽고 속을 따뜻하게 해 줘요. 한국에서는 건강을 생각할 때 자주 먹는 음식이에요.”
잠시 후, 커다란 뚝배기에 담긴 하얀 국물과 밑반찬들이 차려졌다. 국물에 떠오른 고깃덩이와 곁들여 나온 김치, 깍두기, 그리고 그 고소한 냄새는 금방이라도 허기를 돋우었다. 나는 부모님이 젓가락을 들기를 기다리며 천천히 숟가락을 들어 맛을 보았다. 처음 한 입을 넘기는 순간, 그 깊고 따뜻한 국물이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빠도 고기를 몇 조각 건져 올리더니 조심스럽게 맛을 보더니 “이거 참, 먹을 만하구나.” 엄마도 국물을 한 모금 마신 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제야 부모님이 한국에서의 첫 식사를 무리 없이 받아들인 것 같아 기뻤다.
“자, 이제 말해봐. 그 친구는 어떤 사람이니?” 아빠는 고기를 한 점을 더 집어 들며 말했다. 나도 이젠 더 미룰 수 없다는 걸 직감하고 조심스럽게 반지를 꺼내 보였다. 그리고 반지가 손가락에 빛을 발할 때, 나지막이 말했다. "음…. 재동이가 이미 프러포즈했어요." 엄마와 아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프러포즈?"
"네가 그런 얘기를 한 번도 안 해서... 이런 얘기를 미리 좀 했어야지. 사람 참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나는 그때를 떠올리며, 차분히 설명했다. 몇 달 전, 재동이는 나릏 남산으로 데려갔다. 야경이 멋진 그날 밤, 탑 아래에서 그저 손을 꼭 잡고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나는 놀라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는 웃으며 반지를 꺼내 내게 말했다. “이레나,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네가 나의 전부가 될 거라는 걸 알았어. 너와 함께라면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라 믿어. 나와 결혼해줄래?”
나는 잠시 숨을 멈췄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재동은 반지를 내 손가락에 끼우며 다시 일어섰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서로를 안았다.
“그렇게 해서… 네, 제가 승낙했어요.”
엄마는 말을 잇지 못했고, 아버지는 침묵 속에서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이윽고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막 대학을 졸업했는데…. 결혼은 너무 이르지 않을까?"
나는 아버지의 말에 당연하다는 듯 웃었다. "아빠, 나도 그 부분에 대해 많이 생각해봤어요. 그런데 재동이가 저에게 안정감을 줘요.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한국에 있는 동안 많이 의지하게 됐어요. 물론, 걱정되는 부분도 있지만… 결혼을 안한다고해결할 수 있는 답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만, 그와 함께라면 앞으로의 길도 충분히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버지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었고, 엄마는 그 말을 듣고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결혼이란. 정말 많은 책임을 요구하는 거란다, 이레나. 그런데도 네가 그렇게 확신했다면, 우리는 그 결정을 존중할 수밖에 없겠지."
부모님과 남자친구의 만남은 조심스러웠다. 막상 얼굴을 마주 보니, 부모님은 재동이의 차분한 태도와 진중한 말투에 조금은 안도했다. 첫 만남에서 긴장을 감추지 못하던 재동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여유를 되찾았고, 아버지와 남자친구는 서로에게 여러가지를 물어보며, 차분하게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다. 그러던 중,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핀란드에서는 가족들이 자연스럽게 만나 서로를 소개하고 교류하는 정도쯤으로 이루어지는데, 한국 문화를 알아보니 정식으로 만나는 자리가 있더구나”
“아…. 네 맞습니다. 한국에서는 결혼 전에 양가 부모님이 만나는 중요한 자리예요. 상견례라는 말을 써요. 핀란드에서는 그런 게 없나 보군요”
순간, 당황한 눈빛으로 아빠를 바라봤다. 그렇게 빨리 상견례를 얘기할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결심이 선 듯했고, 남자친구도 어색하게 웃으며 "저는 언제든 준비되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날 저녁은 그렇게 상견례 날짜를 잡는 것까지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