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뒤, 시간의 흐름마저 속도를 잃은 듯, 상견례는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진행되었다. 장소는 서울의 고급 한정식 식당. 분위기는 한적하면서도 전통적인 멋이 살아있었고, 나무로 된 큼지막한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향긋한 솔 내음이 감돌았다. 재동은 내게 손을 꼭 쥐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잘 될 거야.”
식당 안에 들어서자 서로 마주 앉은 두 가족. 하지만 언어는 그들 사이에 콘크리트 벽처럼 단단하다. 시부모님은 나지막하면서도 어눌한 어투로 핀란드어 인사를 건넸고, 내 부모님은 억양이 워낙 남달랐는지, 목소리가 안 들렸는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채, 그저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그 중간에 앉은 나는 이따금 양쪽의 말을 통역하며, 흐르는 강물처럼 부드럽게 이어지도록 애썼다. "저희 부모님이 인사드린다고 하셔요, 어머니."
우리 부모님은 한국 전통 한정식을 눈앞에 두고 약간은 긴장한 듯 보였다. 그들은 눈앞에 놓인 고사리나물, 잡채, 간장게장과 같은 낯선 음식들 앞에서 포크를 들어 올리며 망설임을 보였다. 한국 음식이 그들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어쩌지? 음식이 중요한 시간을 방해하면 어쩌나 싶었다.
"엄마, 아빠…. 이 음식은 한국에서 가장 정성스럽게 대접하는 전통 요리예요. 익숙지 않겠지만 한 번 시도해 보세요." 나는 미소를 띠며 그들에게 부드럽게 설명했다.
그 길고도 짧은 시간 동안, 언어의 장벽을 허물 수는 없었지만, 양가의 마음을 전할 방법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선물!
먼저, 우리 부모님은 핀란드에서 가져온 귀중한 물품을 꺼냈다. 곰곰이 고민 끝에, 그들은 핀란드의 유명한 '아이딜라그 오리지널 티타임 세트(Aidilag Original Tea Set)'를 선택했다. 핀란드의 차 문화와 북유럽 디자인이 담긴 이 세트는 우아하면서도 실용적인 물건이었다. 순수 도자기로 제작된 이 고급 세트는 일상에서 사용하는 도구를 예술적으로 승화한 핀란드의 장인 정신을 대표했다. “저희가 작은 성의를 준비했습니다.” 아빠는 미소를 띠며 정성스럽게 포장된 차 세트를 건넸다.
그에 맞서 시부모님은 은수저 세트와 고량주를 꺼냈다.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은수저를 선물로 주는 것이 축복과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고, 고량주는 격식 있는 자리에서 정성을 담아 나누는 술이었다. “이건 저희가 준비한 작은 선물입니다.” 시아버지도 선물 세트를 건네며 정중하게 말했다.
식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즈음, 두 부모님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긴장했던 분위기가 조금씩 풀려갔다. 시아버지가 말을 걸었고, 나는 그의 말을 통역했다. "부모님께서 따님을 굉장히 예뻐하신다고 하셔요. 그리고 우리가 이런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하십니다."
상견례는 어찌어찌 순조롭게 끝났다. 두 부모님 모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우리의 앞날은 조금 더 밝을 예정이었다. 식당을 나서며 우리는 괜스레 서로를 바라봤다.
부모님은 한국에서의 남은 3주 동안 우리와 함께 서울의 여러 명소를 탐방하며 여행을 즐기기로 했다. 나는 한국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었다. 첫 번째 여행지는 전주한옥마을이었다. 전통 한옥이 줄지어 있는 거리에서 부모님은 내가 억지로 입힌 한복을 입고 산책하며 시간을 즐겼다. 두 번째는 경복궁의 웅장함에 부모님은 연신 감탄했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롯데타워 전망대에 올라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그 순간을 마음에 담았다. 부모님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나와 재동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이젠 정말로 너희가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
앗, 그리고 부모님이 핀란드로 떠나기 전, 내가 사는 기숙사를 꼭 보고 싶다고 했다. 공간을 둘러보며 엄마와 아빠는 고개를 끄덕였고, 엄마는 호기심이 넘치는 눈으로 책상 위를 살펴보았다. 나는 책상 위에 펼쳐둔 노트와 복잡하게 얽힌 공식들을 보며 살짝 불안한 마음을 감추려고 애썼다. 엄마가 이런 것들을 눈여겨보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 눈길은 어느새 노트로 향해 있었다. 그녀는 내가 나만의 시간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남에게 내 생각과 고민을 보여주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일인지.
하지만, 호기심이 앞섰던 것일까? 엄마는 슬쩍 노트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손끝이 페이지가 뒤로 살짝 넘기는 동작이 눈에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연 다음 장에는 복잡한 수식들과 도표들이 줄지어 메모되어있었다.
재동과의 미래를 그릴 확률과 물리적인 수식을 적어둔 노트였다. 심지어 결혼의 안정성, 경제적 안정성, 성격 적합성까지 복잡한 물리학과 토목공학 공식을 적용해, 그래프로 계산해 둔 ‘나만의 기록’이었다. 엄마는 그걸 보더니,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레나, 넌 정말 철저하구나. 재동이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이렇게나 확실히 증명하려고 했구나. 하지만 사실, 이런 수식들이 말해주는 것보다 중요한 건 네 마음이란다.”
수학자로서 논리적이고 계산적인 엄마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엄마, 뭐가 웃긴 거야? 확률적으로 분석해 보면 이게 나와 재동이가 얼마나 잘 맞는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잖아."
엄마는 노트를 내려놓으며, 내 눈을 바라봤다. 그 눈빛은 깊고도 몽환적이었다. “이레나, 네가 적은 수식들…. 물론 의미가 있지. 가끔은 사람도 수치로 설명할 수 있어. 하지만, 그건 일부에 불과해. 정말 중요한 건, 네가 재동이를 만났다는 그 자체가 인연이고, 운명이란다. 그런 것들은 공식으로 설명되지 않아.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아. 그저 따라올 뿐이야.”
그 말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인연과 운명…. 그것은 너무 비과학적인 말이었다.
“네가 수식으로 분석하는 것, 그건 네가 세상을 이해하려는 방식이지. 하지만 마음가짐에 따라 사람과 사물의 형상과 영혼까지 변할 수 있어. 이 세상은 네가 보는 그대로가 아니야, 이레나. 우리가 보는 건 한 편의 꿈일지도 몰라.”
엄마가 말하는 것이 내가 그동안 고민해왔던 시뮬레이션 우주의 개념과 연결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공허한 '무'의 세계로 초대하는 느낌이었다.
“그 현실을 어떻게 바꾸느냐는 네 마음에 달린 거란다.”
우리가 보는 세상이 단지 어떤 흐릿한 거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나를 잠식해 갔다. ‘현실을 구성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나는 내 모든 것을 걸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천천히 뇌 속으로 스며들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두 달 뒤, 부모님은 다시 한국에 오셨다. 그사이 나는 정신없이 결혼 준비에 매달려야 했고, 그 과정에서의 설렘과 기대감은 매 순간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었다. 예식 장소는 강남의 한 고급 호텔 예식장으로 정했다. 세련된 실내장식과 넓은 홀, 커다란 샹들리에가 빛나는 그곳은 처음부터 내 마음을 사로잡을 만했다.
드레스를 고르는 일도 흥미로웠다. 한국과 핀란드 양국의 문화적 차이를 반영하면서도 상상했던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싶었다. 청순하면서도 고전적인 라인에 우아한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를 골랐다. 재동을 떠올리며 거울 속 나를 바라보는 순간, 그와 함께할 미래가 한껏 더 다가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부케는 보라가 받기로 했다. 내 결혼 준비를 함께 도와준 친구이자, 룸메이트였던 친구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었다. 그녀는 부케를 받을 생각에함박미소를 지었고, 내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고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하객 명단을 짤 때는 양가 부모님과 친지들뿐만 아니라, 나의 핀란드 친구들 몇명과 재동의 동료들, 그리고 교수님들까지 초대했다. 재동이네 부모님 인맥이 많은지라 약 160명 정도의 하객이 초대되었던 것 같다.
결혼식 당일, 부모님과 함께 호텔 로비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고, 드디어 예식이 시작되었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웅장하게 퍼졌다.
"신부 입장!"
사회자의 말과 함께 문이 양쪽으로 열리자, 현악기의 경쾌한 선율이 짜잔— 하고 울려 퍼졌다. 하얀빛은 부드럽게 퍼지며 공간을 메웠고, 두근거림을 억누르며 첫발을 내디뎠다. 길게 늘어진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사르륵’ 스치며 우아하게 흐르고, 발걸음 하나하나가 고요한 예식장을 가로질렀다. 하객들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고, 그들의 시선은 모두 나를 향했다. 나의 삶, 우리의 미래가 이 순간에 온전히 집중된 느낌이었다.
재동이가 무대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발걸음마다 우리의 지난 시간을 되짚으며.
마침내, 그의 옆에 다가갔고, 우리의 새로운 이야기가 막 첫 페이지를 열었다.
주례를 맡은 김연수 교수님은 나와 재동이의 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다. “결혼은 두 사람의 새로운 출발이자 도전입니다. 그 과정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며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라는 말로 주례를 시작하셨다.
주례의 말이 끝난 후, 재동과 나는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그의 손은 따뜻하고 단단했다. 우리는 서약서를 교환하며 서로의 사랑을 다짐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앞으로의 미래를 함께 걸어갈 준비가 되었다는 확신을 느낄 수 있었다. 서약식을 끝내고, 양가 부모님 앞에 섰다. 재동이는 단정하게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우리 부모님 앞에서 깊숙이 절을 올렸다. 그가 고개를 숙이는 동안, 나는 약간 어색한 기분으로 가슴께에 손을 얹고, 공손하게 묵례를 했다. 부모님은 나를 바라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고, 특히 엄마는 눈가가 살짝 촉촉해진 채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무언의 응원을 보냈다.
결혼식의 마지막 순서가 다가왔다. 부케가 하늘로 날아오르자, 꽃잎들이 공중에서 일시 머물다 이내 보라의 손끝에 부드럽게 안겼다. 하객들 자리에서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고, 그 소리는 축복의 물결처럼 평화로운 앞날을 예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