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의 ‘허상’(2)
병원에 도착하고, 접수창구를 찾았다. 차가운 공기와 희미한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스쳤고, 복도 곳곳에는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아내는 아직도 삐졌는지, 아무 말 없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창구에 다다르고, "예약한 곽재동입니다."
데스크의 간호사는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며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잠시 후, 그녀가 고개를 들더니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곽재동 님, 이진형 외래 교수님께 의료 상담을 요청하셨네요. 잠시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그녀는 서류를 정리하며, 추가로 설명했다. "약 10분 정도 기다리셔야겠네요. 대기실에서 불러드릴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내와 함께 대기실로 발길을 돌렸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있으니,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했다. 몇 분이 지났을까. 간호사가 다가와 이름을 불렀다. "곽재동 님, 이진형 교수님 진료실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 문을 두드렸다.
"네. 들어오세요."
짧게 다듬은 머리, 단정하게 깔끔한 셔츠, 금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날카로운 눈빛.
이 교수는 국내외에서 인정받는 정신과 전문의로 조현병 분야에서는 최고의 권위자로 유명하다. 수많은 연구 논문과 강연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종종 학회에서는 그를 ‘현대 정신의학의 선구자’라 부르곤 했다. 또한, 심리 치료와 인지 행동 치료 분야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고, 환자와의 공감 능력 또한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해외에서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며 실전 경험을 쌓은 뒤, 한국에서 외래교수로 활동 중이다. 아내는 내가 왜 그에게 예약을 잡았는지 모를 것이다. 그녀의 변덕스러운 기억 상실과 행동의 변화는 조현병과 닮은 부분이 있었고, 이 교수가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였기에 그의 진단을 받고 싶었다.
의사가 우리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손은 따뜻하고 견고했다. "곽재동 씨, 이레나 씨 맞으시죠?" 그는 천천히 자리에 앉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늘 어떤 일 때문에 오셨나요?"
나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우리의 최근 상태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리고 이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를 시작했다. "일단 검사부터 진행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증상에 따라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거든요. 기억력 문제와 그 외의 행동 변화는 신경학적 원인도 고려해야 하므로, 신체검사와 함께 심리 평가도 진행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다시 바라보았다. "긴장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가 최선을 다해 여러분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도록 도울 겁니다."
검사는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먼저 우리는 기본적인 신경학적 평가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눈동자 반사, 동공의 크기 변화, 그리고 안구 운동 등을 세밀하게 살폈다. 손가락을 움직이며, 그것을 제대로 따라오는지 확인하고, 청각과 시각 반응을 검증했다. 다음으로는 뇌파 검사(EEG)였다. 이 검사는 두피에 부착된 전극을 통해 뇌의 전기적 활동을 기록하여, 비정상적인 뇌파나 신경 회로의 이상을 찾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검사를 먼저 마치고, 옆에서 가만히 다음 차례를 진행하는 그녀를 지켜보았지만, 불안한 마음을 감추긴 어려웠다. 또한, 뇌의 구조적 문제를 확인하기 위한 MRI(자기공명영상)도 동원되었다. 이 검사는 강한 자기장을 이용해 뇌의 미세한 구조적 변화를 탐지하는 방식이었다. MRI 스캐너가 우리의 머리를 감싸고 있는 동안, 기계의 낮고 규칙적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외에도 혈액검사와 신경전도검사(NCV)까지.
혈액검사는 호르몬 수치나 전해질 이상, 혹은 비타민 결핍과 같은 다른 신체적 원인을 배제하는 데 필요했고, 신경전도검사는 말초 신경이 자극을 전달하는 속도를 측정하는 것이었는데, 근육 기능에 문제가 있거나 신경 자체가 손상되었는지를 점검하는 검사였다. 마지막으로 심리 평가를 진행했다. MMPI(Minnesota Multiphasic Personality Inventory)와 같은 다면적 인성검사를 통해 인지 기능과 정신 상태를 평가하는 것이었다. 이 검사는 성격 특성, 스트레스 수준, 그리고 잠재적인 정신 질환 징후를 찾아내기 위한 표준화된 검진이었다. 나와 아내는 기계처럼 차분하게 답변했고, 나는 아내의 답변을 지켜보면서도 그녀 안에서 어떤 감정의 변화도 찾아낼 수 없었다. 검사가 끝나고 나서, 다시 의사의 방에 돌아왔을 때, 아내는 평소보다 많이 피곤해 보였다. 나는 옆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몰랐다. 혹시라도 작은 이상이라도 발견된다면, 그나마 우리가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마침내, 의사가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무거운 분위기를 풀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입을 뗐다. “심리적인 부분에서 오는 일시적인 스트레스나, 인지 부조화로 인한 불안감일 수도 있습니다.”
“인지 부조화요?” 아내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인지 부조화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과 반대되는 새로운 정보를 접했을 때, 또는 두 가지 이상의 상반되는 믿음이나 생각을 가질 때, 발생하는 불편한 감정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본래 자신의 의도와는 상반되는 행동을 하게 된다면 혹은 상황이 자신의 의도와 맞지 않게 흘러간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불쾌감이죠. 그 불편함이 인지 부조화로 이어지며, 나아가 불안, 긴장, 초조함과 같은 증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나는 의사의 말에 집중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고, 아내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의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우리를 쳐다봤다. "이런 경우, 긴장을 풀고 일상 속에서 조금 더 안정된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강아지 같은 애완동물을 키워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어요. 작은 존재가 주는 안정감이 큰 도움이 될 수도 있거든요.”
여전히, 아내는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흘려보내며, 가슴속에 쌓여 있던 궁금증을 하나씩 꺼내 물었다. "세상에 없는 공식을 우리가 만들고 있어요. 아니, 만들었다기보다는… 가정법을 이용해 가설을 세우는 것 같아요. 양자역학이나, 뉴턴의 중력 법칙, 유체역학까지 말이죠. 그리고…." 말끝을 흐리며 머뭇거렸다.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두려운 부분이었다. "가끔은… 아내가 사람이 아닌 다른 형상으로 변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마치 눈앞에서 실제로 무언가가 바뀌는 것 같은데, 왜 그런 걸까요?"
의사는 내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손을 맞잡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제가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그런 증상들은 조현병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아내 혹은 제가 그쪽으로 진단받을 가능성이 있는 건가요?”
의사는 그제야 조용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아주 철학적인 질문입니다, 재동 씨. 현대 의학은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지만, 모든 경우를 포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특히 우주에 대한 가설이나, 세상이 시뮬레이션일 가능성 같은 철학적인 문제는 의학적 진단으로 다루기 어려운 부분이죠. 조현병은 뇌의 화학적 불균형이나 구조적 변화로 인해 발생할 수 있습니다만, 그 진단 또한 확고한 증거 없이 내릴 수는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나타나는 증상들은 신경학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정상 범주에 속해 있어요. 다시 말해서 의학적으로는 조현병이나 그와 유사한 진단을 내릴 만한 근거가 없다는 겁니다."
나는 그의 말에 답답함을 느꼈다.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말만 반복될 뿐.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모든 것이 단순한 스트레스나 불안감 때문이라니…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럼.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되는데, 그저 정신적 스트레스라고만 보기엔 너무 이상해요. 조현병은 정말 아닌 건가요?" 내가 다급하게 물었다.
"현재로서 그럴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우리 뇌는 아직도 많은 미지의 영역을 알아내야 하는 숙제가 있지만요. 의학계에서 발표된 논문이나 연구 자료를 보면, 아주 가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종교적인 깨달음이나 신비적 경험과 같은 게 아니라면, 저희가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렵겠죠. 여러분도 연구원이니까 잘 아시겠지만, 과학과 의학이란 결국 관측된 현상과 측정된 결괏값을 바탕으로 추론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양자역학의 얽힘이나 중첩 같은 개념들은 인간의 직관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죠. 달이 실제로 존재하는데도 관측하지 않으면, 달이 없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도 그런 의미에서 같은 논리로 접근할 수 있고요."
그는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현대 의학이나 과학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현상들이 곧 조현병이나 다른 정신 질환의 징후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사람의 뇌는 참 아이러니하죠. 본능적으로 불확실성을 탐닉하면서도, 그걸 억제하려는 강한 욕망을 품어요.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언제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의 눈빛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언론에서도 그걸 잘 이용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보죠. '미국 특수부대가 빈 라덴을 사살하기 위해 출동했다'와 '빈 라덴이 거기 있을 확률은 50%지만, 그곳으로 목숨을 걸고 나갔다'라고 발표하는 것은 다릅니다. 후자는 불확실성에 따른 불안감을 유발하니까요. 사람들은 확실한 정보를 원합니다. 뇌의 오류죠. 확실한 것을 원하면서도, 그 확실성 자체가 허상일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의학계나 과학계도 철학이나 종교에 의존하는 순간, 인간들의 신뢰를 잃습니다. 사람들이 치료를 받으려 하지 않겠죠. 결국, 과학자도, 의사도 자본주의의 톱니바퀴에서 돌아가는 존재일 뿐입니다."
한 손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아마도, 지구는 팽창하는 우주 속, 감옥이라고도 볼 수 있죠. 외계 문명이 더 발전했다면, 그들은 아마 우리가 모르는 불확실성의 영역, 즉 양자역학과 같은 미지의 영역을 탐구하며 이미 진보를 이뤘을 겁니다. 허허허."
그의 웃음은 허탈하게 들리면서도, 그 안에는 깊은 깨달음을 가진 자만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감옥에 갇힌 거예요. 우주가 우릴 가둔 걸까요? 아닐 겁니다. 사실, 원래 이런 말씀을 드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두 분의 지적능력이 매우 뛰어나시고, 양자역학 같은 복잡한 개념을 언급하시기에, 저도 조금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해드리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