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기억은 인생 전반에 안개처럼 깔려있다.
1993년, 당시 나는 서울의 한 주공아파트 15층에 살았다. 큰 방하나에 작은 방 하나, 그리고 그 두 방을 잇는 부엌이 있고, 두 방의 사이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11평, 지금 떠올리면 작은 집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는데 아마도 내가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크게 느꼈었나 보다. 이 전에는 산아래에서도 살고 반지하에서도 살고 그랬다는 것 같은데, 내 첫 기억은 이 아파트다. 한 살 차이 오빠는 유치원에 가고 부모님은 각자 일터로 출근하면 나는 15층 짜리 아파트의 맨 꼭대기층에 홀로 남았다. 부모님은 빠듯한 살림에 둘을 다 유치원에 보낼 수 없었다. 지금 시대에 예닐곱 살의 어린 여자아이를 집에 하루 종일 혼자 두었다고 하면 뉴스에 나올 일이지만 그 당시는 딱히 큰 문제가 되진 않았던 시절이다.
그렇게 나의 첫 기억은 아파트 난간사이로 보이는 상가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15층 꼭대기 집에서 베란다로 밖을 바라보면 엄마가 출근하는 병원, 그 병원이 자리한 상가가 보였다. 물론 병원 내부나 입구, 창문 같은 게 보인다기보다는 간판정도만 간신히 보였다. 15층이나 되는 높이였지만 무섭다는 생각은 그다지 없었던 것 같다. 나에겐 지척에 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최고의 뷰였기 때문일 것이었다.
15층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미니어처 세상처럼 작았다. 움직이는 차들을 잡아다가 이리저리 내가 움직이는 양 놀이도 해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괜히 만져보려고 시도하면서 놀기도 했다. 그러다 저 멀리 집을 향해 오는 엄마를 보면 크게 불러보기도 했었던 것 같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엄마는 나를 집에 혼자 두긴 했어도 점심시간이 되면 부리나케 집으로 와서 나에게 점심을 차려 주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내 첫 기억이 혼자인 탓 인지 나는 그런 장면이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엄마는 적잖이 억울해했다. 그것 말고도 엄마는 없는 살림에 다양한 경험은 시켜보고 싶어 동네에서 열리는 뮤지컬 공연은 오빠와 나에게 자주 보여주었다고 한다. 대신에 표 값이 너무 비싸서 어린 오빠와 나를 들여보내고 끝날 때까지 밖에 서서 기다렸다고 했다. 그때 봤던 뮤지컬을, 아니 그때 엄마가 그런 노력으로 뮤지컬을 보여줬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도 엄마는 억울하다고 했다. 내 안에는 좋은 것들이 담기기 어려웠던 걸까. 하지만 기억엔 남지 못해도 내 안에는 남았는지, 영양분이 되어 이렇게 글을 쓰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혼자 있는 시간 동안 나는 혼자서 놀아야 했다. 그렇지만 딱히 놀잇감도 많지 않았다. 뭐든 갖고 싶어 했다는 어린 나에게 뭐라도 사줄 돈이 없었던 부모님이었기에, 나에게 그럴싸한 놀잇감은 후에 사촌언니가 놀다가 물려준 마론인형 하나가 전부였다. 그 마론인형을 가지고 베란다에 걸터앉아 인형놀이를 하던 날이 기억난다. 나는 그날도 엄마가 있을 상가를 바라보면서 인형놀이를 했다. 그러다 순간 인형을 놓치며 베란다 바깥, 1층으로 인형을 떨어트려버렸다. 나는 혼날 것 같다는 생각에 무선전화기(당시 집전화에 딸려있는 거의 무전기처럼 생긴 무선전화기가 있었다.)를 들고 1층쪽을 바라보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의 말로는, 내가 혼자 있는 동안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엄마가 일하던 병원은 개인병원으로, 안내와 진료보조를 하는 인력까지 해봤자 엄마를 포함해 3명이거나 4명 정도 되는 작은 규모였다. 직원들은 돌아가며 전화응대를 했고, 하도 내가 전화를 많이 하니 엄마는 눈치도 보이고 일도 제대로 하기 어려워서 너무 힘들었단다. 어린 나에게 전화를 걸면 안 된다고 단단히 일러두었는데, 나는 사소한 일로도 큰일이 난 것처럼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댔던 거였다.
어쨌든 무슨 일이 생기면 전화를 해도 되는 거니, 나는 인형을 떨어트렸다고 전화를 걸었다.
"엄마, 쥬쥬(마론인형)를 베란다 바깥으로 떨어트렸어요"
그러면 엄마는 초조하고 다급한 목소리로
"응 알겠어, 엄마 일해야 되니까 전화하지 마"
그렇게 말했다. 전화를 끊으려다가 나는 그 무전기 만한 무선전화기까지 바깥에 떨어트리고 만다. '진짜 큰일 났다. 엄청 혼날 것 같다.' 나는 또다시 유선전화로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엄마, 전화기를 바깥에 떨어트렸어요."
예상과 달리 차분했던 엄마는 '알겠으니까 베란다로 나가지 말고 전화하지 마라. 엄마 곧 간다.' 대충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희한하게도 전화기를 바깥에 떨어트렸다는 통화 이후로는 다른 것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데, 언젠가 꿈속에 사지가 조각난 마론인형이 나와서 왜 자신을 버렸냐고 무섭게 다그쳤었던 것은 기억이 난다.
그 후에도 나는 자꾸만 엄마의 직장에 전화를 걸어댔고, 도저히 근무를 할 수 없었던 엄마는 나를 편도 3~4시간 거리의 시골에 데려다 놓았다. 그곳에서도 나는 매일 울었고 '엄마한테 전화하면 안 되냐'며 외할머니에게 떼를 썼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대여섯의 내가 전화를 걸 줄 모른다고 생각해 '걸고 싶으면 걸어라'라고 하셨단다. 전화를 걸 줄 알았던 나는 또 엄마에게 전화를 해 울면서 엄마가 보고 싶다고 했단다. 결국 엄마는 일주일 만에 나를 다시 데려왔다고 했다. 나는 아주 나중에 다 커서 엄마가 얘기해 주기 전까지는 내가 시골에서 보낸 시간이 한 일 년쯤은 되는 줄 알고 있었다.
후에 나는 대학원 수업에서 '나의 첫 기억에게 편지 쓰기' 활동을 하면서 15층 꼭대기집 베란다에서의 기억이 첫 기억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빈 집에 홀로 버티는 시간을 보내며, 요청을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요청을 할수록 더 멀리 버려졌던 경험이 내 인생 전반을 외롭고 의지하지 않고 뭐든지 혼자 해결하려는 나 자신으로 반영된 것이었다.
스스로 기억하는 자신의 첫 기억은, 인생의 전반에 영향을 준다. 어떤 이는 부모님과 놀이동산에 놀러 간 기억이 첫 기억이고, 또 다른 이는 함께 생일 초를 불던 생일파티가 첫 기억이기도 하다. 이 기억들은 평생 동안 무의식에 자리 잡아 부모님은 나를 즐겁게 해 주고, 나의 탄생을 축하해 준 사람들로 내가 딛고 설 땅을 단단히 다져 준다. 반면, 엄마에게 거절당하고 멀리 버려졌던(체감상) 기억은 나에게 언제나 내가 버림받을 수 있다는 무의식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당시 내가 나에게 쓴 편지는 써야 하는 것을 미리 쓰지 못하고 미루다가, 학교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급히 메모하듯 휴대폰 메모장에 입력했었다. 급히 도착한 수업에서는 이미 한 사람 씩 편지를 발표하고 있었고, 나는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중간정도 자리에 앉았다. 세 사람 정도 자신의 편지를 읽어 내려갔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얼마나 잔인한 사람이었는 지를 알아차렸다.
나는 첫 기억 속의 나에게 '엄마에게 전화 걸지 마라',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지 말고 할 일을 찾아서 해라', '엄마에게 도움이 되어주어라'라고 편지를 썼다. 6살 여자아이였던 첫 기억 속의 나에게 가장 후회되고 알려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런데 같은 수업을 듣던 동기들은 자신의 첫 기억에게 '위로' 또는 '감사'를 건네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과거의 내가 무엇을 잘못했고 무엇을 잘해야 하는 지를 알려줘야 하는 게 아니라 그 시간 속에 있는 나를 위로해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작 6살짜리 여자아이가 얼마나 더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었겠는 가. 그런데 나는 아동 심리를 배우고자 들어간 대학원에서도 나 자신을 다그치고만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날 나는 편지를 읽지 못했다. 대뜸 눈물이 터져 편지를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동기들은 지각해 늦게 들어와 놓고서는 갑자기 과몰입해서 눈물을 터트린 나를 당황스럽게 바라보았다. 나는 그곳에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정말로 나에게 그 당시 나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렇게 써 보내고 싶다.
너는 소중한 사람이야.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너를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