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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 Apr 26. 2020

생일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다.

생일은 누군가의 탄생을 축하해주는 날이다. 태어난 것만으로 축하받을 이유가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생일 축하가 뭐 대수이겠냐만은 내 존재가 세상에서 아무에게도 인정, 축하를 받지 않는다면 존재 의미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형식적인 말들을 당연하게, 굳이 쓰지 않아도 알 것이라고 생각해서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고맙다', '축하한다', '죄송하다'와 같은 단어들이다. 하지만 이 상투적인 단어 하나가 심심찮게 위로가 되고 감정적인 설득이 된다. 말이라는 것이 묘해서 안 하면 모르다가도 입 밖으로 꺼내면 그 여파가 상대방에게 전해진다. 연락을 끊고 살았던 사람이 카카오톡에서 생일인 사람 목록에 떴을 때,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내면 그 구실로 안부도 묻고 꺼졌던 관계의 불씨가 살아나는 것이다. 업무에서도 마찬가지다. 비즈니스 메일 마지막에 '감사합니다'라는 문구 하나가 알게 모르게 상대방의 마음에 호의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또 상사의 불합리한 지시나 피드백에도 우선 '죄송하다'라고 먼저 말하라는 이유도 비슷하다. '감사하다', '축하한다', '죄송하다'와 같은 단어들을 형식적으로 보일지라도 우선 쓰면 손해보는 일은 없다.

사실 나도 말 한마디가 주는 가치를 직접 겪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때는 대학생 때 교환학생 준비한다고 휴학했을 때였다. 서양화 전공을 해서 당시 학생들은 학교에 각자의 작업실이 있었다. 친한 동기들끼리는 같은 구획을 사용했다. 그 날은 내 생일이기도 하고 친구들의 근황이 궁금해서 친구들의 작업실로 놀러 갔다. 그런데 친구들이 각자 심란한 일들이 있는지 한 친구만을 제외한 다른 친구들은 내 방문에 시원찮은 반응을 보였다. 막상 가기 전에는 생일 축하를 받으면 좋고, 안 받아도 그만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홀대를 받으니 참 서운했다. 시간이 흐른 뒤에 그 날 서로 각자의 마음의 상태?를 이야기하며 오해를 풀긴 했지만 생일에 아무런 축하를 받지 않으면 어떤 기분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그때 이후로 생일인 지인이 있으면 '생일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라도 전하려고 한다. 그 말에는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축하하고 당신을 잊지 않고 있다는 메시지도 함께 담겨 있다. 불과 몇 글자 되지 않는 단어에  말이다.


2020년 4월

이번 달은 엄마의 생신이 있는 달이야. 네가 처음 엄마 생신을 챙겨주던 날이 생각나. 요리라고는 라면, 밥 정도밖에 하지 않았던 네가 그 날은 생일의 대표 메뉴인 미역국을 끓이려고 해. 인터넷으로 뒤져 미역국 레시피를 찾았어. 불린 미역을 참기름에 볶다가 맛국물을 넣고 한소끔 끓여낸 미역국이야. 좀 허전해서 계란 프라이를 부치고 밥, 김치를 올려놓아 소박한 생신 밥상을 차렸어. 엄마는 일 끝나고 늦게 왔는데도 네가 차려준 밥상을 고마워하며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워내셨어.

다음 기억나는 엄마 생신은 회갑 때야. 엄마 어깨를 으쓱하게 해주고 싶어서 언니와 돈을 모아 근사한 일식집을 예약하고, 떡케이크도 주문하고, 감사패도 만들지. 사실 그것은 회심의 묘책이기도 했어. 결국 당시에 엄마를 원하는 바대로 돌리진 못했지만 현재를 놓고 본다면 결론적으로 잘 된 일이라고 위로를 해야겠지.

그리고 올해 엄마 생신이 다시 돌아왔어. 올 해의 생신은 좀 특별해. 네 엄마 옆에는 이제 엄마를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많아졌거든. 단순히 가족뿐만이 아니라 친구, 동생, 선생님 등 그 관계의 스펙트럼이 넓어졌어. 딸로서 네가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을 이런 사람들이 채워주는 것 같아 너는 안도감이 생겨. 네 엄마는 너에게 카카오톡을 보내 이번 생일은 참 행복했다고 말해. 선물도 받고 많은 사람들이 축하해주고, 맛있는 밥도 먹고. 너는 네 엄마가 외롭지 않기를 바라잖아. 같이 먹는 사람이 없으면 대충 한 끼 때우는 네 엄마가 걱정되는 마음도 같은 이유겠지. 오늘은 주말을 맞아 평일에 제대로 축하해주지 못한 생일을 엄마가 드시고 싶어 하는 음식을 먹으며 축하할 예정이야. 생일로 함께하는 시간, 그 축하를 그대로 엄마가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네 엄마의 생일은 너에게도 잊히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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