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
간혹 찾아오는 날이 있다.
머피의 법칙으로 꽉 찬 날. 뭘 해도 안 되는 그런 날.
그런 날에 내 마음은 폭풍 전야처럼 고요하지만 언제든 장대비를 쏟아버릴 수 있는 먹구름이 가득 차여서는 울렁울렁 어지럽기도, 오히려 무념무상 해탈한 이가 되기도 한다.
며칠 전, 오랜만에 딱 그런 날과 맞닥뜨렸다.
우리 부부의 아침은 향긋하게 내려진 따듯한 드립커피와 함께 시작된다.
아마추어 바리스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나의 반쪽이 사랑을 가득 담아 내려주는 따스운 커피 한 잔을 호호 불며 오늘의 날씨를 보고 서로 무슨 옷을 입으면 좋을지 도란도란, 신문에서 본 기억에 남는 뉴스에 대해 도란도란, 주식과 코인을 확인하며 절망과 환희의 도란도란 대화가 오가는, 짧지만 하루 중 가장 행복이 응축된 시간이기도 하다.
그날 아침도 여느 아침과 다름없이 '오늘 하루 행복을 부르는 의식'이 지나고 설거지를 하는데, 갑자기 손에 힘이 탁 풀리며 너무나 아끼던 유리잔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이내 '퍽'하는 소리와 함께 싱크대 대리석 위에 와자작 부서져 내리며 소리가 닿은 모든 곳에 유리 파편이 흩날렸다.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저 멍하니 깨진 파편들을 바라보았다. 짝꿍이 아끼던 잔이었는데... 오히려 막 출근하려 등에 맨 가방을 던지고 부리나케 청소기를 들고 달려오며 "괜찮아?"를 수도 없이 외치며 내 안부만 걱정하는 그의 목소리에 울컥함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괜찮다고, 괜찮아. 늦겠다, 얼른 가. 내가 깼는데 내가 정리해야지."
괜찮음이 1도 없던 마음과는 다르게 입으로는 괜찮다며 짝꿍의 등을 떠밀었다.
뒷정리하느라 쓰인 시간만큼 출근시간이 늦어졌다.
비까지 추적거리던 날, 우산을 쓴 둥만 둥 지하철역까지 후다닥 뛰었지만 지하철역사 전광판에는 세 개역 전까지 단 한대의 열차도 보이지 않았다.
'아... 망했다.'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가방에 있던 책을 꺼내어 들었지만 하얀 건 종이 검은 건 글씨로 보일 뿐, 도저히 읽히지 않았다.
10분을 넘게 기다리고 있으니 드디어 지하철 한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그 10분 사이에 점차 늘어난 직장인 무리들에 밀려 들어간 지하철 칸은 이미 꽉 채워져 있던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로 인해 최대로 가동 중이라던 에어컨 바람을 비웃듯 습하고 더운 기운이 가득했다. 이런 상태에서 책을 읽는 건 민폐에 가까웠기에 당연히 고이 접어 가방과 함께 가슴에 품었다.
"응? 이상하네."
어렵사리 마음을 다독이며 겨우 제시간에 맞추어 도착한 사무실에 에어컨 전원이 눌리지 않는다. 가뜩이나 습하고 더운 날씨에 이제는 사무실에 에어컨이 말썽이다. 일단 자리에 있는 미니 선풍기를 돌리며 더위를 식히고 있으니 한참 뒤에야 에어컨이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축축한 기운이 조금 사그라들며 정신이 들었다.
회의도, 일도 꼬이기만 했던 하루였다. 바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곤 원래도 잘 없긴 하지만 깔끔하게 끝맺음된 일 하나 없어 찜찜하기 그지없는 기분으로 퇴근시간이 돌아왔다. 그래도 기나긴 하루 끝에 퇴근시간이 오긴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하는 나 자신의 소박함에 피식 웃음이 났던 것 같다.
미리 안도한 나 자신의 머리를 콩 쥐어박고 싶을 만큼 퇴근길 역시 험난했다.
삼각지역에서 4호선을 타러 가는데 이미 지하철 칸마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의 줄이 길었다. 원래 와야 할 시간에 4호선이 오지 않았던 거다. 그리고 난 곧 퇴근길 헬게이트가 열릴 것임을 직감했다.
한동안 열차 없이 전역과 전전역 이름만 떠있던 전광판 끄트머리에 드디어 열차 한대 그림이 퐁하고 나타났다. 하지만 이내 절망했다. 오이도행이 필요했던 나의 바람과는 달리 사당행 열차였다.
'사당행을 타고 내려서 버스를 타야 하나.'
일단 사당까지 가면서 생각해 보자며 사당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지하철 창너머로 보이는 저물녘 한강의 모습에도 감동이 일지 않았다. 사당역에서 버스를 탈지 오이도행 다음 열차를 기다려야 할지에 대한 고민만이 마음 가득 차있었던 것이다.
사당역에 도착해 보니 이미 플랫폼은 인산인해였다. 이 사람을 뚫고 출구를 나가는 것조차 쉽지 않겠다 싶어서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줄에 조용히 합류했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사당행 열차 하나를 더 보내고 나서야) 귀한 모습을 보인 오이도행 열차. 열차의 문이 열리자마자 뒷사람들에 꾹꾹 미는 통에 칸 안에 구깃구깃 들어갔다. 마음도 몸처럼 구겨졌음은 말할 나위 없고.
애지중지하던 컵도 깨고, 출근시간은 늦었고, 비는 추적거리고, 지하철 안은 옴짝달싹 못하게 사람이 많은 날. 그냥 연차 내고 집에 갈까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날 잡힌 회의들이 떠올라 출근길이라는 늪에서 한 발 한 발 무겁게 발걸음을 옮겨 도착한 사무실.
때마침(?) 고장 난 사무실 에어컨 덕분에 축축하게 보낸 오전시간.
회의에서는(내가 너 때문에 출근을 했는데...!!) 괜한 일거리만 잔뜩 떠안게 되었고, 힘겨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조차도 녹록지 않았던 하루.
'안될 놈은 안 된다.'는 말이 딱 떨어지는 그런 하루가 넘어갔으니 내일은 좀 더 좋은 일이 가득하지 않을까 하는 긍정의 빛 한 줄기로 울적한 마음을 녹이며 이불속을 파고들며 머피의 법칙으로 꽉 차 있던 하루에 마침표를 찍었다.
2025.09.08.
Ellen Y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