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방학 동안 하니와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하니가 우리 집에 자주 전화를 해 물었다.
우리 집에 놀러 올래?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할래?
떡볶이랑 튀김 만들어 먹자!
이야기, 좋아하는 것들이 서로 비슷해 만나 노는게 재밌었다.
빠른 걸음으로 집에서 10분 거리라 가방에 책, 과자, 문제집, 참고서, 잡지를 보부상처럼 어깨에 메고 놀러 가거나 하니가 우리 집에 놀러 오기도 했다.
하니 엄마는 하니 큰 언니네 집에 놀러 가는 일도 종종 있었고 교회 집사님이라 항상 바쁘셨다.
처음에 큰언니와 하니의 나이 차이가 19살이나 나고 조카가 초등학생이라는 말에 놀랐다.
한 번은 막내 언니가 " 엄마가 아니라 할머니다."라고 내 앞에서 말해 크게 혼난 적이 있다.
하긴... 한 번 잠깐 본 적 있는 큰언니가 엄마처럼 보이긴 했다.
하니와 시간을 같이 하는 횟수가 늘다 보니 하니 집 어디에 티스푼이 있는지도 알 수 있었고, 하니는 우리 아빠를 잘 아는 동네 아저씨 대하듯 너스레 농담하는 사이가 되었다.
나쁜 뜻은 없지만 말에 항상 뼈가 있는 막내 언니는 고등학교 2학년, 곧 대입 수험생이다.
하니의 말로는 입시생이라 시한폭탄, 잘못 건드리면 지뢰 뇌관이라고 했다.
" 너 또 왔니?"라고 했다가도 때로는,
" 어서 와, 이 언니가 만드신 슈크림 먹을랭?"
감정이 롤러코스터다.
그냥 그때그때 맞춰서 대답했다.
" 연아, 넌 이담에 뭐가 되고 싶냐?"
하니가 간식 가져온다고 나간 사이 막내 언니가 내게 물었다.
" 패션 디자이너요, 옷 그리는 게 멋져요. 모델들이랑 작업하는 것도."
" 에으.... 얘, 너 그거 돈 많이 든다. 미술 배우는 것도 돈 들고, 원단 찾으러 다니느라 발품 팔아야 하고. 그리고 재고 쌓이면 지옥이지."
" 와아... 언니. 잘 아네요?"
" 뭐... 비슷한 일 아빠가 했었으니까. 하니가 말 안 했냐? 우리 아빠 테일러였어."
" 네? 그거... 처음 듣네. 멋지다!"
" 멋지지. 멋지긴 한데..... 말이다..."
언니는 말끝을 흐렸다.
" 야! 박지원. 또 연이 괴롭히냐? 너 노래 연습 안 하냐? "
하니가 과자를 들고 방으로 들어와 언니에게 화를 냈다.
" 이게? 언니한테! 나간다. 나가! 과자 많이 쳐드시고 똥배나 나와라."
언니는 째려보고 나가더니 자기 방에서 피아노를 치며 발성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하나가 과자랑 보리차를 가져와 책상 위에 올려 넣았다.
" 또 시작이야. 노래도 연습 안 하면서. 심한 말 안 했니? "
" 아니.. 근데 하니야, 너네 아빠 양복 만드셔?"
" 아? 아! 나 어렸을 때. 양복점 하셨어. 명동에서."
" 우와, 멋져! "
" 그래? 난 기억이 없어."
" 네가 너무 어려서 그렇지..."
" 가끔 아빠 기억이 잘 안 날 때가 있어."
" 응? 그게 무슨 소리야?"
"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겨울에 동맥경화로 갑자기 돌아가셨어. 그런데, 가끔 아빠가 기억이 안 날 때가 있다?"
난 과자를 입에 넣은 채 씹지도 삼키지도 못했다.
아무 말도 못 했다.
달콤 짭조름한 과자를 씹어가며 아빠의 이야기를 도저히 귀로 삼켜 담을 수 없었다.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물어본 적이 몇 번 있었만 이 아이는 그 말을 한 번도 해주지 않았다.
목이 멘다.
" 왜, 말 안했.. 니... 난 그것도 모르고..."
" 그냥.... 아빠 돌아가신 거 자랑거리도 아니고."
하니는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의 스트레스 때문인지 무엇이 원인인지 모르지만 쓰러지신 채 돌아가셨단다.
주택에서 살던 때, 눈이 갑자기 많이 내리기 시작한 날, 하니가 마당에서 혼자 놀다가 언니들한테 눈 온다고 말하려 했단다.
갑자기 안에서 엄마와 언니들이 아빠를 계속 부르고 울부짖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 모르는 아저씨들이 신발 신은채 집안으로 뛰어들어 오고, 구급차의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에 놀라 거실 구석에 서 있었단다.
누군가가 아빠 있는 곳을 보지 못하게 하였고, 누군가가 아빠는 더 이상 병원으로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고.....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 연아 울지 마. 나도 이젠 안 우는데..."
미안했다.
그냥.. 모든 게.
하니의 아빠가 안 계신 줄도 모르고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가 많았다.
" 있잖아, 어제 아빠가 밤 12시 넘게 돌아오셨어. 술이 엄청 취해서. 그러더니 용돈 만원을 줬다?"
" 와... 그래?"
" 그런데 아침에 학교 가려는데, 어제 준 만원, 이 오천 원 하고 바꾸자 하는 거야. 무슨 용돈을 바꾸냐? 한번 주면 끝이지..."
" 하하하, 재밌다."
그때 하니는 웃기는 했지만 더 이상 말이 없었었다.
" 미안해. 내가 모르고 아빠 얘기해서..."
나는 끅끅 울음 섞인 말을 억누르며 했다.
" 아빠가 그런다고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뭐..."
티슈 박스를 주면서 하니도 눈물을 닦았다.
" 니들 뭐 하냐? 우냐? 참나....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 뭐, 애들은 싸우면서 커가는 거라지만 말이다. 야! 나 매운 게 땡긴다. 쫄면 만들어 먹을 건데 나와 도와라."
막내 언니는 인기척도 없이 어느새 방에 들어와 서 있었다.
이 무미 건조한 언니는 도대체....
위의 세명의 천사 같은 언니들과 달리 외계인처럼 구는 막내언니 때문에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중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고 언제부터인가, 하니네 거실에 있던 하니 아빠의 사진이 안 보였다.
가족사진도 안 놓여 있었다.
나중에 막내 언니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사진이 놓여있던 자리에는 작은 꽃병에 생화(生花)가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