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가자
#15. 이야기 열다섯, 아빠의 자리
겨울 방학 동안 하니와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하니가 우리 집에 자주 전화를 해 물었다.
우리 집에 놀러 올래?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할래?
떡볶이랑 튀김 만들어 먹자, 올래?
이야기, 좋아하는 것들이 서로 비슷해 만나 노는 게 재밌었다.
빠른 걸음으로 집에서 10분 거리라 가방에 책, 과자, 문제집, 참고서, 잡지를 보부상처럼 어깨에 메고 놀러 가거나 하니가 우리 집에 놀러 오기도 했다.
하니 엄마는 하니 큰 언니네 집에 놀러 가는 일도 종종 있었고 교회 집사님이라 항상 바쁘셨다.
처음에 큰언니와 하니의 나이 차이가 19살이나 나고 조카가 초등학생이라는 말에 놀랐다.
한 번은 막내 언니가 " 엄마가 아니라 할머니다."라고 내 앞에서 말해 크게 혼난 적이 있다.
한 번 잠깐 본 적 있는 큰언니가 엄마처럼 보이긴 했다.
하니와 시간을 같이 하는 횟수가 늘다 보니 하니 집 어디에 티스푼이 있는지도 알 수 있었고, 하니는 우리 아빠를 잘 아는 동네 아저씨 대하듯 너스레 농담하는 사이가 되었다.
나쁜 뜻은 없지만 말에 항상 뼈가 있는 막내 언니는 고등학교 2학년, 곧 대입 수험생이다.
하니의 말로는 입시생이라 시한폭탄, 잘못 건드리면 지뢰 뇌관이라고 했다.
" 너 또 왔니?"라고 했다가도 때로는,
" 어서 와, 이 언니가 만드신 슈크림 먹을랭?"
감정이 롤러코스터다.
그냥 그때그때 맞춰서 대답했다.
하루는 막내 언니가, " 연아, 넌 이담에 뭐가 되고 싶냐?" 하며 물었다.
" 패션 디자이너요, 옷 그리는 게 멋져요. 모델들이랑 작업하는 것도."
" 에으.... 얘, 너 그거 돈 많이 든다. 미술 배우는 것도 돈 들고, 원단 찾으러 다니느라 발품 팔아야 하고. 그리고 재고 쌓이면 지옥이지."
" 오... 언니. 잘 아네요?"
" 뭐... 비슷한 일 아빠가 했었으니까. 하니가 말 안 했냐? 우리 아빠 테일러였어."
" 네? 그거... 처음 듣네. 멋지다!"
" 멋지지. 멋지긴 한데..... 말이다..."
언니는 말끝을 흐렸다.
" 야! 박지원. 너 또 연이 괴롭히냐? 노래 연습 안 하냐? "
하니가 과자를 들고 방으로 들어와 언니에게 화를 냈다.
" 이게? 언니한테! 나간다. 나가! 과자 많이 쳐드시고 똥배나 나와라."
언니는 째려보고 나가더니 자기 방에서 피아노를 치며 발성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하나가 과자랑 보리차를 가져와 책상 위에 올려 넣았다.
" 또 시작이야. 노래도 연습 안 하면서. 심한 말 안 했니? "
" 아니.. 근데 하니야, 너네 아빠 양복 만드셔?"
" 아? 아! 나 어렸을 때. 양복점 하셨어. 명동에서."
" 우와, 멋져! "
" 그래? 난 기억이 없어."
" 네가 너무 어려서 그렇지..."
" 가끔 아빠 기억이 잘 안 날 때가 있어."
" 응? 그게 무슨 소리야?"
"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동맥경화로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가끔 아빠가 기억이 안 날 때가 있다?"
난 과자를 입에 넣은 채 씹지도 삼키지도 못했다.
아무 말도 못 했다.
달콤 짭조름한 과자를 씹어가며 아빠의 이야기를 도저히 귀로 삼켜 담을 수 없었다.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물어본 적이 몇 번 있었만 이 아이는 그 말을 한 번도 해주지 않았다.
목이 멘다.
" 왜, 말 안했.. 니... 난 그것도 모르고..."
" 그냥.... 아빠 돌아가신 거 자랑거리도 아니고."
하니는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의 스트레스 때문인지 무엇이 원인인지 모르지만 쓰러지신 채 돌아가셨단다.
주택에서 살던 때, 눈이 갑자기 많이 내리기 시작한날.
마당에서 혼자 놀다가 언니들한테 눈 온다고 말하려 했단다.
갑자기 안에서 엄마와 언니들이 아빠를 계속 부르고 울부짖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 모르는 아저씨들이 신발 신은채 집안으로 뛰어들어 오고.
구급차의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에 놀라 거실 구석에 서 있었단다.
누군가가 아빠 있는 곳을 보지 못하게 하였고,
누군가가 아빠는 더 이상 병원으로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고.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 연아 울지 마. 나도 이젠 안 우는데..."
미안했다.
그냥.. 모든 게.
하니의 아빠가 안 계신 줄도 모르고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가 많았다.
" 있잖아, 어제 아빠가 밤 12시 넘게 돌아오셨어. 술이 엄청 취해서. 그러더니 용돈 만원을 줬다?"
" 와... 그래?"
" 그런데 아침에 학교 가려는데, 어제 준 만원, 이 오천 원 하고 바꾸자 하는 거야. 무슨 용돈을 바꾸냐? 한번 주면 끝이지..."
" 하하하, 재밌다."
그때 하니는 웃기는 했지만 더 이상 말이 없었었다.
" 미안해. 내가 모르고 아빠 얘기해서..."
나는 끅끅 울음 섞인 말을 억누르며 했다.
" 아빠가 그런다고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뭐..."
티슈 박스를 주면서 하니도 눈물을 닦았다.
" 니들 뭐 하냐? 우냐? 참나....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 뭐, 애들은 싸우면서 커가는 거라지만 말이다. 야! 나 매운 게 땡긴다. 쫄면 만들어 먹을 건데 나와 도와라."
막내 언니는 인기척도 없이 어느새 방에 들어와 서 있었다.
이 무미 건조한 언니는 도대체....
위의 세명의 천사 같은 언니들과 달리 외계인처럼 구는 막내언니 때문에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중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고 언제부터인가, 하니네 거실에 있던 하니 아빠의 사진이 안 보였다.
가족사진도 안 놓여 있었다.
나중에 막내 언니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사진이 놓여있던 자리에는 작은 꽃병에 생화(生花)가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