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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청년 Dec 14. 2024

518 계엄, 10살이던 나도 두려웠다.

123 계엄,  518 계엄에서 얻은 각본인가?

난, 1980. 518 계엄 때 10살 어린이였다.

광주에서는 멀찌감치 떨어진 시골에 살고 있었다.

등교하지 않고 집에 있었는데 구체적인 이유는 몰랐다.

알려줘도 이해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뭔가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낄 뿐이었다.

대문 밖도 못 나갔다.

따뜻한 아랫목 이불속이 지하 벙커처럼 안전하고 포근했다.


내가 어른들로부터 주워들은 소식은

사람들이 많이 죽고 있다.

도로에 죽은 사람들이 즐비하고 피바다가 따로 없다.  

잠자다가 총 맞아 죽은 사람도 있다.

우리 동네까지도 군인들이 올 수 있다. 



사실 북한군이 쳐들어와 전쟁 난 줄 알았다.

그 당시 내게 익숙한 단어는

'삐라, 반공방첩, 간첩, 김일성, 북한 괴뢰군' 등 북한과 관련된 단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북한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알았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현실을 알게 되었다.


정치 야욕에 잡음과 저항이 많은 광주가 희생된 것이었음을.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외침이 시작된 뿌리가 광주였음을.

 

20세 때부터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1990년대다.

서울 친구의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광주사태 이야기는 이제 듣기만 해도 지겨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광주사태를 알리기 위해

피켓을 들고 혹은 벽보판을 이용해 사실을 전파하는 중이었을 것이다.

자주 접하다 보니 지겨웠나 보다.

그렇다 해도 내 기분은 나빴다. 지금도 그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음이 증거다.


종로를 걷다 보면 2가지를 쉽게 접했다.

첫 번째는 불법 음원인 카세트테이프를 파는 리어카였고

다른 하나는 비참한 광주사태 참상 사진을 전시하고 알리는 사람들이었다.

난 전시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했다.

친구가 지겹다고 했던 말에 나 스스로 위축이 되었고,

게다가 광주사태와 관련이 있는 그 지역 사람이라는 이유가

나를 소극적이게 만들었다.


"지겨워" 이 말은 잊히지 않는다.

누구에겐 반복되어 듣기 식상한 스토리지만

직접 경험한 사람들에겐 평생을 토해내도 희석되지 않는 쓰디쓴 약이다.   

아무것도 모르던 10살 아이의 기억도 저릿한데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 현장에 참여한 사람들, 현장 희생자의 가족들에겐

결코 치유되지 않을 뼈아픈 역사다. 


2024. 123 계엄은

그 잔인했던 5.18 계엄의 감정을 들쑤시는 기폭제가 되었다.

위기일수록 강하게 뭉치는 우리 국민의 정서를 모르다니.

5.18은 광주에 국한됐지만

12.3은 전국 아니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음을 모르다니.


5.18 계엄의 승리만을 기억하는 게 틀림없다.

다수의 국민이 기억하는 계엄은

슬픔이고 아픔이라는 것을 모르는 게 틀림없다.

바보라더니 진짜 바보임에 틀림없다.


다시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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