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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녁 Oct 18. 2023

#17 회사생활과 헤어질 결심, 그리고 새로운 시작

자유분방한 성격의 내가 보수적인 회사에 입사하고 연고가 없는 타지생활을 오래 지내면서 돈을 버는 행위가 어떠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외로움을 모르고 지냈던 나는 전주에서 외롭다는 감정을 새로이 정의하게 되었다. 비록 못생겼더라도 나만의 모양이 있던 모난 돌은 그들이 세운 네모 반듯한 프레임에 억지로 끼워 맞춰지며 둥글게 갈려 개성을 잃고 말았다. 돈으로 자유로워지고자 했던 나는 오히려 주체적인 삶을 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비교하고, 질투하고, 원망하고, 좌절하는 그야말로 미생이 되어버린 나는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 길을 잃은 듯했다.


수십 번도 퇴사를 고민했다. 그러나 돈 앞에 장사 없다더니. 반항심만으로 저지르기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상황이 안정되고 있었다. 그냥 회사로부터 도망칠 생각만 했을 뿐, 또 다른 ‘자유’를 꿈꾸지만 돈이 주는 자유를 결코 무시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인지 나는 늘 퇴사를 입에 달고 사는 앵무새였다. 용기는 없으면서 비겁하기만 했다. 그렇게 4년도 넘게 지방생활을 이어갔다. 어느새 익숙해졌고, 살만해졌다. 그러던 내가 꿈을 다시 고민하며 진심으로 회사와 헤어질 결심 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었다.



인사발령이 있는 3월의 어느 날이었다. 소문만 무성했던 장기 근속자들에게 회사는 권고사직을 던졌다. 회사가 직원에게 이별을 고하는 순간이 너무나 잔혹하게 느껴졌다. 최소 십 년 이상 근무하며 월급으로 영위했을 그들에게 직장은 돈 버는 곳 그 이상의 무언가였을 테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만두어야 할 것임을 이미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사전고지를 했더라도 삶의 터전으로부터 하루아침에 쫓겨나게 되면 그야말로 벌거벗은 갓난아기와 같지 않은가. 어떤 임원은 권고사직 이야기가 나오고서부터 창업을 알아보고는 퇴직과 동시에 사장님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그가 과연 얼마나 오래 준비했을지는 미지수였다.


이를 보고는 수많은 선배들은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더욱 열심히 해서 진급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누군가는 그만두면 뭐라도 해야 하는데 육아니 회사니 쉴틈도 없는데 또 뭘 하는 건 역부족이라고 하소연했다. 누군가는 좀 더 안정적인 직장으로 이직을 고민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회사 밖으로 내동댕이 처지지 않기 위해 더욱 치열하게 살아야 하고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니. '그러다 잘리면 치킨집이나 차려야지 뭐'라는 그들의 냉소 섞인 말이 나는 전혀 우습지 않았다. 그 쿨해보이는 멘트에는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불안함이 뒤섞여있기 때문이다.


그럼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나도 십 년쯤 회사 다니면 회사가 이별을 고하려 들지 않을까. 불행 중 다행으로 나는 한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며 정년까지 다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승승장구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음은 진즉 알고 있었다. 신입 때부터 나를 갈구었던 임원이 이미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는 와중에 일개 직원 나부랭이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기는 것뿐이었고, 그렇다고 해서 인정받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이직을 고민해 보아도 전문직이 아닌 일반 사무직이기 때문에 어느 회사건 그 밥에 그 나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나는 그렇게 이직을 반복하며 치열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별다른 생각 없이 돈만 벌며 지냈던 내가 갑자기 이런 생각에 빠져들게 되다니. 나는 위기를 느끼면 조급해지는 편이다. 무언가 방법이 필요해 보였다. 회사에서의 반복적인 삶에서 벗어나 어떤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그런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회사가 나에게 이별을 고하기 전에, 오히려 내가 먼저 회사'생활'에 진심으로 이별을 고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서는 아직 회사에 신세 지고 있는 지금 이때, 판을 별려야겠다고 다짐했다.


다른 일을 하기 위해 회사에서 기생충처럼 빨아먹다가 탈출하는 계획. 누가 들으면 영 고까운 일이 아닐 수 없겠지만, 나에게는 생각만으로도 짜릿했다. 저렇게 허무하게 버림받을 수만은 없지, 암.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헤어질 결심은 했지만 아직 헤어질 순 없다. 헤어질 준비가 될 때까지 회사는 나에게 에너지 즉, 돈을 주어야 한다. 회사 돈으로 회사와 헤어질 준비를 한다. 월급은 일종의 캐시카우 역할을 해주는 셈이다.


이쯤 되니 회사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는 워라밸이 되었다. 헤어질 준비를 하는 동안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너무 튀지도, 너무 못나지도 않게 적당히 회사를 다니고 싶어졌다. 결코 일을 대충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얼른 할 일을 마무리하지 않으면 헤어질 준비를 못하게 된다. 그래도 너무 빨리 해버리면 업무가 과중될 수 있으니 나만의 템포로 그야말로 '적당히' 업무를 쳐낸다. 혹시라도 워라밸이 무너진다면 더 워라밸이 좋은 회사로, 혹은 근무시간이 더 적은 일자리로 이직할 수도 있다. 회사생활과 헤어지기로 마음먹은 마당에 돈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회사생활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겠다는 의지가 틀어지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다.


회사생활과 헤어질 결심. 좋다. 그런데 그걸 안 하면 무얼 할 텐가? 회사가 이별을 고하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 치려면 내가 나가서도 지금 수준의 돈, 혹은 그 이상을 벌 궁리를 충분히 세워두지 않으면 안 됐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사업을 고민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디어가 발상한 배경에는 코로나가 큰 역할을 해주었다. 코로나와 저금리, 그리고 주식과 코인 열풍은 내가 어떤 무언가라도 해야 할 것처럼 만들었다. 코로나 초기 아내와 내가 연달아 처음으로 재택근무를 하게 되면서 내가 하는 일의 단순함과 무료함을 깨닫게 되었고, 회사생활과 이별을 하기 위한 다른 일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처음에는 그게 주식인 줄 알았다. 본업과 주식을 겸하는 건 K-직장인의 클리셰니까. 한데, 그걸 평생 잘할 자신이 없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팔랑귀에 인내심도 없기에 투자자로서는 최악의 인간이다. 그런 거 말고, 더욱 노동집약적인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온라인 부업을 시작했다. 단순 위탁판매에 아주 소소한 수준이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나와 아내의 취향이 잔뜩 들어간 작은 공간도 개업해 운영했다. 이른바 'N잡러'가 된 셈이다. 회사원에 그치지 않고 나만의 일을 한다는 행위 자체에서 엄청난 자유를 느꼈고 잠시나마 사장님이 된 듯한 쾌감마저 주었다.


그렇게 회사를 다니며 내 일을 2년간 병행했다. 이상하게도 인사고과는 더 좋게 받았다. 빨리 퇴근하고 내 일을 해야 되니 부지런할 수밖에 없어서였을까. 나는 야근을 절대적으로 피했다. 운이 좋게도 회사는 비용 절감 때문인지 야근을 지양하라는 지침이 있었는데 그래서 업무를 미루지 않고 칼퇴를 했다. 재택근무를 적극 활용해서 내 일과 회사일을 동시에 처리했다. 몸은 좀 힘들었지만 마음이 고되진 않았다.


공간을 운영하고 위탁판매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의 취향을 고민하게 됐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내가 근본적으로 좋아했던 것이 무엇인지 질문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술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술을 통해 누군가와 소통하며 즐거움을 느끼는 나는 곧바로 술을 기반으로 한 오프라인 모임을 열게 되었다. 술과 책, 술과 음악, 술과 음식... 취향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곤 했다.


지루했던 회사 일에도 새로운 시야가 트였다. 각종 세금 신고가 필요했기에 비용처리에 관한 업무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배워야 했다. 마침 월결산이 도래하면 매번 반복적으로 비용처리를 하곤 했는데, 그동안 건조하게 기계처럼 했던 일들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래서 이걸 했구나, 저래서 저랬던 거구나! 완벽히 내용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무의미했던 일들이 유의미해지기 시작했다.


회사로부터 떨어져 진정 나를 돌아볼 계기가 마련된 건 회사생활과 헤어지겠다는 작은 일탈에서 발생했다. 그 일탈은 나에게 있어 단순히 돈을 버는 부업이 아니라 오히려 꿈을 위한 여정에 가까웠다. 회사일로부터 벗어나 진정 내가 무얼 좋아하고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싶은지를 고민할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절대 회사는 나를 책임져주지 않는다. 이 새로운 자극들은 내가 회사와 떨어져도 살 수 있겠다는 용기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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