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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녁 Oct 19. 2023

#19 좋아하는 마음과 열정만으로도 충분해. 괜찮아.

결국 영국으로 떠나와 아내와 일 년 살이에 도전하고 있다. 첫 한 달을 살며 크게 느꼈던 점을 하나 공유하며 긴 글을 마치려고 한다. 혹시라도 긴 글을 읽어주신 분이 계시다면 부족한 글에도 함께 해주셔서 감사의 인사드립니다. 



영국에 있으면서 크게 느낀 점, 그동안 참 남들 눈치 많이 보며 살았다.


우리 누나의 말이, 삼 남매 중 막둥이인 내가 어려서부터 집안의 복잡한 서열관계 속에 생존하려면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했다. 막둥이니까 이쁨 받으며 자랐지만, 그렇다고 형제들의 질투까지 온전히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다. 온 가족이 다 좋아할 수 있는 행동이 무엇일까 본능적으로 생각하다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던 것 같다. '준혁이 저 놈 아주 얄미워 죽겠어' 싶다가도 정성껏 만든 카레나, 떡볶이, 라면을 대령하면 '그래도 얘가 요리는 잘해'하며 인정해 주니까. 그러다 보니 욕심이 생겼던 모양이다. 이왕 하는 거 잘 만들어서 칭찬받으면 날아갈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 '눈치껏 내가 잘 해내면 모두가 날 칭찬하고 미워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작은 씨앗이 내재되었나 보다.


그 성향으로 인해 한편으로 나의 취미나 흥미에 너무나 높은 잣대를 두는 부작용이 생겼다. ‘좋아한다=잘한다’가 되어버린 것이다. 가까운 사람들의 말로는, 나는 취향과 캐릭터가 아주 분명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정작 나는 모호한 취향을 가진 애매한 인간이라며 스스로를 깎아내리곤 했다. 좋아하는 걸 잘 해내야, 전문가가 되어야 모두가 날 칭찬하고 예뻐할 테니까. 말 못 할 중압감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축구를 예로 들면, 아주 오랜 취미이지만 남들 보기에 나는 영 허접한 수준이다. 그러니 어디 가서는 축구가 취미라는 말도 못 꺼냈다. '아, 오늘 잘해야 친구들이 좋아해 줄텐데!'라는 생각에 열심히 하지만, 안타깝게도 축구는 실수의 스포츠 아니던가. 실수해서 안 그래도 열심히 자책하는 도중에 팀원들의 질타가 덩달아 들리면 나는 성난 인간이 되어버리곤 했다. 뛰는 순간을 즐기고, 실수해서 욕 좀 먹어도 헤벌레 하는 돌부처 마인드를 배웠어야 했는데 삼십이 넘도록 여전히 갖지 못했다.


다른 취미나 취향도 비슷한 과정을 보였다. 대학 생활이 너무 좋았지만 잘해야겠다는 마음에 일을 그르치고 자책하며 쓸쓸하게 돌아섰다. 전주에서 들어간 축구동호회에서는 적응에 실패했다. 술에 있어서도 있지도 않은 전문성을 보여주기에 급급해 테이스팅 노트를 거짓으로 꾸며낸 적도 있었다. 비교와 질투로 얼룩진 나날들이 어쩐지 안쓰러워졌다. 잘하는 게 없으니 나는 좋아하는 게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나는 왜 이토록 꼬였을까.


영국, 아니 서구권 문화에 스며들고자 발버둥 친 첫 한 달은 위로를 받는 시간이었다. 잘하지 못하더라도, 정량적인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로도 충분해 보였다.


장모님이 물려주신 오래된 DSLR을 들고 와서는 기록을 위해 이것저것 찍고 다니곤 한다. 그런 나를 보고 호스텔 주인은 '어, 너 포토그래퍼니?'라고 물었다. 그러자 나는 TMI를 남발하기 시작했다.


'아뇨, 저는 쌩 뉴비고요. 디자인도 모르고요. 배운 적도 없어요. 그냥 풍경이, 계절이 이뻐서 마음 가는 대로 찍어요. 그리곤 인스타에 올려요'


'오, 그럼 포토그래퍼네. 나중에 인스타 알려줘. 구경할게'


.

.


응? 내가 포토그래퍼? 포토그래퍼면 훨씬 잘해야 되는데 내가 들어도 되는 말인가? 듣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사진만 좋아해도 포토그래퍼가 될 수도 있구나! 아무렴 남들이 나를 허접이라고 해도 내가 사진 찍는 걸 좋아하니 스스로를 포토그래퍼라 칭해도 눈치 볼 필요가 전혀 없는 거구나. 그런 사례가 참 많은 동네다. 음악을 너무 좋아해서 사운드클라우드에 작업물 좀 올리고 레코드샵도 종종 다니면서 가끔 버스킹도하면 뮤지션이구나! 그런 식이다.


진정한 '덕후'는 뚜렷한 취향과 일관된 취미활동, 그리고 전문성까지 더해져야 만인의 인정을 받으며 거듭나는 것이라 생각해 왔다. 어쩌면 이 또한 남 눈치만 챙기는 내 오랜 습관에 기인한 것일지 모른다. 부족하면 또 어떠한가! 잘 모르더라도, 돈이 없어 하이엔드를 경험하지 못하더라도, 좋아하는 마음과 열정! 그것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한 포인트다.


그러니 내 닉네임을 생각하며 자기 고찰부터 다시 해보아야겠다.


"저는 10년째 자연발효 중인 맥덕입니다. 축농증으로 한쪽 코는 거의 맡지 못하는 둔감한 후각을 가졌지요. 맛 표현도 잘 못합니다. 신상을 재빨리 마셔보는 민첩함도 없어요. 조금 궁색한 편이라 술을 모으는 것도 잘 못합니다. 그럼에도 조금은 숙성이 됐는지 꽤나 취향은 뚜렷해졌어요. 취향 따라 마시면서 책도 뒤져보고 구글링도 하면서 열심히 즐기려고 하고 있어요!"


실패했지만, 뭐 어때. 다시 하면 되는걸.


-나는 실패한 맥덕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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