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일 년간 학업을 쉬면서 돈을 벌었다. 거의 없다시피 살다가 통장에 몇십 만원씩 따박따박 들어오는 재미가 쏠쏠했다. 분명 돈을 버는 행위는 나에게 자유로움을 가져다주었다. 우선 일상적으로 밥을 먹는 퀄리티가 달라졌다. 가난한 대학생이 없는 형편에 한 끼 만원이 넘는 밥을 매일 먹는 건 꿈에도 꿀 수 없었다. 거의 대부분은 이천 원짜리 학식으로 때웠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학우들이 싸게 파는 저렴한 식권을 사려고 중고 커뮤니티를 늘 들여다보곤 했다. 그러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나니까 비싼 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 혼자서 닭 한 마리 시켜서 다 먹을 수 있게 됐다. 먹고 싶은 걸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건 분명 돈이 나를 자유롭게 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동안 소심하게 마셔야만 했던 맥주 또한 고민 없이 사 마실 수 있게 됐다. 신상 맥주가 들어왔다고? 그럼 사 마시면 되지! 지체 없이 매장을 향해 가격이 얼마든 일단 사 마시고 본다. 돈 벌고, 비싼 밥 먹고, 돈 벌고, 맥주 마시고... 돈이 부족해? 그러면 또 벌면 되지! 진즉 돈을 벌어야 했다고 자책했다. 부모님 손도 덜 벌리고, 내가 하고 싶은 것도 하고. 이렇게 좋은 걸 왜 그동안 안 하면서 궁색하게 살았을까.
돈쓰기는 한 번 물꼬가 트이고 나자 손 쓸 틈도 없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욕망이 넘실대기 시작했다. 그동안 못해봤던 비싼 맥주를 마시는 호사를 누리고 싶어졌다. 한 병에 십만 원이 호가하는 맥주도 사서 마시고 SNS에 자랑하니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한 달 백만 원도 채 안 되는 돈에 한 병에 십만 원 하는 맥주는 그야말로 대형 사치였다. 그 맥주를 사 마시면 다시 비루한 학식으로 때워야 했음에도 개의치 않았다. 점점 맥주를 보는 눈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고가의 맥주를 사 마실 정도가 되니까 이제는 만 원 아래의 일반적인 크래프트 맥주들이 눈에 크게 들어오지 않았다.
‘쟤네들은 아무 때나 마실 수 있는 거니까 비싼 걸 먹어야 해’
아르바이트 이전 같았으면 한 병에 오천 원 안팎의 맥주들도 심층 탐구 대상이었다. 비교적 흔한 세계맥주여도 국산 맥주보다는 비싸니까 어떻게든 자세하게 정보를 찾아 정성껏 리뷰를 남기려고 노력했을 거다. 이 맥주를 양조한 브루어리는 어떤 역사와 이야기가 숨어져 있는지. 어떤 스타일이고, 어떤 재료로 만들었는지. 알아보는 것 자체가 시간 가는 줄 모르는 큰 재미이자 놀이였다.
그런데 어느새부턴가 나는 또 오만해지기 시작했다. 가격에 비례해서 맥주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세계맥주는 질리기 시작했는지 어지간한 맥주는 그냥 벌컥벌컥 마셔 버렸다. 귀한 술도 아닌데 귀찮게 찾아볼 필요도 없었다. 리뷰는커녕 사진도 귀찮아서 안 찍기 시작했다. 가격도 싼 데 어차피 또 사 마시면 되니까. 국내 크래프트 맥주도 비교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늘 이들을 마시며 같잖은 품평을 늘어놓곤 했다.
‘이만한 품질에 이 가격이면 해외 크래프트 맥주가 훨씬 낫다. 무슨 생각으로 이 맛을 이 가격에 받고 파는 거지?’
조금 비싼 것 좀 마셔봤다고 뻐기는 스노비즘일 뿐, 가격이 싸다고 품질마저 낮은 건 결코 아니다. 수입이라고 더 맛이 좋거나, 국산이라고 맛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뻐기는 걸 두고 이제야 진짜 맥주 취미를 하고 있다며 착각하고 말았다. 외산의 더 비싸고 좋은 술을 마시는 게 진짜 취미구나. 어차피 싼 건 다 그 밥에 그 나물이니까 진짜 취미를 영위하려면 비싼 걸 마셔야 되는구나. 그러려면 돈이 더 필요했다. 결국 나는 취미를 왜곡하고 말았다
점점 마시고 싶은 건 많아졌지만 돈은 점점 한계에 달했다. 지금보다 더 많은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빨리 취업을 해서 성난 욕망을 채워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취업하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돈이 주어질 테니 그 돈이라면 지금보다 몇 배는 양질의 생활을 영위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복학하고 곧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이왕이면 돈을 더 많이 주는 회사가 낫겠다 싶어 큰 회사들을 추렸다. 식품 전공을 살려 전략적으로 식품 제조업체에만 지원서를 몽땅 넣었다. 그리고는 복학 후 반년 만에 우유 회사에 취업하게 되었다. 우유 회사를 선택한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심지어 나는 유당불내증이라 어려서부터 우유를 즐겨본 적도 없다. 아무렴 돈만 준다면야 이만한 회사가 어디겠는가.
취업하고 첫 월급이 들어왔을 때 한 달 열심히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의 몇 배가 되는 돈이 한 번에 통장에 찍히는 것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이 돈이면 십만 원짜리 맥주가 도대체 몇 병인가- 그동안 못 먹고 못 마시며 서러웠던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비록 맥주 양조의 일은 아니지만, 어찌 됐던 일을 하게 됐으니 그걸로 만족했다. 무엇보다 앞으로 훨씬 높은 차원의 취미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나의 믿음은 거짓말같이 신기루처럼 삽시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다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