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주녁 Oct 04. 2023

#14 돈을 벌자. 취미랑은 별개로.

'맥주는 나의 길이 아니구나'


어쩌다 보니 잡지사에서도 미움받는 신세가 되어버렸고, 양조사가 될 수 있다는 말에 덜컥 그만두었으나 그마저도 잘 풀리지 않아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가뜩이나 휘청거리던 마음에 어퍼컷 두 방 씨게 얻어맞으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지금이야말로 잠깐 쉴 때로구나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취미로 시작한 맥주가 몸과 마음을 이렇게 지치게 만들 줄이야. 그 잘난 ‘전문성’에 집착한 나머지 맥주가 취미인 모든 다른 사람들을 경쟁상대로 생각하며 스스로를 과도하게 몰아넣었다. 맥주를 경쟁적으로 마신다는 건 생각보다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다. 수입사의 신상 소식에 줄곧 안테나를 세워야 하고, 남들보다 먼저 후기를 작성해서 ‘맥’리어답터가 되어야 한다. 남보다 더 맥주 지식이 월등해야 하므로 맥주 배워보겠다고 이중전공까지 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이공계 공부마저 억지로 계속해야 하는데, 어쩐지 그런 자신이 너무도 대견스러워서 나를 계속 추켜세우지 안되었다. 주객이 전도된 노릇이다. 


덕분에 평소에도 너무 예민했던 나머지 학교에서는 걸핏하면 툴툴대고 표정도 별로인 영 못난 선배가 되어버렸다. 그런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 친구들도 미웠고, 나를 빌런으로 몰아세우는 후배들도 싫었으며, 꾸준하게 이방인 취급받는 이중전공 학부생 신세도 진절머리가 났다. 어쩐지 학교가 싫어졌다. 지체 없이 바로 휴학신청을 했다. 아무 계획도 없이.


웃긴 건 그렇게 열불 나는 상황에서도 맥주 마시는 버릇은 못 고치더라는 거다. 휴학을 했어도 늘 다니던 이태원을 다녔다. 신상맥주 소식이 들리는 탭룸은 어김없이 들렀다. 하지만 마음이 예전 같지는 않았다. 맛있는 맥주를 마시는 건 좋지만 다시금 착잡해졌다. 짧은 시간 동안 맥주에 진심인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만났던 탓일까. 내가 최고가 될 수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왜인지 포기하고 싶어졌다. 나는 그들보다 맥주를 아는 게 없고, 만들어본 적도 없고, 많이 마셔보지도 않았고, 맥주 여행도, 뭣도 안 해봤어. 돈도 없고. 불쌍한 내 처지야.


그래- 

돈이 문제구나.


경쟁에서 밀리는 이유를 돈 탓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돈이 해결책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돈을 벌기 시작하면 취미에 좀 더 적극적으로 덤비지 않을까. 가난한 대학생에게 허락된 맥주는 그리 범위가 넓지 않았다. 용돈도 거의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리저리 잡일을 하거나 중고품을 팔며 푼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맥주를 마셨기 때문에 비싼 맥주들은 엄두도 나지 않았다. 사실 돈이 없어서 남들은 다 가는 해외여행 한 번 가지 못했다. 교환학생이니, 유학이니, 유럽여행이니 주변에 외국을 나가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부러운 내색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충분히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강한 척했다. 사실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나도 외국에 나가서 맥주 브루어리를 다니며 마셔보고 경험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나이 든 부모님께 손을 벌리고 싶지 않았다. 그냥 참는 게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니 돈을 벌자고 생각했다. 돈을 벌면서 하고 싶은 걸 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빠른 취업을 해야 하는데, 스펙이 너무 없으니 이왕이면 직무와 관련도 있고 경험도 쌓을 수 있는 일을 해보기 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와 대외활동을 알아봤다. 이미 진즉 덕업일치의 신뢰감이 바닥난 터라 전혀 관련이 없는 분야로 알아보았다. 그렇게 백화점 푸드코트에서 아이스크림 파는 점포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는 유명 기업의 서포터즈에 합격해서 대외활동을 하게 되었다. 본의 아니게 아르바이트와 서포터즈 모두 유명 기업의 소속이었다. 급여와 활동비를 더해도 아주 소소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전보다는 훨씬 넉넉한 상황이었다. 여전히 여행을 가는 건 어려운 수준이지만, 적어도 이 돈이라면 돈이 없어 못 마시는 서러움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일은 일대로, 취미는 취미대로 즐기는 게 좋아 보였다. 생전 처음으로 아이스크림을 뽑아보기도 했고, 커피를 내려보기도 했다. 은근 소질이 있었는지 점장님도, 손님들도 칭찬해 주니 기분이 좋았다. 대외활동에서도 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지고 나서는 여러 방면으로 나를 잘 알아봐 주었다. 나중에 잘하면 이 기업에 입사할 수 있을 거니 더 노력을 하라는 말을 들으니 뭔가 실마리가 풀리는 듯했다. 맥주가 아니어도 일이 재밌을 수 있음을 모르며 살았구나.


그러면서 동시에 맥주를 즐기는 일에도 활력을 찾기 시작했다. 다시 처음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즐기려고 했다. 마음을 조금 내려두니 좀 더 솔직해졌다. ‘맥주는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꿈이 지워지기 시작했던 게. 


- 다음 계속. 


이전 13화 #13 덕업일치에 실패한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