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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델 Jul 16. 2021

조선성리학과 무이구곡도

북송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1130 ~ 1200)는 54세가 되던 1183년 제자들과 복건성 무이산에 은거하며 강론과 저술에 몰두했다. 주희가 머물던 무이산은 산세가 험준하고 협곡이 발달해 있어 외지인의 접근이 힘들었다. 하지만 험준한 지형만큼이나 경치가 빼어나기로 유명했는데 특히 무이구곡(武夷九曲)이라 불리는 아홉 개의 물줄기와 절벽은 중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명소였다. 후일 성리학을 집대성하여 주자라 불리었던 주희는 무이구곡의 제5곡에 제자들과 정자를 짓고 살았고 이후 이 지역은 주자성리학의 본산이자 발원지로 여겨졌다.


무이구곡도는 주자가 은거했던 무이구곡의 절경을 담은 그림을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그림은 단순히 절경을 간접적으로 감상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주자에 대한 존경심과 숭상을 목적으로 제작된 경우도 있었다. 때문에 무이구곡도에 대한 대부분의 감상평도 절경에 대한 경탄과 주자에 대한 존경, 이 두 가지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특히 조선시대 성리학을 배웠던 양반계층에게 있어 무이구곡은 도교의 무릉도원과 같은 이상향으로 여겨졌으며 이와 동시에 성리학의 집대성을 이룬 주자에 대한 존경 어린 태도를 그림을 통해서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무이구곡도가 조선에 전파된 것은 대략 16세기경으로 여겨진다. 처음 무이구곡도가 전해졌을 때 조선 성리학자들은 주자의 학문적 공간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점으로 인하여 무이구곡도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피력한다. 초기에 무이구곡도는 단지 중국의 화가들이 그린 작품들만이 소비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주자의 학문 공간을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은 지식인 계층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따라서 조선 내에서는 빠른 속도로 무이구곡도의 모사화가 유통된다. 이것은 중국 화가들이 그린 무이구곡도의 공급이 조선 지식인들의 수요를 따라잡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경향은 17세기에 이르러 조선구곡도(朝鮮九曲圖)의 탄생을 예고하는 전초가 되기도 한다.


이성길, <무이구곡도>, 1592년, 국립중앙박물관.


17세기에 이르러 구곡도의 수용 방식은 크게 변화한다. 우선 중국의 구곡도에 대한 소비 일변도에 벗어나 조선만의 구곡도를 향유하는 단계에 이른다. 16세기에 이미 진행되었던 모사화 경향은 전란의 와중에도 꾸준히 이어져 17세기에도 이어졌고 혼란이 수습 단계에 이르는 17세기 중후반기에는 조선의 경관에 구곡을 조성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의 지식인층들이 단지 관념적 상상에 의거해 구곡도를 향유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구곡을 조성한다는 점에서 특기할만하다.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구곡도는 송시열의 주도로 제작된 고산구곡도다. 고산구곡도는 율곡 이이가 황해도 고산군에 조성한 구곡의 경치를 그린 그림으로 율곡의 생존 당시에는 그려지지 않다가 17세기 후반 송시열의 지시로 화폭에 옮겨졌다. 이 그림이 17세기 구곡도 중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는 이유는 송시열이 이 그림을 미적 목적 이외에도 정치적인 목적으로 그렸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서인 노론계 문사들의 학통이 율곡 이이에서 왔음을 상기시키고 이를 통해서 결속을 도모하려는 목적 하에 그림 제작을 명령했다. 이러한 경향은 그림이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단적인 예를 보여주며 또한 성리학의 근원을 상기시키기 위해 주자의 은거지를 그린 구곡도가 조선에 와서 어떻게 변용되었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지표이기도 하다. 또한 17세기 후반 그려진 고산구곡도는 후일 18, 19세기에 정치적 당파성에 따라 다른 목적으로 그려진 구곡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바로미터가 되기도 한다.


<고산구곡시화도병풍>, 1803, 개인소장.


18, 19세기에 구곡도는 다변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다변화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요약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수평적인 경향으로 당파적 색채에 따라 준거로 삼는 구곡도가 다변화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특히 이 시기 서인계 문인들과 남인계 문인들 사이에 구곡도를 바라보는 큰 관점 변화가 나타난다. 우선 서인계 인사들은 17세기 송시열이 지시해 그려진 고산구곡도를 큰 준거로 삼는 경향이 강하다. 반면 남인계 문인들이 전거로 삼는 구곡도는 주자의 학통을 강조하는 무이구곡도였다. 특히 영남 지역 남인계 학자들을 중심으로 구곡도에 대한 인식 변화가 일어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 가졌던 구곡도에 대한 큰 틀은 17세기 송시열이 도모하고자 했던 정치적인 목적과 일맥상통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사이에는 조선 유학에 큰 업적을 남긴 선현들이 공부한 자리에는 반드시 구곡이 조성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이런 인식에 따라서 18세기에 이르면 유명 학자들이 머문 곳곳에 구곡이 조성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다만 이들의 이러한 성향은 서인계에서 많이 향유되던 고산구곡도에 의해서가 아닌 무이구곡도에 의해서 일어난 변화다. 이런 식으로 조성된 구곡을 그린 그림은 일반적으로 남인 계열에서 향유되던 무이구곡도와 구분하기 위해 조선구곡도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남인계와 서인계가 따로 향유하던 두 구곡도는 양 당파의 흥망성쇠에 따라서 그 변천을 거듭한다. 특히 고산구곡도의 경우 후기에 들어서는 그 양식이 매우 정형화되고 화원 화가들 사이에서 널리 그려지는 양식이 된다.


허련, <무이구곡도>, 1808년


다음으로 수직적인 경향은 문인화로 인식되던 구곡도가 민화로까지 확장된 것을 들 수 있다. 초기 구곡도가 수용되는 과정에서 주된 소비 계층은 성리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양반 계층이었다. 하지만 18, 19세기에 이르러 구곡도는 형식적인 묘사와 모사 경향이 짙게 나타나게 된다. 또한 화폭의 정신성이 유리된 채 외양적인 형식만을 차용하여 회화 속에 표현되는 경우가 증가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구곡도는 민중 계층이 향유하던 민화에 까지 그 주제가 확대된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구곡도가 초기에는 관념적, 형식적으로 수용되다가 이후 17세기에 들어서 실경 산수 경향을 보이는 구곡도가 나타나고 다시 민화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장식적인 모티프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 19세기 화단이 실경의 경향에서 남종화풍의 사의화 경향을 보여준다는 것과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어서 흥미롭다고 할 수 있다. 구곡도의 수용과 전개 과정은 조선 성리학의 수용과정과 분화를 이해하는 한 단면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외래 학문으로 출발했던 성리학이 어떻게 조선에 맞게 변화하고 또 성리학을 받아들인 일군의 지식인 계층이 이후 어떠한 방식으로 분화되는지 보여주는 좋은 물질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미술이라는 것이 그 본래의 목적인 미적인 욕구 충족에 충실하지 못하더라도 후대의 학자들에게 있어 이러한 자료는 글로 적힌 사료의 가치만큼이나 소중하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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