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후 가끔씩 아빠를 만났다.
아빠가 결혼하신 분과 김해에서 가게를 운영할
계획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종종 내려가 일을 도와드렸다.
아빠는 내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얼굴을 보고 싶어 하셨다.
종영이도 그 말에 꽤 반가워했다.
우린 함께 김해로 내려가 아빠를 만났다.
식탁에 앉아 있는 내내, 아빠는 종영이에게 결혼 이야기를 하셨다. 남은 두 딸을 빨리 시집보내고 싶은
마음이 그대로 보였다.
아빠를 만나고 돌아온 다음날, 종영이와 점심을
먹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종영이와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다정하고 세심한 남자였다.
누구보다도 내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나 역시 종영이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스물여덟.
우리가 계속 이렇게 잘 만나고 있다면,
결혼도 괜찮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나도 모르게 툭 던졌다.
“2년 뒤에도 우리가 이렇게 잘 만나고 있다면…
그땐 결혼할래?”
종영이는 망설임이 없었다.
“당연하지.”
비혼주의를 외치던 내게 큰 변화였다.
수많은 유부남들의 추태를 봐왔지만
종영이만큼은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더 가까워졌다.
매일 함께 있고 싶었다.
시간이 갈수록 매일을 함께 보냈다.
그 당시 나는 둘째언니네 집에서 살고 있었고
종영이도 누나네 집에서 살고 있었다.
둘 다 우리만의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더 결혼이 하고 싶었다.
어느 날, 내가 말했다.
“어차피 둘 다 얹혀사는 거잖아.
전세자금 대출 받아서 결혼하는 건 어때?”
구체적인 방법도 찾아보았다.
지금 우리가 데이트하느라 쓰는 비용을 아끼면
돈을 모으는 것도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양가 부모님께 결혼하고 싶은 마음을
전하자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양가 집 어머니들의 반대였다.
우리 둘 다 가진 게 없고,
집에서 도와줄 형편도 아니니
좀 더 나중에 생각하라는 거였다.
종영이 어머니는 종영이가 서른여섯쯤
돈을 모아 집을 장만한 뒤 결혼하길 원하셨다.
그리고 내가 딸 셋 있는 집 막내라는 점,
너무 마른 체형이라는 이유로
별로 탐탁치 않아 하셨다.
우리 엄마는
“너 고생하면 어쩌려고.”
엄마가 아빠랑 결혼했을 때처럼
내가 힘들까 봐 걱정이 되셨다.
양쪽의 반대가 쌓이니
지금 당장 결혼을 한다는 건
무리였다.
커다란 벽 앞에 선 느낌이었다.
그 시절 나는 참 많이 힘들어했다.
그런데 내 속도 모르는 아빠는
전화를 걸 때마다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왜 결혼 안 하노, 돈이 없다고?
니가 결혼한다카면
아빠도, 언니들도 안 도와주겠나.”
그리고 덧붙였다.
“엄마랑 인연 끊고 아빠한테 오면
전셋집이라도 알아봐줄게.”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엄마를 향한 험담이 이어졌고,
내가 혹시 돈을 달라고 할까
경계하는 눈빛이 느껴졌다.
전화를 끊고 나서,
괜히 아빠를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돈을 많이 벌어
잘 살고 있지 않은 이상,
아빠와의 관계는
서로에게 부담일 뿐이라는 걸.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다.
스물세 살 우울증을 겪고
숨어 있었던 우울한 감정들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