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님께서 아주버님을 통해
봉투 하나를 보내셨다.
그 안에는 현금 백만 원이 들어 있었고
쪽지 한 장이 함께 들어 있었다.
예단과 예물에 관한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그 쪽지에 폭발한 종영이는
당장 집에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어떻게든 말려야 했다.
축복받아야 할 결혼식을
이렇게 망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종영이를 붙잡고
천천히 설명했다.
지금 이렇게 가는 건 아닌 것 같다고.
겨우 종영이를 진정시키고
가만히 생각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우리 둘이
살아보겠다고 이렇게 아둥바둥하는데
왜 그러실까.
솔직히 이해가 되진 않았다.
그렇다고 시댁과 종영이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것도 싫었다.
가족을 늘 중요하게 생각하던 사람이라
이 상황을 최대한 슬기롭게
풀어가고 싶었다.
시어머님께서 큰 걸 바라시는 것도 아니었기에
어머님의 바람대로 맞출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맞췄다.
물론 그때 이백 가까이 주고 맞췄던 한복들은
폐백 이후 고스란히 장롱 속에 들어가 버렸지만
그땐 어쩔 수 없었다.
어머님의 친언니, 이모님이
한복집을 하고 계셨기에
어떻게든 이해해보고 싶었다.
이렇게 우리는 결혼식을 향해 가고 있었다.
결혼을 준비하며 파혼하는 사람들도 많고
시댁과 척을 진다는 이야기들도 많이 들었지만
그 주인공이 내가 될 거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시댁과 우리 사이는
결혼식 날이 다가올 때까지도 회복되지 못했고
서로 오해만 쌓여갔다.
문제는 또 있었다.
바로 신부 측 아버지 자리에
누가 앉을 것인가였다.
그 당시 친정엄마는 재혼한 상태였고
새아빠가 계셨다.
친아빠와는 지난 사건 이후
연락을 끊고 지냈기에
나는 당연히 엄마와 새아빠를
청첩장에 넣고 결혼식을 올렸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아빠는 청첩장에 자신의 이름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많이 화를 내셨다고 했다.
속은 상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빠는 아내도, 자식도
돈으로만 바라보는 사람이었고
만날 때마다 혹시 돈을 달라고 하진 않을지
늘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다.
어렵게 결혼식을 올리고 살게 되면
그 모습을 계속 봐야 할 게 뻔했기에
차라리 서로 보지 않는 게 낫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아빠가 없는 결혼식을 올리고
우리는 꿈에 그리던 신혼여행을 떠났다.
신랑에게는 태어나 처음 가보는 해외여행이었고
나는 둘째 언니가 살던 일본 도쿄에
한 번 다녀온 이후 두 번째 여행이었다.
휴양지, 푸켓.
파워블로거였던 나는
결혼식과 신혼여행 모두
특혜를 받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패키지 여행이라 휴식보다는
쫓아다녀야 하는 일정이 많았고
지금 돌이켜보면
우리와는 맞지 않았던 여행이었지만
그래도 모든 게 추억으로 남았다.
쉽지 않았던 결혼 준비,
힘들었던 결혼식과 신혼여행.
2012년 7월 29일,
너무도 뜨거웠던 한여름.
그렇게 우리는
꿈꾸던 결혼식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