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 개, 소, 고양이, 낙타, 토끼, 비둘기, 메뚜기, 거북이, 까마귀, 독수리, 개구리, 수탉, 전갈, 박쥐, 돌고래, 사자, 원숭이, 플라밍고
이게 다 요가 자세 이름이라는 것이 믿어지는가?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여기는 유치원이고 키즈요가 수업이 진행 중이군’이라고 느낄 만큼, 우리는 매트 위에서 동물 자세를 흉내 내고 있다. 그밖에 나무, 산과 같은 자연의 이름을 가진 동작도 있고, 전사, 영웅, 여신, 춤의 신처럼 신화에나 나올법한 명칭들도 있다.
요가 자세 이름을 동물에서 따왔다는 건 동물의 움직임으로부터 배울 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고양이와 소의 등 모양에서 따온 캣카우 포즈는 척추를 풀어주는데 효과적이다. 강아지가 기지개 켜는 형상을 따라 하는 동작은 몸의 뒷면 전신 근육 풀기에 효과적인데, 다운독 Downward facing dog, 아래를 바라보는 개 자세라고 부른다. 뱀처럼 몸을 길게 늘이는 코브라 포즈를 하면 가슴, 배, 골반 주변까지 몸의 앞면이 시원해진다. 동물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몸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그리고 환경에 적응하는 방법을 안다. 생존을 위한 본능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렇게 동물로부터 배운다.
가만히 우리 집 강아지를 바라보는 걸 좋아하는 나는 요가를 하면서부터는 강아지의 몸짓을 더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 작은 생명체의 움직임을 보면서 ‘다운독은 어깨(앞다리)를 늘리는 거구나.’ ‘업독은 (뒷)다리가 시원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뒷다리를 양옆으로 쫙 벌리고 철퍼덕 바닥에 엎드리는 강아지를 보며 ‘완벽한 고관절 회전과 개구리 자세야.’라며 감탄을 하기도 한다. 이건 요가는 아니지만, 나의 강아지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몸을 쓰다듬게 시킨다. 머리부터 목, 등을 따라 몸을 쓸어 주는데, 잠깐 책장을 넘기려고 손을 떼기라도 하면, 그 짧은 시간을 못 참고 앞발을 들어 내 손을 긁으며 눈빛으로 말한다.
‘멈추지 말고 계속 쓰다듬어 줘.’
“도대체 왜 이렇게 계속 쓰다듬으라고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어 그에게 내 등을 똑같이 쓰다듬어 달라고 해봤다. 그런데 이게 기분이 그렇게나 좋을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쓰다듬는 행위는, 그 접촉은 안전함, 위안, 사랑, 신뢰를 느끼게 해 준다. 이렇게 강아지를 관찰하며 본능과 몸에 관한 지혜를 하나 더 배웠다.
파타고니아의 설립자 이본 쉬나드는 <파타고니아,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이란 책에서 “무리 지어 사는 동물과 인간은 서로로부터 끊임없이 배움을 얻는다.”라고 말했다. 동물들이 인간으로부터 어떤 배움을 얻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은 확실히 그렇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움직임을 너머 휴식과 치유에도 있다.
숲을 집으로 삼고 살아가는 동물은 몸에 상처를 입으면 그저 쉽니다. 조용하고 은밀한 장소에 찾아 들어가 며칠이고 꼼짝도 하지 않고 쉽니다. 오직 쉬기만 하는 이 시간이 몸을 가장 잘 치유해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이 치유 기간 중에는 먹고 마시는 일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멈추고 몸의 치유에 전념하는 이런 쉼의 지혜가 동물들에게는 아직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인간은 쉼의 능력을 잃었습니다.
틱낫한 <쉬기명상> 중에서
동물의 움직임을 본 딴 요가 자세들을 하는 동안 동물이 되어본다. 일터에서는 감정을 애써 감추거나 무시하고 이성을 극대화시킨 하루를 보냈겠지만 저녁에 매트 위에 서면 순수한 감각을 깨워내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몸을 맡긴다. 그 움직임을 통해 짖눌린 감정을 바라보고, 또 떠나보낼 수 있다.
나는 일찍이 모피 러버로 살아왔다. 패셔니스타셨던 할머니 덕분에 초등학교 때부터 어린이 목에 맞는 밍크 목도리를 하고 다녔고, 조금 더 자라서는 머리와 꼬리까지 달려있는 여우를 두르고 다녔다. 겨울이면 소파에는 몸 모양 그대로 떠낸 양털 가죽 방석이 놓였고, 동물들의 가죽이 거실과 서재 바닥에 카펫으로 깔렸다. 큰 거북이, 악어 박제 장식품을 예쁘다고 생각하며 자랐다.
토끼, 밍크 등의 모피코트와 구스다운 재킷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처음 들은 건 A를 통해서였다. 밍크, 폭스는 흔하니까 이번에는 친칠라를 사겠다는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그녀는 “그런데 밍크 산 채로 가죽 벗겨내는 영상 봤어?” 라 물었고, 내 몸에 걸쳐져 있는 코트만 생각했지 그것이 살아있는 동물이었었고, 죽는 과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던 나는 멈칫했다.
몰랐으니까는 괜찮다는 핑계는 순진하다.
한나 아렌트는 수많은 유대인을 강제수용소로 보낸 나치 전범 아이히만에 대해, 상사인 히틀러가 시킨 그대로 조직의 룰을 따랐을 뿐이지만 그 비판의식 없는 '사유 불능성 thoughtlessness' 자체가 잘못이라고 꼬집었다. '사유 불능성'은 '악의 평범성 the banality of evil'을 초래한다. 악은 괴물 같은 이들이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진지하게 사유하지 않을 때 발생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나는 동물과 관련해 그 잔인한 과정을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고, 눈과 귀를 막고 있었다.
사회심리학자 멜라니 조이의 “knowing without knowing(알지 못하면서 알고 있음)”이 그 다음 단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동물이 고통받는 것을 불쾌하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그 불편함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같은 동물임을 느끼고 공감할수록 상황이 불편해진다는 것을 아는 인간은 너무나도 영리하게 동물을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짐승'으로 타자화시킨다. 의학박사 아이샤 아크타르는 <동물과 함께하는 삶>에서 '타인이 우리와 다르다고 인식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들의 고통을 무시하는 게 더욱 아무렇지도 않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생명에 대한 '범주화'는 우리 삶의 상호 연관성을 간과하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동물권을 포함한 이 모든 개념들을 아주 오래전 학교에서 배웠다. 그저 이론일 뿐이던 것들이 생생한 깨달음으로 다가온 것은 요가를 하면서부터이다.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하면서부터가 아니라 요가를 좋아하게 되면서부터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지만, 정말로 그렇다. 매일 내 입으로 '피존 포즈' '캣카우 포즈' 등을 말하고 그 움직임을 따라 하면서 동물을 완벽하게 타자화 시키고 분리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요가를 하는 사람들이 유난히 강아지, 고양이를 많이 키우고 좋아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공감 능력은 생각보다 힘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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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에디
그림: 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