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가언니 Feb 14. 2023

균형을 위한 요가

“선생님, 저 그만할래요.”

“왜요? 허리 아파요?”

“아니요. 그냥 무서워서요.”


하타요가 시간에 T 선생님이 브르스치카사나 접근을 도와주고 계셨다. 양 팔꿈치로 매트를 딛고 거꾸로 선 자세에서 정수리를 바닥에서 뗐고, 후굴을 통해 다리가 바닥을 향해 내려갈 수 있도록 T 선생님이 내 허리를 잡아 도와주고 계신 상황이었다. 한 번도 성공해 본 적이 없는, 아니 시도 자체가 처음인 아사나였다. 조금 힘이 들긴 했지만 내 팔은 강인하게 버티고 있었고, 아직까지 허리가 아프지는 않았다. 다만 호흡이 가빠오자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다. 눈물이 날 만큼 무서웠고 나는 바로 T 선생님께 멈추고 싶다고 말했다.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서는 곧바로 후회를 했다. 조금 더 가볼걸.


브르스치카사나와 간다베룬다사나/ 출처: 인스타그램 @seonia

‘요가는 도대체 왜 척추를 과도하게 꺾는가?’의 질문은 요가를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던져봤을 것이다. 소위 요가를 ‘잘’한다는 사람이하는 특정 아사나들이 있다. 이를테면 간다베룬다아사나라던가 브르스치카사나사나, 아도무카 브륵샤사나 같은 것들 말이다.

‘저는 워낙 몸이 뻣뻣해서 이 동작은 못 합니다.’

라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연습을 통해 이 동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아직 해 본 적은 없지만^^) 나는 음악적 감각이나 신체적 능력, 미술적 재능, 혹은 천재적인 수학지능이나 천부적인 언어능력은 없지만, 대신 실행력과 성실성이라는 재능을 타고났다. 이제껏 연습과 노력으로 성취했던 경험들을 통해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이 아사나들을 해야 하는지, 내 성실성을 투여해야 할 이유와 목적을 아직도 찾지 못했다.  


오랜만에 90분 소마요가 수련을 했다. 소마요가를 처음 접하고 그 개념이 너무나 신선해서 책을 찾아보며 공부했던 것이 2019년 초의 일이니 4년 만이다.

‘Use it, or loose it’

사용하지 않으면 잃게 된다는 ‘계획된 노화’의 개념도, ‘감각운동기억상실증’ 같은 개념이 흥미롭긴 했지만, 동작이 쉽고 간단해서 운동 같지 않다는 이유와, 동시에 전문가의 리드 없이 혼자서 제대로 움직이는 게 어렵다는 핑계로 수련을 하지는 않았었다.


오늘의 수업은 내가 아는 소마요가의 방식대로 특별하거나 대단히 힘든 움직임을 하지 않았다. 일반 테이블탑 자세보다 무릎을 뒤로 보낸 자세에서 척추를 더 많이 사용하는 소고양이 자세라던가, 엎드린 자세에서 오른팔과 왼다리, 왼팔과 오른 다리를 함께 드는 크로스리프팅과 같은 간단한 동작, 혹은 누워서 골반과 어깨의 긴장을 푸는 동작 같은 것들이었다. 심지어 90분 수련의 앞뒤에는 사바아사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수련이 끝나고 내 스마트밴드의 기록을 보니 200kcal 이상이 소모되어 있었다.


“애개~ 90분이나 운동했는데 꼴랑 200kcal야?”


역시 요가는 칼로리 소모가 적은 스트레칭 정도의 약강도 운동이라는 말이 아니다.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평소 주로 수련하는 빈야사 요가의 90분 수련 후 소모 칼로리가 150kcal 내외였다는 사실이다. 빈야사 요가만큼 땀을 많이 흘리는 요가는 없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호흡 때문이었을까? 제대로 된 근육의 사용 덕분이었을까? 도대체 소마틱스가 뭐지?


소마틱스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소마라는 단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디 body라는 몸이 제3자가 시각적으로 보는 형태를 의미한다면 소마 soma는 제1자인 스스로가 감각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토마스 한나가 창시한 소마틱스 Somatics에서 사람의 몸은 수단이 아니라 체험, 탐색, 학습하는 존재의 영역이라고 보기 때문에 ‘소마경험’이라는 것은 몸 안에서 존재를 경험하는 것, 그러니까 신체 감각과 움직임을 내적으로 인지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J 선생님은 소마틱스를 몸에 관한 학문, 즉 몸 철학이라는 단어로 넓게 정의하셨다. 소마틱스의 근본 원리를 한 생명이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하는 동작들, 이를테면 갓난아기가 누워 있다가 몸을 뒤집고, 배밀이를 하고, 기어 다니다가 일어서고 걷기까지, 그리고 뛰기까지의 일련의 행위가 배우지 않고도 스스로 터득하는 본능의 영역임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하는 모든 동작은 잘 걷기 위해서이며, 따라서 운동의 최종목적 역시 건강하게 두 발로 걷는 것이 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같은 맥락으로 요가 동작의 목적은 근육의 사용에 도움이 되거나 호흡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이어가셨다.


이 대목에서 불현듯 답을 찾았다. 근육의 사용에 도움이 되거나 호흡에 도움이 되는 범위를 넘어가는 영역의 아사나는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발레리나가 발이 망가지면서도 발끝으로 서고, 무릎 관절에 부상을 입으면서도 높이 더 높이 점프를 하는 것은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발레가 표현하는 극치의 예술성이 목적인 것처럼 내가 마음을 주지 못했던, 나에게 극한으로 느껴졌던 아사나들은 건강을 위한 목적을 넘어 도전을 통해 한계를 극복하고 성취하는 정신적 영역의 만족감을 위한 것이다.


눈물을 흘릴 만큼 두려워했던 나를 인정하고 위로했다. 안 해도 괜찮다, 못 해도 괜찮다고. 그리고 ‘균형’이라는 인체 움직임의 논리에 더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https://youtu.be/_tFj5CclvKw





매거진의 이전글 새해에는 요가를 공부해 보겠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