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 사회를 생각해보자. 물리적인 폭력뿐 아니라 정신적인 폭력이 수없이 존재한다. 일례로 악플이 그렇다. 직접적으로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라고 인지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지만, 이는 엄연히 정신적인 폭력 행위다.
-여동구 <히말라야 빈야사> 중에서-
여동구 선생님은 <요가수트라>가 제시하는 요가의 8단계를 현대적인 의미로 해석했다. 비폭력을 의미하는 ‘아힘사’를 문자 그대로 생명체에 폭력을 가하지 않는다거나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다는 의미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언급하는 방식이 신선했다.
올 초에는 유명 BJ와 배구선수가 악플로 자살했다. 이미 수많은 아이돌 스타들이 악플로 세상을 떠났다. 한 칼럼니스트가 악플을 받은 경험을 글로서 공유한 적이 있는데,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의 인격을 모욕하고 욕설을 하고 혐오하는 댓글을 보면서 상처를 받았다. 감정은 우울해지고 자신감은 떨어지고 자존감도 낮아지면서 자꾸만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려고 해도 일상에서 그 말이 기억나고 실체도 없는 두려움이 생겨 불안해졌다.”
라고 했다. 그 형태가 블로그이던 인스타그램이던 유튜브이던 1인 1 채널을 갖고 있는 것이 보편화된 1인 미디어 시대에 그것은 비단 연예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코로나를 겪으며 급격한 변화를 겪은 우리 사회에서 비대면, 온라인이 차지하는 위치와 중요도는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니 기원전 2세기에 파탄잘리가 말한 ‘비폭력’은 우리에게 이런 방식으로 해석되는 것이 합리적이다. ‘악플이라는 정신적 폭력을 가하지 않음’ 말이다.
5년 전 요가를 시작하면서 요가 경전과 명상을 처음 접했다. 요가 경전은 어려워서 혼자 읽지 못했지만 명상 책은 여러 권 읽을 수 있었다. 푹 빠져 있던 시기였다. 시간이 흐르며 차차 열정은 옅어지고 지금 나에게 요가는 아사나의 형태로만 남아있다. 물론 일주일에 세 번 꼬박꼬박 요가원에 가서 몸을 움직이며 아사나를 수련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봄부터는 다시 요가 경전과 명상을 공부를 해보려고 한다. 나도 여동구 선생님처럼 나의 머리로, 나의 지혜로 요가를 해석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2년의 기간을 잡고 차분히 <요가수트라>, <바가바드기타>, <우파니샤드>를 읽고 명상 이론을 공부하는 로드맵을 짰다.
더불어 오랜시간 쓰지 않았던 요가 글도 다시 쓸 작정이다. 유영만 교수가 <언어를 디자인하라>에서 ‘읽기는 결국 쓰기로 완성된다’ 고 말했다. 쓰기를 목적으로 책을 읽는 사람과 그냥 읽는 사람이 출발부터 다르다고 했는데, 요가 경전은 내가 허투루 읽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고 겸손하게 읽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반려견 글을 더 많이 썼지만 내게 ‘쓰는 사람’의 정체성을 부여하며 바닥에 떨어진 자존감을 끌어올려주고, 자아성찰과 자가 치유를 할 수 있게 해 준 것은, 그러니까 새로운 삶의 여정의 발을 떼게 해 준 첫 글은 요가에 관한 것이었다. 2019년 7월의 일이다.
이전의 요가 글 구독자들이 얼마나 남아계신지 모르겠지만 이제 다시 요가 글을 쓰기로 했다는 소식을 알릴 수 있어 스스로 뿌듯하고 기쁘다.
https://youtu.be/Z8nngc4TB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