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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가언니 May 20. 2024

니체가 걷던 길

에제 Èze

니체의 산책로. (무식해서) 용감하게 해안가에서 올라가시 시작!


“니체의 산책로 별거 아니네. 그냥 이런 골목길이 다 인가? 나무도 없고 그냥 시멘트 바닥이?”

“그러게 말이야. 경사가 좀 가파르긴 하지만 너무 단조로운 걸. 이런 데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탄생했다니 싱겁군.”  


유럽 사람들은 별 특별하지도 않은 길에 유명인의 이름을 붙여서 관광 수입을 벌어들인다는 둥, 올라가면 선인장 공원이 있다는데 그것도 별로일 것 같다는 둥 대화를 하며 산책로 입구로 들어섰다.


무난한 니체의 산책로 입구. 사이로 보이는 푸른 바다


프랑스 할머니: “봉쥬르.”

나: “봉쥬르. 정상까지 얼마나 남았어요?”

프랑스 할머니: “한 시간에서 한시간 반 정도 올라가면 될 것 같아요.”

나: “네?? 한 시간 반이라니요?”


프랑스 할머니 무리가 등산용 백팩과 등산화를 착용하고, 머리에는 손수건으로 헤어밴드까지 만들어서 했으며 등산스틱을 양손에 쥐고 내려오시는 모습이 뭔가 과하다 싶어서 여쭈었던 것이다. 산책로에 저렇게까지 하고 올 필요가 있나 싶어서. 그때 우리의 차림은?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기모바지에 가죽 재킷을 입고 실크스카프를 둘렀다. 함께 간 친구는 가죽 핸드백을 들고 고급 캐시미어 니트를 입고 나온 터였다. ‘산책로’라는 단어만 믿고 진짜 ‘산책’을 나온 우리. 물도, 선크림도, 기능성 의류도 없이.


이정도면 산책로가 아니라 등산로 아닌가요?


“아니 이럴 거면 ‘니체 등산로’라고 불러야지 ‘산책로’라고 하면 어떻게 해?”

“역시... 공부는 엉덩이로 하고 글은 다리로 쓴다는 말이 맞았어. 니체 급의 명작을 쓰려면 이 정도 등산을 매일 할 수 있는 위대한 사람이 되어야 하나 봐. 아니면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마라톤을 하던지.“


초반에 길이 단조롭다, 쉽다, 말했던 것은 아직 니체의 산책로에 들어서기 전 마을을 지날 때였던 것이다. 니체의 산책로가 산책로가 아니었음을, 혹은 프랑스와 우리의 산책의 개념에는 상당한 갭이 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부랴부랴 켜본 구글맵이 알려주기로 우리의 목적지는 해발 427m의 높이.해안가에서부터 걷기 시작했으니 정직하게 427m 높이를 올라야만 했다. 심지어 예전에 노새들이 다니던 길이라 길이 심하게 꼬불꼬불하게 나있었다. 우리는 왕복 3시간 거리를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스니커즈를 신은채 올랐다.  


올려다 봤을때와 내려다 봤을때 이런 두 뷰가 공존하는 곳


니체의 저작 중 가장 잘 알려진 <짜르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3부 <낡은 서판과 새로운 서판에 대하여>가 이곳 에제에서 집필되었다고 한다. 1883년 4개월간 니체는 에제에서 지냈고 매일 이 산책로를 걸었다.


아니, 잠깐만요? 철학서 중에서도 어렵기로 유명한 니체의 저작을,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비유와 상징과 은유로 가득 찬 이 책을 저술하는데 고작 넉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니체는 4부까지 있는 이 책의 각부를 집필하는데 열흘씩 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호기롭게 밝힌 바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미 25세 때 스위스 바젤대학의 교수가 된 비범한 사람이었다. 다만 천재성을 가진 대신 건강을 가지지 못했다고 해야 할까, 평생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한다. 교수직을 10년만에 그만두어야 할 정도로. 고작 35살의 나이였는데 말이다. 이 책을 집필할 당시 시력은 거의 사라지고 일 년의 반 이상은 두통으로 움직이지 못했다는데.... 그런 몸 상태로 이 험한 코스를 매일 오르내렸다니!


푹 절여진 파김치가 되어 니체의 산책로를 정복하고 구시가지에 도착한 우리는 제일 먼저 보이는 가게로 들어가 500ml 생수를 한 병씩 원샷한 후, 부활했다.


중세도시 에제의 미로와 같은 골목

‘중세도시’라는 수식어가 붙는 에제는 로마군의 침입을 피해 숨던 곳이라 그런지 산꼭대기에 요새처럼 위치해 있다. 그래서 ‘독수리 둥지’라고도 불린다. 미로 같은 골목에는 가게들이 아기자기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트러플 가게에는 트러플 오일, 소스뿐 아니라 파스타까지 온갖 트러플로 만든 식품들이 있었고, 레몬샵에는 망통의 레몬으로 만든 레몬커드, 레몬리큐어, 레몬소스 등 각종 병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사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지만, 한국에서 먹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 레몬커드를 놓칠 수는 없지. 에제에서 나온 만다린으로 만든 리큐어도 한 병!


문 닫힌 샤또 셰브르도르 호텔의 구시가지쪽 입구와 정문


비욘세가 묵었다던 샤또 셰브르도르 호텔 Hôtel Château de La Chèvre d’Or 은 성수기 준비 리노베이션을 위해 문을 닫았고, 12세기 예배당 자리에 세워진 에제성당 Église Notre-Dame-de-l'Assomption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다른 도시들에서 접했던 상황이라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대신 예약이 그렇게 힘들다는 미슐랭 1스타 샤또에자 Château Eza의 레스토랑에 예약 없이 들어가 좋은 뷰를 감상하며 와인 한잔 할 수 있었으니 비수기 여행에는 장단점이 있다. 샤또에자는 스웨덴의 왕자가 너무 좋아해서 30년간 여름마다 방문을 했다는 럭셔리 호텔이다.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샤또 에자에서 와인 한 잔


“우와... 이건 내가 아는 일반 다육이가 아니네.”

“이래서 에제 열대식물원이 명소라 하는구나. 안 왔으면 큰일 날 뻔했어.”


에제의 가장 높은 절벽 위에 아프리카, 남미, 지중해 각지에서 공수해 온 선인장과 알로에들이 자리하고 있다.이름 그대로 이국적인 정원 Le Jardin Exotique.  스케일과 포스가, 그 화려함이 남다르다. 태양을 정면으로 받는 곳에는 덩치가 크고 색깔도 화려한 선인장들이 있다면, 공원 안쪽 깊숙이 음지로 들어오면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이끼들이 자라고 있었다. 이곳은 선인장을 보러 온다기보다는 지중해 뷰를 보러 오는 곳이라 해야 할 것 같았다. 지중해의 어떤 섬에, 그 꼭대기에 서있는 기분이다.


선인장 공원에서 바라보는 지중해의 뷰


“집에 돌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어. 여기서 버스를 타거나, 다시 니체의 산책로로 내려가서 버스를 타거나.”

“무슨 소리야? 당연히 여기서 버스지. 니체의 산책로를 왜 또 걸어? 더 이상은 못 걸어.”


남프랑스 소도시의 버스배차표는 생소했다. 3시대에는 00분, 30분 출발, 4시 대에는 50분 출발, 5시 대에는 없고, 6시 대에는 10분, 50분 출발 이런 식으로 표가 그려져 있다. 버스와 지하철이 몇 분 간격으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고 앱을 켜면 초단위로 현재위치를 알려주는 서울 대중교통에 익숙한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상황. 내가 배치표를 잘못 해석했나 싶어서 옆에 있는 프랑스 사람에게 물었다. 내가 타려는 버스는 1시간 반 후에나 도착하니, 우선 먼저 오는 버스를 타고 니스로 갔다가 기차를 타고 모나코까지 가란다. 아 그렇게 두 도시를 오가며 삥삥 도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아참, 나 휴가 왔지! 급할 것도 없잖아?’


그래서! 다시 걸어봅니다. 니체의 산책로 내려가는 길 입구.


니체의 산책로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물병을 하나씩 챙기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이미 해가 지기 시작해 햇살도 한 풀 꺾였고 내려가는 길이라 덜 힘들기도 했다. 올라갈 때는 정상에 빨리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에 위만 보고 갔는데, 이제는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생겼을 뿐 아니라 힘도 덜 드니 사진도 많이 찍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뷰, 그 지중해뷰가 환상이었다. 이 날씨에, 이 햇살에, 이 뷰를 매일 볼 수 있다면 니체처럼 매일 산책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내려가면서 보는 지중해뷰. 나이스!


p.s 니체의 산책로를 완주(?)한 사람에게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어렵네요. 10번쯤 오르내리면 이해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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