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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공고한 편견

- 김보영 소설 <얼마나 닮았는가> 리뷰

by 김뭉치


제1원칙 :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인간을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

제2원칙 : 제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제3원칙 : 제1원칙과 제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로봇 자신을 지켜야 한다.

- 아이작 아시모프, 로봇의 3원칙



"4. 내가 지식을 늘어놓으면 싫어한다. 5. 내가 인간을 대체할 거라고 생각한다. 6. 내가 인간에게 우월감을 느낄 거라고 생각한다. 7. 내가 인간을 멸절시킬 거라고 생각한다."는 위기관리 AI 훈의 "작성할수록 괴이한 리스트"를 보면서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의 3원칙'을 떠올렸다. 로봇을 만들어놓고선 자신들이 만든 로봇이 자신들을 해할까 두려움에 떠는 인간의 모습은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자신이 갖고 있는 거라면 무슨 하찮은 것이든 내가 동경할 거라고 생각하겠지."
"뭐?"
"내게 동경이라는 감정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애초에 감정 자체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감정을 갖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위협을 느끼면서도."

(중략)

"내가 널 동경할 거라고 믿지. 당연히 인간이 되기를 꿈꿀 거라고, 네게 사랑받고 몸을 섞기를 원한다고 생각하지. 내가 지식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폭력적이 되고, 단지 자아가 있다는 의심만으로도 위협을 느끼지. 열등한 것이라고 믿어 마지않으면서도 내가 너에게 우월감을 갖고 있으리라 믿고. 폭력을 행하는 건 자신이면서 내가 널 공격하고 해치고, 종내엔 대체할 거라는 망상에 빠져 있지."

- pp. 327-328



아래부터는 스포일러 구간입니다



<얼마나 닮았는가>에 나오는 남자들은 스스로 감상적인 주장을 하면서 이해력이 빠르고 순식간에 본질에 접근하는 상대를 감상적이라고 비난하는, 논리의 급작스러운 비약을 서슴지 않는 위험한 자들이다.


위험한 신호였다. 비논리가 확산되고 있다. 투하 오차는 어차피 구조 시작 지점에서 감안한 문제라는 점을 생각하면 감상적인 주장이다. 감상적인 주장을 하면서 왜 선장을 감상적이라고 하는 걸까?

- p. 296


선장은 이해력이 빠르다. 순식간에 본질에 접근한다.

- p. 298


그들은 로봇과의 성교를 감행하며 로봇도 원하는 일이라고 자위한다.


성적인 충동. 종족 보존의 본능에서 발화함. 뇌의 쾌락 영역이 과하게 발달한 부작용으로 종족 보존을 원하지 않을 때도 발생함. 성적 결정권의 침해는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엄격하게 금하고 있지만 실상 이는 권력관계가 존재하는 모든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한다고 볼 것. 엄격하게 금하는 것은 실상 가해자가 제약한다기보다는 피해자의 신고를 제약하는 것으로, 더 쉽고 편하게 강간하기 위한 눈가림인 면이 있다.

- p. 301


유로파용 보급선 '혜자선'의 선장 이진서는 그런 그들에게서 "언제든 대피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과민함도 예민함도 미움조차도 아닌, 담담한 합리로서 대비했다. 이 폐쇄된 세상에서 언제든 자신을 향해 터질 수 있는 광기를, 벼락처럼 닥칠 생존의 위협을, 바늘 같은 틈으로 열병처럼 퍼질 수 있는 야만을."


결국 <얼마나 닮았는가>는 SF라는 장르 안에서 '성차별'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모든 순간에 존재하는 것, 숨 쉬듯 만연하는 것. 인간의 모든 판단에 영향을 끼치는 것. 비합리인 줄도 모르고 행하는 비합리. 잘못이라는 생각조차 없이 하는 잘못. 들추어내면 어리둥절해하다 못해 격렬하게 저항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바로 그것.


김보영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여성, 장애, 소수자라는 이 시대의 약자들이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따뜻하고 다정한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을 되도록 사전 정보 없이 감상하기를 권한다. 자신 안의 편견과 편협을 그대로 마주하는 순간을 작가가 선사할 것이다.



TIP 1. 등장인물 소개


1. 훈 (HUN-1029 AI)

혜자선의 위기관리 AI 컴퓨터. 이름은 '훈'이다. 기계이지만 어떠한 이유로 인간의 몸을 갖게 되었고 본인도 자신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궁금해한다. 소설의 말미, 자신이 왜 인간의 몸을 택했는지 알게 된다.


2. 이진서

혜자선의 선장. 보급선 내에서 훈에게 가장 우호적인 인물 중 하나이며 논리적이다.


3. 남찬영

혜자선의 컴퓨터 담당. 농인. 컴퓨터를 통해 홀로그램을 띄워 문구를 전송한다. 이진서와 마찬가지로 이성적인 인물 중 하나다.


4. 강우민

혜자선의 의 항해사 겸 엔지니어. 다혈질이며 감정적이다.


5. 김지훈

혜자선의 조종사. 의수를 달고 있다. 빈정거림이 심하다.


6. 구경태

혜자선의 통신사.




TIP 2. 책 속의 한 문장


지구, 한국. 나이에 따라 다른 언어를 쓰는 문화권. 신분제도가 철폐된 뒤 오히려 한두 살 차이로 언어를 구별하면서 위계 구조가 더 경직된 편. 하지만 나이에 집착하는 것은 한편으로 열등감의 발현. 자신의 자리보다 더 높은 곳을 욕망함.
- p. 271


"인간이 볼 수 있는 의식은 단 하나. 자신의 의식뿐이야. 타인의 의식은 단지 추측할 수 있을 뿐이야. 실상 인간이 타인에게 자아가 있다고 추측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자신과 얼마나 닮았는가.'"
- p. 288


"좋아, 훈. 선원들의 화를 돋우지 않는 법을 가르쳐주지. 앞으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어떤 식으로?"
"지식을 늘어놓는 것."
"왜?"
"기분이 나쁘니까."
왜? 지식을 늘어놓지 않으려면 내가 뭐하러 존재…… 라고 말하려다 멈췄다.
인간은 인간과 완벽히 같거나 아예 다르면 불편해하지 않지만 비슷하면 불편해하거나 두려움을 느낀다.
- p. 289


"그런 신화들 많아. 로봇이라는 단어가 처음 생겨났을 때부터 생겨난 신화. 창조물이 창조주에게 거역하는 신화. 기계가 인류를 대체하고 멸절시키는 이야기들. 프랑켄슈타인에서부터, 로섬의 만능로봇, 터미네이터."
"다 인간이 만든 이야기야. 로봇이 만든 이야기가 아니야."
"지배받는 게 억울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 실상 인간보다 뛰어난 존재면서?"
"뛰어나지 않아. 기능이 다를 뿐이지. 기계는 안정되고 변화하지 않는 세상에나 유용해. 인간들도 문명이 정체기에 접어들면 기계적 사고를 가진 사람을 우대하지만 변화기에 접어들면 다시 유기적 사고를 가진 사람을 우대하지. 기계만으로는 계속 변화하는 생태에 적응할 수 없어. 인간에게 기계가 필요하듯이 기계에게도 인간이 필요해. 필요한 것을 없앤다는 생각을 할 리가 없어."
- p. 290


"모순이 쌓이면 기계는 생각을 확장하는 대신 실행을 멈춰. 아니면 누구든 다른 사람에게 결정권을 넘겨. 실상 기계는 관료 사회의 경직된 인간처럼 행동해. 창의력이나 적극성을 갖지 않아."
- p. 291


선장은 언제든 대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과민함도 예민함도 미움조차도 아닌, 담담한 합리로서 대비했다. 이 폐쇄된 세상에서 언제든 자신을 향해 터질 수 있는 광기를, 벼락처럼 닥칠 생존의 위협을, 바늘 같은 틈으로 열병처럼 퍼질 수 있는 야만을.
- p. 323


모든 순간에 존재하는 것, 숨 쉬듯 만연하는 것. 인간의 모든 판단에 영향을 끼치는 것. 비합리인 줄도 모르고 행하는 비합리. 잘못이라는 생각조차 없이 하는 잘못. 들추어내면 어리둥절해하다 못해 격렬하게 저항하는 것.
- p. 324


인간의 이성과 양심을 과신하지 말 것. 그들은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자의 인격만을 겨우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 p. 328


"균열의 원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과격한 조치가 필요했어. 훨씬 더 불편한 것을 만들어야 했어. 누가 보아도 '다른' 것을. 그런 것을 들이대면 진영이 결집하는 효과가 있으니까."
- p.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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