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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뭉치 Jan 12. 2019

일의 기쁨

- 마감 중 만난 문장들

480호(1.20) <기획회의> '어메이징 예술책장' 2회는 『도스또예프스끼 시학의 제(諸)문제』에 대해 다룬다. 김수환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학과 교수님께서 명문으로 연재를 빛내주셨다. 교수님이 이 연재에서 언급해주신 바흐찐의 '카니발 이론'에 대해 나는 잘 모른다. 원래 편집 전엔 관련 책들과 영화 등 참고자료를 다 살피는 편인데  교수님께서 다뤄주신 『도스또예프스끼 시학의 제(諸)문제』는 절판됐고, 도서관에서도 찾기 힘들었다. 그래서 다만 교수님의 글을 통해 바흐찐이 "카니발 이론가"로 불렸던 것은 아마도 수평적인 의사소통이 사회를 살린다고 주장했기 때문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다. 바흐찐은 "삶은 본질적으로 대화적이다. 산다는 것은 대화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묻고 귀를 기울이고 대답하고 동의하는 것이 삶의 본성"이라고 말했다. 바흐찐과 타자(성)의 윤리에 대해 김수환 교수님께서는 아래와 같이 느꼈다고 한다. 원고의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1월 20일에 발행될 <기획회의> 480호를 기대해주시라.


 그런데 나를 붙든 저 구절들은 분명 ‘정확성’이나 ‘종결불가능성’과는 다른 윤리적 차원을 가리키고 있는 듯했다. 그것은 인격의 심부를 건드리는 진실은 가능하다고, 하지만 그 진실은 ‘부당하며,’ 따라서 근본적으로 비윤리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자 갑자기 지금껏 내가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바흐찐이 진짜 바흐찐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마치 “위에서 내려다보듯이,” 한 인간의 “혼을 들여다보듯이” 행하는 판단이 거리낌 없이 횡행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한 인간의 영혼에 대한 수많은 “간접적 진실”이 압도적으로 ‘공유’되고 ‘복제’되고 ‘유통’되는 이 시대에, 바흐찐적 의미에서 진정으로 윤리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타자와의 관계에서 “부당함”(부정확함이 아니다!)을 넘어설 수 있는 진실의 판단이라는 게 과연 가능할까? 어쩌면 나는, 바로 이 질문과 더불어 처음부터 끝까지 바흐찐을 ‘새로 읽어야만’ 하는 게 아닐까?
올 겨울이 지나기 전에 (다시)읽기를 권하고 싶다. 처음으로 바흐찐을 만나려는 사람 뿐 아니라 이미 그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에게. 바흐찐은 여전히 ‘바흐찐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마감 중에 만난 이 세 문단은 압권이었다. 편집자의 보람은 이렇게 좋은 원고를 가장 먼저 마주할 때 있는 것 같다. 일의 보람을 느끼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도스또예프스끼 시학의 제(諸)문제』 , 미하일 바흐찐 지음, 김근식 옮김, 중앙대학교출판부, 2011,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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