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뒤집힌 것 같았다 새벽이 늘어나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시계의 초침 소리가 들려왔다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속 늘어진 시계가 까만 밤 위로 어른거렸다 시계의 초침이 쉴 새 없이 째깍거린다 뇌혈관이 팽팽하게 당겨지다 못해 늘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여자는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눈이 너무 뻐근했다 안압이 계속 상승 상승 상승하다 눈이 터져버릴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눈을 계속 감았다 뜨면 꼭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스스로의 눈이 얼마나 건조한지 확인사살을 하는 것 외엔 아무 소득이 없었다 여자는 눈을 감고 양손 검지와 중지를 나란히 펴서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익히 알고 있는 날카로운 아픔이 천천히 손가락을 타고 느껴졌다
이렇게 잠이 오지 않을 때면 차가운 옛 기억들이 혈관을 타고 흐른다 기억은 떠올리지 않아도 수면 위로 떠오르고 수면은 취하려고 해도 취해지지 않고 그래서 여자는 밤마다 끔찍한 기억의 파도 위에서 몸서리를 친다 물론 간혹 좋은 기억들도 여자를 찾아온다 온몸이 배배 꼬일만큼 따뜻하고 푸근한 그래서 그 기억에 몸을 맡기기만 해도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그러나 대개 그런 기억들은 때때로 아주 조용히 찾아왔다 모래처럼 스르르 사라져서 여자는 그 기억을 온전히 손에 쥘 수 없었다 기억들은 한사코 여자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오늘 여자를 찾아온 기억은 한 남자에 관한 것이다 여자는 평소에 그 남자를 떠올리려고 애쓴 적이 없어서 문득문득 그 남자에 관한 기억이 찾아올 때면 자기도 모르게 놀라곤 한다 어디선가 헤어진 전 남자친구가 자꾸 생각나는 건 아직 그를 못 잊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 얘기와 마주했을 때 여자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여자는 그를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여자의 생각에 그는 좋은 연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여자는 그를 떠올릴 이유가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므로 그의 기억이 한밤중에 그녀의 몸을 타고 기어오르는 일은 그녀에게 더없이 불쾌한 일이었다
여자는 그를 좋아‘했’다 엄연한 과거형이다 여자는 그를 좋아했다 그는 매우 근사한 얼굴의 소유자였다 무심한 듯 툭툭 내뱉는 부산 사투리가 여자의 몸을 달뜨게 했다 여자는 웬일인지 어릴 때부터 부산 사투리를 쓰는 남자에 대한 묘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이따금씩 주위에서 그런 남자를 만날 때면 여자는 속으로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꼭 고양이의 언어 같았다 그 남자는 휴대전화로 메시지를 보낼 때도 사투리를 썼다 여자는 그게 신기했다 밥 먹었니 묻는 게 아니라 꼭 밥 뭇노 라고 물었다 내가 밥을 살게 라고 하지 않고 내 밥 사주께 라고 말했다 고양이가 맞았다 피가 돌고 살이 붙은 온기가 도는 고양이
그를 만나면서 여자는 미움과 사랑이 샴쌍둥이 같다는 걸 알았다 여자는 남자를 좋아했지만 남자가 그녀만큼 여자를 좋아하는지에 대해서는 늘 생각을 되새김질해야 했다 확신이 없었다 여자는 자신이 그 연애에서 약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그 어떤 게임에서도 져본 적이 없었던 여자에게는 연애 역시 게임과 같았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지는 게임 여자는 이 게임에서 지고 싶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 게임만은 꼭 이기고 싶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설사 다른 모든 승패에서 패한다 하더라도 어깨 한 번 으쓱하는 걸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에 여자는 승리의 여신이 자신의 편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먼저 고백을 한 것도 먼저 애닳아 한 쪽도 남자였다 거의 매일 남자는 여자를 찾아왔다 여자가 그들의 관계를 이상하게 여긴 것은 대체로 그들의 만남이 밤에 이뤄진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남자는 대기업의 막내사원이라 야근과 특근이 잦았다 건설회사의 해외견적팀 소속이었기 때문에 한 달에 절반은 해외에서 지냈다 그래 그런 것들은 쿨하게 인정하고 넘어가더라도 그 외의 시간들이 뜨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데이트를 계획한 날보다 계획할 수 없는 날이 더 많았다 여자는 그 점이 석연치 않았다 예상치 못한 만남, 그리고 역시 예상치 못하게 만날 수 없는 상황이 찾아들자 여자는 답답해졌다 매일을 만나도 그 만남은 늘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
왜 이 남자와는 다른 연인들처럼 만날 수 없는 것일까 분명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아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봐도 끝끝내 그 뭔가를 알 수 없었다 여자는 분통이 터졌고 결국 어느 날은 소위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오빤 나를 좋아하는 거야 아니면 내 몸을 좋아하는 거야 라는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더더욱 여자는 그와의 만남에 몰입할 수가 없었다 이건 진짜 사랑이 아니라는 생각이 여자의 머릿속에 뱀처럼 똬리를 틀었다 진짜 사랑이 대체 뭔데 그 물음엔 답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게 진짜 사랑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어느 밤 남자는 회식을 마치고 여자의 집으로 기어들어왔다 손에는 여자와 함께 먹고 싶다는 아이스크림이 들려 있었다 여자가 아이스크림을 받자마자 남자는 푹 하고 고꾸라졌다 아이스크림 먹는다며 여자가 말했지만 남자의 귀엔 이미 여자의 목소리가 없었다 여자는 남자를 질질 끌어 겨우겨우 침대 위에 눕혔다 재킷을 벗기고 셔츠 단추를 몇 개 풀어주었다 미처 먹지 못한 아이스크림은 냉동실에 두었고 남자의 주머니에서 떨어져 나온 휴대전화는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여자는 잠이 오지 않았다 남자는 편안하게 수면을 취하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곁에 반듯이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눈을 껌뻑거렸다 역시나 잠이 오지 않았다 평소 불면증을 앓고 있던 남자는 여자만 곁에 있으면 잠이 잘 온다고 했다 남자의 집에서 여자는 남자가 처방받은 다량의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를 보았다 여자는 남자가 불쌍했다 수면검사도 해보았지만 병원에서도 딱히 치료법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행복하게 자란 이 남자 극심한 취업난에서도 대학 졸업 전에 대기업에 취직해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은 이 남자 그런 이 남자도 말 못하는 괴로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여자를 만날 때면 늘 단둘이 있으려고 했다 여자는 탁 트인 야외에 나가 산책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싶었지만 남자는 그런 여자를 타일렀다 손수 알리오올리오와 스테이크 여자가 좋아하는 각종 과일주스와 눈꽃빙수를 만들어주며 남자는 집안에서 여자의 품에만 파고들었다 날갯죽지가 부러진 아가새처럼 품안을 파고드는 남자의 머리를 여자가 가만가만 쓰다듬으면 남자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니만 있으면 내는 안정이 된다 남자는 자주 그런 말을 들려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남자의 감은 눈과 얇은 입술을 떨리는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여자는 자신의 곁에서 잠들어 있는 남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눈을 감고 입을 다문 그 모습이 첫눈처럼 하얗게 느껴졌다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남자의 휴대전화를 들고 거실로 나갔다 고요함 속에서 새근거리는 남자의 숨소리를 느끼며 여자는 조심스럽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러려고 남자의 비밀번호를 외워두었나 싶기도 했다 꼭 이러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그동안 남자가 비밀번호를 누르는 걸 아무 생각 없이 지켜봐왔던 게 숫자를 터치하던 남자의 손가락 위치가 고스란히 떠올랐다
여자는 곧장 카카오톡 어플리케이션을 터치했다 채팅창을 누르자 남자가 지금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던 대화창들이 주르륵 떴다 그중에는 여자가 알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여자는 먼저 그들을 만나게 해준 사람과 남자의 대화창을 확인했다 남자는 대학 졸업을 앞둔 4학년 1학기에 취직에 성공했다 내로라하는 대기업 세 군데에 합격해 학교에는 플래카드가 걸렸고 남자의 몸에는 친구들의 시샘이 걸렸다 그때 남자의 주위엔 사람이 없었다 남자는 그들에게 따가운 존재였고 그들은 남자에게 가소로운 존재였다 유일하게 단 한 명만이 남자의 곁을 지켰다 그는 남자를 부러워했지만 그것은 순전한 부러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남자는 오직 그 한 명에게만 자신의 취업 노하우를 모두 전수했다
그리고 다음 학기, 역시 졸업 전에 그 한 명도 대기업 취업에 성공했다 그는 남자의 절친이 되었고 남자를 여자에게 소개시켜준 사람이 되었다 그들의 대화창에는 시시껄렁한 농담들이 가득했다 군데군데 욕설도 섞여 있었다 남자들은 친구들과 거리낌없이 욕설을 주고받으며 대화한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생경했다 여자는 그동안 남자에게 품었던 환상의 모래성 밑바닥이 허물어짐을 느꼈다
이후 여자는 남자가 회사 사람들과 주고받은 메시지창을 열어 주욱 훑어보았다 여자가 생각하는 남자의 모습과 타인이 생각하는 남자의 모습이 일치하는지 살펴보고 싶었다 회사에서 남자는 어떤 존재인지 어떤 평판 속에서 일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마지막으로 아껴두었던 대화창들을 하나씩 열어봤다 남자가 매달 한 번씩 만나는 마라톤 동호회 사람들 그리고 여자의 이름이 뜨는 대화창들을 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는 여전히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여자가 이상함을 느낀 것은 채팅창 어디에도 여자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여자의 이름이 거론된 적도 없을뿐더러 남자의 주위 사람들은 모두 남자에게 여자친구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소개팅을 제의하는 동호회 친구가 있는가 하면 그렇게 여자를 안 만나다간 홀아비로 늙어 죽을 거라는 악담을 퍼붓는 대학 동기가 있었다 남자는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다며 소개팅 제의를 거절하고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말라며 대학 동기를 안심시켰지만 정작 여자가 원하는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휴대전화를 잡고 있는 여자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동안 못내 미심쩍게 여겨졌던 남자의 마음이 더욱 의심스러웠고 자신과의 만남을 지속하는 이유가 예상하고 있는 바로 그 때문일까 두려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남자는 여자와의 만남 초기 어떤 여자와 소개팅을 한 듯했다 완전히 확신할 순 없었지만 남자는 여자와 사귄 지 일주일 가량 되었을 때 문제의 그 여자와 두 번을 만난 것 같았다 채팅창의 날짜가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만약 여자를 만나기 전 이미 약속된 소개팅이었다면 여자는 이해했을 것이다 남자가 그 사실을 인지시켜주기만 했다면
여자는 자신이 그를 믿으려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실상은 그런 게 아니라 남자에게 여자의 존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도 있다 여자는 남자가 자신과 눈을 마주하며 손을 잡고서 내가 네가 원하고 바라던 좋은 남자친구는 못 될 수도 있다 근데 내 이거 하나는 약속할게 내는 니랑 오래 만나고 싶다 단순히 만나는 거 그게 아니라 니랑 가정도 꾸리고 우릴 닮은 아도 낳고 그러고 싶다 그러니까 니는 우리 만남을 길게 봐줘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예쁘게 봐줘 라고 말하던 애교 섞인 그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 순간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막장 드라마의 여주인공처럼 술잔에 담긴 술을 모조리 그의 얼굴에 퍼붓고 싶었다
여자는 자존심이 상한 건지 남자를 사랑했던 마음이 상한 건지 아니면 그저 속상한 건지 그도 아니면 모든 게 손 쓸 새도 없이 이상해져 버린 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다만 여자는 조용히 휴대전화를 다시 책상 위에 놓아두고 자신의 자리 그러니까 남자의 곁으로 돌아가 천장을 보고 누웠다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썩은 우유를 마시는 기분이 이럴까 여자는 자기 자신이 놀랄만치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남자와 만나면 만날수록 여자는 자기 자신이 마모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무언가 여자의 자존감을 불쾌하게 서서히 깎아내리는 그 어떤 것이 있었다
아마 이렇게 닳아지다간 기어코 바닥을 드러내고야 말 거야 여자는 남자와의 만남이 다른 남자들과의 만남과는 무언가 미세하게 다름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단지 그게 과연 어떤 부분에서 다른지를 설명할 수 없었을 뿐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여자는 자기 자신이 이 남자를 좋아하고 있는지조차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남자를 깨워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올 진실이 두려웠다 어떤 대답도 여자는 듣고 싶지가 않았다 여자는 그저 조용히 아침이 밝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어둠이 걷히며 남자에 대한 자신의 마음도 함께 말려올라가기를 동이 트면 자신의 마음도 함께 트이기를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 속에 자신의 마음도 묻히기를 바랐다
왜 갑자기 이런 생각들이 찾아온 걸까 여자는 이불을 코끝까지 끌어올리며 눈을 감았다 어디에선가 쿵쿵거리는 소리가 계속됐다 이 집은 이상하게 방음이 잘 안 된다고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밤이 소름처럼 기어오르고 있었다 여자는 자신이 끊임없이 불행을 떠올리는 병에 걸린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불행에 중독된 사람도 있을까 여자는 자신의 아비를 떠올렸다 내일이면 아비의 집으로 가야 한다 여자는 가급적이면 아비의 집으로 가는 일을 회피해왔다 35년을 함께했지만 아비와는 좀처럼 편해질 수가 없었다
여자는 어릴 때부터 아비를 무서워했다 아비는 말이 없는 사내였다 여자가 기억하는 아비의 몸에서는 쇠 냄새가 섞인 비린내가 났다 아비는 대개 아예 집에 들어오지 않거나 아니면 아예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집에 있는 아비는 하루 종일 아무 말이 없었고 여자도 감히 먼저 말을 시키지 못했다 아비가 말을 할 때는 당신이 취했을 때뿐이었고 그러면 여자가 듣도 보도 못한 욕설들이 아비의 입에서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렇게 욕설들이 강을 이뤄 흐를 때면 어미의 악다구니가 짝을 이뤘다 그 둘은 하루를 깨우는 오케스트라처럼 퍼져나갔다
때때로 아비는 술에 취해서 자고 있는 어린 여자를 흔들어 깨웠다 취기가 아비의 몸을 강타할 때면 그는 부쩍 말이 많아졌고 갑자기 애정표현을 일삼곤 했다 여자는 자신의 입술에 와 닿는 아비의 축축한 수염이 싫어서 곧장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우리 딸이 너무 예뻐서 아빠가 우리 딸이 좋아서 그래 라는 아비의 술내 나는 목소리를 들으며 여자는 왜 자신의 아비란 사람은 술에 취하지 않을 때는 자신을 예뻐해줄 수 없는 사람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원하지 않을 때 주는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일 수가 없음을 여자는 그때 깨달았다
여자는 모로 돌아누웠다 오늘은 웬지 아침부터 이상한 날이었다 방 안은 푹푹 쪘고 아침 6시부터 맞은편 건물에선 공사를 시작했다 위잉과 쿵쿵쿵쿵이 반복됐다 여자는 더 자고 싶어서 눈살을 찌푸리며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더랬다
그러다 혼곤한 잠에 빠져들었을 때는 출근하기 위해 일어나야 할 시간 직전이었다 5분만 눈을 붙였다 일어나야지 여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잠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 기저에는 여자보다 먼저 출근하는 남자친구가 메시지를 보내든 전화를 걸든 하여 자신을 깨울 거라는 안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남자친구는 오늘따라 여자의 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모닝콜 없이 먼저 출근해버렸다 평소에 여자는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고 문자 알림음에도 놀라 침대에서 일어나는 사람이었다 남자친구의 모닝콜이 귀찮아서 나 깨어났어 라는 예약문자를 발송해놓고 잠든 적도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오늘 여자는 알람을 들었지만 잠에 취해 알람을 다시 꺼버렸고 평소에 일어나던 시간보다 20분 뒤에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10년간의 직장생활 동안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여자는 모든 게 자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짜증이 났다 남자친구의 지나친 배려심이 여자의 짜증이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도록 듬뿍 물을 주었다
왜 오늘 나 안 깨웠어 말했잖아 늘 잠을 제대로 못 자니까 아침 잠깐이라도 잠 좀 잘 자라고 그랬다니까 아니 맨날 깨우다가 왜 오늘만 그래 평소에 좀 그렇게 내 말 잘 들어봐 자기야 왜 그래 솔직히 남 탓 하고 있다는 거 자기도 느끼지
여자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자신의 이런 태도가 아직 유아기적 발상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증명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여자는 분을 풀 때가 없어 답답했다
회사에서는 후배가 자꾸 자신의 업무를 체크하는 것 같아 짜증이 확 돋았다 지금 누가 누구 업무를 체크하는 거야 평소 같았으면 그냥 넘겼을 상황인데도 여자는 그 순간 불뚝 일어나는 짜증을 막지 못했다 후배에게 짜증 섞인 목소리로 핀잔을 주고 나니 그런 자신이 더 싫어져 또 짜증이 났다 아침부터 좀처럼 되는 일이 없다고 여자는 길게 늘어진 시든 난처럼 우울해했다
상황은 설상가상으로 인쇄소에 데이터를 넘겨야 하는데 디자이너도 도와주지 않았다 아무리 외주라지만 데이터를 넘기는 중요한 날 오전에 디자이너는 왜 미팅을 잡았을까 자신이 편집장이었다면 절대 용납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오후 5시에 끝날 일이 계속 늘어지고 있었다 후배 기자를 보기도 민망했다 왜 편집장은 디자이너를 휘어잡지 못하는 걸까
여자는 그 생각을 하며 오전 내내 멍하니 있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데이터를 넘기는 날엔 예민해진다 여자는 허브티를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진정하자 진정해 그렇지만 야근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미 지인들과 약속을 잡은 여자는 하릴없이 일정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건 짜증의 기폭제가 되었다
여자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편집장은 편집장대로 저기압이었다 여자는 슬금슬금 눈치를 봤다 이 와중에 당장 다음 주에 장기간 휴가를 가는 동료는 발등에 불이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얼른 기획안을 짜야 마음 편히 휴가를 다녀올 수 있다며 여자를 종용했다 여자는 당장 다음 주에 발행될 미술잡지 마감을 하면서 또 다음 호 기획안을 만들어야 하는 자신의 오늘이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클라이맥스는 퇴근 후였다 여자는 평소처럼 퇴근 후 샤워를 하러 욕실에 들어섰다 먼저 볼일을 보려고 문득 변기를 보았을 때 여자는 이상하게 변기 속 물의 색깔이 평소와 다르다는 인상을 받았다 평소의 맑은 물색이 아닌 레몬빛의 물색이었다 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욕실 조명도 다시 한 번 쳐다봤다 여자는 자신이 원래 예민한 것인지 아니면 후배들이 수군대는 것처럼 결혼 못한 나이 든 여자가 되어 예민해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찝찝하여 변기 레버를 내렸다
변기에 앉아 여자는 생각했다 우리 집에 누가 들어왔다 나간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아도 요즘 집 주인이 갑자기 욕실 수납장을 바꿔준다고 하여 집집마다 수납장을 떼어내고 새로운 수납장으로 교체하는 중이었다 평소에는 쥐 죽은 듯 조용한 곳이지만 그래서인지 요즘 인부들이 빌라 안으로 들락날락하는 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여자는 인부들이 시멘트 묻은 발로 자신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걸 떠올렸다 마음만 먹으면 현관 도어록쯤은 만능키로 충분히 열 수 있을 것이다 지난번에 인덕션을 교체했을 때도 여자가 직장에 있었기 때문에 관리인이 알아서 집 안으로 들어와 새 인덕션으로 갈아주었다
그래 인부들이 왔다 갔는지도 몰라 화장실이 너무 급하면 그럴 수도 있잖아 여자는 욕실 바닥에 시멘트가 묻은 발자국이 찍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변기에 앉아 타일을 살폈다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여자 혼자 사는 집에 고의든 아니든 다른 이의 침입 흔적이 보인다니 갑자기 옷장이나 문 뒤에 누군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었다 아냐 이건 지나칠 생각일 거야 여자는 자꾸만 손바닥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욕실 수납장이 빨리 교체됐으면 싶었다 여자는 지금 설치되어 있는 수납장이 마음에 들었다 굳이 바꿀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왜 모든 집이 다 수납장을 교체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 집은 괜찮아요 됐어요 라고 말하기도 뭐했다
그 일이 있은 뒤 여자는 작은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누군가가 도어록을 열고 들어와 갑작스레 나를 덮치면 어쩌나 걱정스러워 전전긍긍했다 원래도 불면증이 심했지만 오늘은 더더욱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여자의 걱정이 지나치다고 지적한 사람이 있었다 조선족 중 한 명이 여자를 납치 감금하고 강간한 뒤 토막을 내 살인한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여자는 야근 후 혼자 밤길을 거닐 때마다 무서움에 떨었다 그 무서움을 이야기하자 전 남자친구 중 한 명이었던 그는 여자에게 걱정제조기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는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잘난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늘 지나치게 걱정이 없는 편에 속했다 그는 자신은 잘 풀릴 운명을 타고났다는 걸 알았기에 취직을 하지 못한 백수 시절에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럴 만도 한 게 누구 하나 그가 백수라고 불편한 시선을 보내지도 않았고 집안 사정은 언제까지라도 취직할 때까지 그를 뒷바라지할 만큼 넉넉했다 그는 자신은 모로 가도 늘 상위 10% 안에 드는 삶만 산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남자에게 마음을 주기 전엔 오만으로 느껴졌던 그 자신감이 어느샌가 광채처럼 느껴졌을 때 여자는 그와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광채는 여자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와 닿지 못했다 애초에 그와 여자는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자석의 N과 S극처럼 서로 끝없이 밀어내기만 하는
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늘은 잠을 푹 자두어야 한다 내일은 아비의 집으로 가야 하니까 그곳에는 술에 절어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아비가 있을 게다 언젠가 아비를 일찍 잃은 회사 선배가 12주기 제사에 대해 쓴 글을 본 적이 있었다 아비 없고 남편 없는 세 모녀가 남편의 영정사진을 앞에 놓고 둘러앉아 주거니 받거니 막걸리를 비우며 그 어느 날보다 환하고 따뜻한 날을 보냈다는 글 여자는 그 글을 보며 차라리 아비가 죽어버렸으면 하고 바라는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봤다 한 죽음과 다른 한 죽음은 너무도 다르다 어떤 죽음과 어떤 죽음은 마치 세계의 한 끝과 또 다른 한 끝을 보는 것과도 같다 죽음을 사이에 둔 세계의 이면이 종이의 양면과 같아서 여자는 슬픔을 꾹꾹 눌러담았다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뎌내는 것, 더 이상 버티기 힘든 것들을 버텨내는 것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 걸까 여자는 휴대전화를 켜고 신문기사가 뜬 액정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그곳에는 자살을 시도하는 아버지를 말린 아들과 그 아들에게 자신을 죽게 놔두라고 말한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10여 차례 폭행한 아들과 아들의 폭행에 갈비뼈가 12대 부러져 죽어버린 아버지의 이야기가 있었다 절망의 수면 위에서 쉴새없이 물장구를 치면서 우리는 언제까지 억지웃음을 지을 수 있을까
끝도 없는 생각의 꼬리를 자른 건 휴대전화 벨소리였다 깊은 새벽 벨소리는 평소보다 더 크게 울리는 것처럼 들렸고 여가수의 목소리가 마치 흐느끼는 것처럼 느껴졌다 액정 속 발신인을 확인한 여자는 종료 버튼을 꾹 눌러 더 이상 벨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조정했다 여자는 휴대전화를 이불 속에 넣은 뒤 책상에 쌓여 있는 책들 중 손에 잡히는 것을 한 권 쥐었다 그것은 쌓인 책들 중 가장 분량이 많은 레이먼드 카버의 자서전이었다 여자는 시간을 들여 그 책을 천천히 천천히 읽어나가는 중이었다 어떤 달은 매일 한 쪽씩 그 책을 읽자고 다짐한 날도 있었고 또 어떤 날은 그 책의 표지를 그저 물끄러미 들여다보기만 할 때도 있었다 이번에는 그 책을 읽자고 다짐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 책에 자연스레 손이 갔다 초록색과 회색이 섞인 듯한 그 책의 표지는 이상하게 여자의 마음을 울적하게 만들었고 책등 속 레이먼드 카버의 흑백사진은 여자의 머리를 새하얗게 만들었다
여자가 읽다 만 그 책의 책장을 폈을 때 휴대전화의 벨소리가 다시 울렸고 예의 그 으스스한 느낌을 주는 여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평소에 전화가 올 때는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으스스함이었다 여자는 다시 종료 버튼을 꾹 눌러 벨소리가 들리지 않게 했고 1분 정도쯤 후에 미세한 진동음이 전화가 끊겼음을 알려주었다 여자는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여자의 불안증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없었고 오히려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듯했다 여자는 오른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내뱉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가슴의 통증은 가시지 않는 듯했고 여자는 조그맣게 주먹을 쥔 뒤 자신의 가슴을 두세 차례 두드리기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 전화는 다시 울렸고 또 다시 끊겼다
울리고
끊기고
울리
고
끊기고
울
리고
끊
기려고 할 때쯤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누가 들을 새라 여자는 한숨 쉬듯 조용하게 음성을 내뱉었다 여보세요 오 우리 딸이구나 우리 예쁜 딸이야 벌써부터 여자의 눈 앞에는 아비의 곁에 나뒹구는 초록색 병들이 보이는 듯했다 네 내일 오니 네 네가 온다고 생각하니 이 아비는 벌써부터 기쁘구나 네 내일 뵐 텐데 왜 전화를 하셨어요 그냥 그냥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아니 글쎄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는 줄 아니 내가 오늘도 갖은 수모를 당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수모인 걸요 응 뭐라고 아니에요 아무것도 딸아 나는 일만 하는 로봇이 아니다 네 그렇다고 한 적도 없어요 그런데 네 지금 말투가 그게 뭐니
아비의 음성이 점점 높아졌다 여자는 기어코 입을 다물었다 집안일은 회사일과는 달랐다 회사에서의 스마트함을 집안에서는 전혀 발휘할 수가 없었다 하루하루 어제보다 나은 오늘로 나아가기는커녕 어제와 같은 오늘을 유지하는 것조차 여자는 힘이 들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아비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지금 뉴스를 보는데 말이다 세상이 참 이상하네 다들 열심히 사는데 말야 다들 제대로 살아보려고 하는데 말야 이상하게 그게 안 되는 것처럼 보이네 나도 웃으면서 열심히 사는 데까지 살아보려고 하는데 말야 네 엄마가 방해를 하고 소장이 방해를 하고 네 삼촌이 방해를 하고 또
남 탓하는 건 좋지 않아요
뭐라고
이어 수화기 속 아비가 육두문자를 내뱉기 시작했다 그의 음성은 분노했다 체념했다 슬퍼했다 좌절했다 낙천적이었다 부정적이었다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너는 이해 못 할 거다 그토록 똑똑한 너는 이런 걸 이해를 못 해 그러니 전화 받는 네 말투가 그 모양이겠지
아비의 감정이 점점 더 격해지는 것을 느꼈을 때 여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휴대전화의 종료 버튼을 눌렀다 여자의 손가락은 이미 애초에 통화 버튼을 누른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
떠돌이 노가다에다 변변한 일자리 하나 붙잡지 못한 얼치기 뜨내기 인생이다
신뢰를 주는 관계 속에서만 나 역시 최소한의 자긍심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
가족에게 신뢰를 찾지 못한 점 미안하구나
이제 삶의 질을 높이는데 목표를 두어야 할 것 같다
나의 삶이 덕을 잃은 것은 엄격한 자기통제적 생활방식을 유지하지 않은 데 있을 것이다
그동안 술로 세척해내는 일만을 되풀이했던 무기력 그리고 내 이면의 폐쇄감까지 모두 그저 아쉬울 뿐이다
그녀를 포함해 이제 모든 관계의 고리는 끊어지고 나는 고통을 자각하기보다는 방황과 상실의 전형적인 나약한 인간으로 나이를 먹고 있다
나 자신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상처를 따뜻하게 어루만져주지 못한 가련한 존재가 바로 나였다
앞으로는 해묵은 빚을 갚아나가듯 그렇게 묵묵히 나아가자고
나 자신을 굳건하게 세워본다
오늘도 하루 일과를 마쳤을 때 찾아오는 뿌듯한 피곤함은 생기지 않았다
오후 내내 움직임 없이
그냥 그대로 무너지고 있었다
병원에서 보낸 아비의 편지를 문자 그대로 믿어버린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여자는 부들부들 떨면서 눈을 감았다 눈이 뻑뻑했고 고막에는 여가수의 흐느끼는 듯한 벨소리와 아비의 중얼거림이 고여 있는 듯했다
시지프스가 산꼭대기로 돌을 밀어 올리듯 여자는 힘겹게 눈을 떴다 밤이 뒤집힌 것 같았다 새벽이 늘어나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시계의 초침 소리가 들려왔다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속 늘어진 시계가 까만 밤 위로 어른거렸다 시계의 초침이 쉴 새 없이 째깍거린다 뇌혈관이 팽팽하게 당겨지다 못해 늘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여자는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눈이 너무 뻐근했다 안압이 계속 상승 상승 상승하다 눈이 터져버릴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눈을 계속 감았다 뜨면 꼭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스스로의 눈이 얼마나 건조한지 확인사살을 하는 것 외엔 아무 소득이 없었다 여자는 눈을 감고 양손 검지와 중지를 나란히 펴서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익히 알고 있는 날카로운 아픔이 천천히 손가락을 타고 느껴졌다
이렇게 잠이 오지 않을 때면 차가운 옛 기억들이 혈관을 타고 흐른다 기억은 떠올리지 않아도 수면 위로 떠오르고 수면은 취하려고 해도 취해지지 않고 그래서 여자는 밤마다 끔찍한 기억의 파도 위에서 몸서리를 친다
푸르스름한 새벽의 모서리에서 여가수의 흐느끼는 듯한 벨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쥐어짜듯 여자의 음성이 공기 중으로 토해졌을 때 전화기 너머에서 비에 젖은 아비의 중얼거림이 들리는 듯했다
네 어미가 자살했다
아비는 끝도 없이 구겨진 채 그저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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