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파리의 딜릴리> 리뷰
일찍이 파리의 아름다움을 그린 영화는 많았으나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미드나잇 인 파리>다. 우디 앨런의 이 영화에서 홀로 파리의 밤거리를 배회하던 길(오웬 윌슨)은 종소리와 함께 홀연히 나타난 차에 올라타게 된다. 그 차가 당도한 곳은 1920년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있는 파리. 그날 이후 길은 매일 밤 1920년대로 떠나고 헤밍웨이와 피카소, 피츠제럴드와 젤다 부부, 달리 등을 만나며 예술과 낭만과 사랑과 매혹을 경험한다.
벨 에포크 시대(19세기 후반~20세기 초)의 파리를 배경으로, 카나키인과 프랑스인의 피가 흐르는 소녀 딜릴리와 배달부 소년 오렐의 모험을 그린 <파리의 딜릴리>(Dilili In Paris)를 보며 <미드나잇 인 파리>가 떠오른 건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사진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작업된 <파리의 딜릴리> 속 아름다운 19세기 파리에선 마리 퀴리, 피카소, 마티스, 고갱을 비롯해 모네와 르누아르, 로댕과 카미유 클로델 등 파리의 유명인사들이 총출동하기 때문이다.
<파리의 딜릴리>는 마치 미술관을 통째로 옮겨놓은 듯 아름답고 선명한 작화감에, 여자아이 유괴범죄 미스터리를 중심으로 범인 마스터맨을 파헤치는 추리 형식으로 스토리라인이 흘러가 재미와 감동을 더한다. 다만 서사에 있어선 <미드나잇 인 파리>처럼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힘 있게 밀어붙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일단 영화는 페미니즘에 대해 다룬다. 마스터맨이 여자아이들을 유괴한 배경에는 사회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여성들에 대한 남성들의 반발이 있었다. 여성들은 그저 그림자처럼 네 발로 기어 다니는 존재와 다름없다며 마스터맨은 여자아이들을 잡아다 '네 발'이라 부르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훈련을 시킨다. 마스터맨의 소굴에서 여성들은 의자가 되고 테이블이 되고 네 발이 되며 그렇게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 채 살아간다(신선하고 재미난 접근이며 소름 끼치고 분하게 억울한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는 네 발이 된 아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프랑스의 유명 배우 사라 베르나르, 여성운동가 루이즈 미셸,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마리 퀴리가 모여 의논하는 장면을 삽입한다. 이들이 모여 아이들의 구출법을 의논하는 장면은 아름답지만 <파리의 딜릴리>는 그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각자의 전문 지식과 지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해결책은 각자의 개성을 살리지 못하는 방향으로 흐른다.
두 번째로 영화는 카나키에서는 카나키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딜릴리의 정체성 문제를 다룬다. 영화의 인트로는 충격적이다. 파리 시내 한가운데서 딜릴리는 카나키인으로서의 연기를 펼친다. 프랑스인들은 카나키인인 딜릴리의 육체와 행동을 감상하는 데 돈을 지불한다. 이 자체가 충분히 인종 차별적이다. 그러나 이후 <파리의 딜릴리>는 그 문제에 대해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중간중간 딜릴리에 대한 차별 문제를 다루면서도 영화는 너무나 프랑스 예찬적이다. 이쯤 하면 파리의 아름다움을 다루는 것은 좋으나 그러기 위해서 왜 딜릴리가 주인공이어야 하느냐는 점은 물음표로 떠오르게 된다. 딜릴리는 카나키어 대신 프랑스어를 쓰고 프랑스 귀족의 예의범절을 갖춘 채 파리의 사람들만을 연구한다. 심지어 고향의 노래를 불러달라는 오렐의 요청에 파리의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답한다. 그건 네 고향 노래가 아니지 않느냐는 오렐의 지적에 딜릴리는 "이건 나의 노래"라고 당당히 말한다. 전형적인 서양인의 시각이고 오리엔탈리즘이다.
오리엔탈리즘의 문제는 또 있다. 이 영화의 빌런인 마스터맨을 보고선 누군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건 바로 한국인 '놀부'였다. 프랑스에 만연한 프랑스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자행하는 대부가 왜 하필이면 동양적으로 생긴 사람이어야 했을까. 이러한 악당의 외연은 오히려 영화가 다루고 있는 굵직한 주제 중 하나인 인종 차별과 정체성 문제에 혼란만을 가중시킨다.
세 번째로 <파리의 딜릴리>는 화해와 연대를 다룬다. 차별과 억압이 끊이지 않는 지금 시대에 경종을 울리는 따뜻한 메시지다. 참 좋다. 이 작품이 애니메이션인 걸 감안하면 아이들에게도 다가가는 울림이 클 테니 더욱더 좋다. 그러나 영화 속 화해와 연대가 너무나도 급작스러워 놀랐다. 엠마의 운전기사는 처음엔 고약하다고만 생각했으나 실상 악독한 인간이라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 번의 실수라고 넘어가기엔 그 역시 엄연한 여아 유괴범이다. 딜릴리야 어린아이이니 속으로는 원망하더라도 표현하지 않는다고 넘어가야 하나. 애초에 오렐이 그렇게 경고를 했음에도 성악가 엠마는 운전기사를 그리도 감싸도 돌더니 결국엔 딜릴리를 빼앗기고야 말았다. 그런데 그가 뉘우쳤다고 하니 바로 용서 무드다.
영화 속 캐릭터라 치부하고 넘어가면 그만이지만 엠마 성격의 이상한 점은 또 있다. 자기 노래에 심취해 아이를 유괴당한 부모에게 아이들을 돌려주는 일은 나중 일이 되어 버린다. 에펠탑에서 식사하는 사람들은 노래하는 엠마의 모습과 알알이 빛나는 비행기의 전구들을 넋 놓고 바라본다. 애가 타는 부모의 마음은 아름다운 파리에 가려져야 하는 걸까.
큰 줄기만 따라가도 황홀한 작품인데 감독이 모든 요소에서 다 재미를 주려다 보니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진정 무엇인지 헷갈린다. 페미니즘이나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이나 인종차별이나 화해와 연대나 뭐 하나 중요하지 않은 소재가 없다. 모두 제대로 다루자면 어렵고 힘든 소재들이다. 그래도 영화가 뚝심 있게 밀고 나가는 소재는 있다. 바로 파리에 대한 사랑이다.
미셸 오슬로 감독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도시가 파리이다. 그곳은 햇빛 아래에서 더 빛나고 거기서 나오는 부조화가 더 아름답다”며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도시 파리에 대한 예찬을 아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배경과 의상에 신경을 많이 썼었다. 그런데 자꾸 들여다보니 특별한 사람들이 많았다”며 화려한 도시 파리의 내면으로 조금씩 파고들었던 제작 당시를 회상한다. 사실 파리 사랑을 담은 파리지앵 영화에 죽자고 달려드는 게 더 이상하긴 하다. 그저 모든 걸 내려놓고 파리로 향하는 오렐의 자전거에 몸을 싣기만 하면 된다. 반짝이는 파리의 햇빛이 팔뚝에 튀면 온몸으로 파리를 감상하자. <파리의 딜릴리>를 볼 땐 그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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