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서도 월터 옹이나 마셜 매클루언 같은 학자들과는 달리, 매체(예를 들면, 책 대 스크린)가 이 가변적인 신경회로의 구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지요.
- pp. 29-30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현재의 상황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디지털 환경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물론, 우리 자신에게 제기되는 어렵고도 구체적인 질문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새로운 시대의 독자는 디지털 매체에 요구되는 새로운 인지 능력을 흡수하고 습득하는 과정에서, 인쇄 매체를 통해 길러지는 보다 시간 소모적인 인지 과정도 키워나갈까요? 이를테면 디지털 포맷으로 읽는 습관과 함께 매일 다양한 디지털 경험(소셜미디어로부터 가상현실 게임에 이르는)에 함몰됨으로써 깊이 읽기를 구성하는 비판적 사고나 개인적 성찰, 상상, 공감같은 보다 느린 인지 과정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끊임없이 주의를 분산시키고 다양한 정보원에 즉각 접속하게 하는 환경이 합쳐지면서 어린 독자들은 자기만의 지식 창고를 짓거나 비판적인 사고력을 기를 필요성을 덜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다시 말해 청소년들이 지식의 서버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면서 결국에는 어린 뇌가 독자적인 지식의 기반을 구축하거나 독립적인 사고와 상상력을 키우려는 욕구를 위협받지는 않을까요? 아니면 신기술들이 인지력과 상상력에 이어지는 가장 완벽한 다리를 놓아주어, 지금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새로운 지식의 세계로 우리 아이들을 도약시켜줄까요?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아주 다른 형태의 뇌 회로를 발달시켜갈까요? 그렇다면 그런 상이한 회로는 우리 사회에 어떤 함의를 갖게 될까요? 그런 회로의 다양성이 우리 모두에게 이로운 걸까요?
- pp. 30-31
편지는 아무리 다급한 내용을 담고 있어도 표현하기 힘든 가벼움과 연결성이 내포되어, 쓴 사람과 읽는 사람 사이의 진정한 대화를 위한 기초가 되어줍니다. 덕분에 여러분의 머릿속에서 새로운 생각이 일어나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지요.
- p. 33
우리가 계속 직면하는 정보 과잉의 환경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쉽게 소화되고 밀도도 낮으며 지적인 부담도 적은 정보들로 둘러싸인 익숙한 골방으로 뒷걸음치고 싶다는 유혹을 느낍니다. 한눈에 들어오는 정보의 조각들이 매일 쏟아져 나오면서 우리는 모든 것을 안다는 착각에 빠지지요. 그 때문에 눈앞의 복잡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 분석은 뒤로 밀릴 수도 있습니다. 네 번째 편지에서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민주 사회에서 비판적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런 능력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빠르게 퇴화하는지 논의합니다.
- p. 35
어떤 매체로든 깊이 읽기를 훈련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매체에 관한 지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 p. 36
저는 '옮겨가기'가 일으키는 변화의 효과를 뚜렷이 보여주는 사례를 한 교사로부터 들을 수 있었습니다. 버클리에서 연극을 공부한 그 교사는 미국 중서부의 중심지에서 청소년들과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공연하고 있었지요. 어느 날, 한 학생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13세의 예쁜 소녀였습니다. 그 학생은 그의 극단에 들어오고 싶다고 했습니다. 평소에도 흔히 있던 일이었지요. 하지만 평소와는 한 가지가 달랐습니다. 소녀는 낭포성섬유증을 앓고 있었고, 병세가 악화되어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던 거지요. 그 교사는 소녀에게 배역을 맡겼습니다. 그는 그 소녀가 그때까지 경험하지 못했을 낭만적인 사랑과 열정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에 따르면 그 소녀는 완벽한 줄리엣이 되었다고 합니다. 소녀는 거의 하룻밤 만에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를 다 외웠고 연기를 해냈습니다. 마치 그전에 그 배역을 백 번쯤은 맡았던 것처럼 말이지요.
더욱이 그다음에 일어난 일은 주변 사람들 모두를 더욱 놀라게 했습니다. 그녀는 그 뒤로도 셰익스피어 작품의 여주인공을 차례로 맡아 연기를 해나갔고 점점 감정의 깊이와 힘까지 깊어졌던 거지요. 그녀가 줄리엣 역을 처음 맡고 몇 년이 흘렀습니다. 모두의 처음 예상과 의료진의 진단과는 달리 그녀는 대학에도 진학했고, 지금은 의학과 연극을 함께 전공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연기를 통해 배역을 바꿔가면서 '옮겨가기'를 이어가고 있는 거지요.
이 젊은 여성의 예외적인 사례는 우리의 정신과 마음이 신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넘어, 타인의 삶에 들어가 보는 것이 우리 자신의 삶에도 강력한 의미를 갖는다는 메시지를 줍니다. 연극은 가장 몰입감이 큰 '옮겨가기' 방식인 읽기를 통해 우리가 어떤 일을 겪는지를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이때 우리는 타자를 내면의 손님으로 맞습니다. 때로는 우리 자신이 타자가 되기도 하지요. 그리고 다시 자신으로 돌아올 때 우리는 더욱 확장되고 강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도 바뀌어 있습니다. 이 놀라운 젊은 여성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가끔 우리는 삶이 허락하지 않은 것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값진 선물이지요.
그 선물 안에는 또 다른 선물이 있습니다. 타인의 관점을 취해봄으로써 우리가 지닌 공감의 감각이 방금 읽은 것과 연결될 뿐만 아니라 세계에 관한 우리 내면의 지식까지 넓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학습된 능력은 시간이 갈수록 우리가 인간다워지도록 도와줍니다. 예를 들면, 어린 시절 <<개구리와 두꺼비는 친구>>를 읽고 개구리가 아플 때두꺼비가 어떻게 했는지를 배운다거나, 어른이 되어서는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나 콜슨 화이트헤드의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혹은 제임스 볼드윈의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를 읽고 영혼을 앗아가는 노예제의 패악과 그런 비운에 처했떤 사람들의 절박감을 경험할 수 있지요.
우리는 읽기를 통해 의식이 바뀌는 차원을 거치면서 좌절과 절망이 무엇인지 혹은 무언의 느낌에 도취되고 사로잡히는 것은 무엇인지 배웁니다. 저만 해도 제인 오스틴의 여주인공들인 <<에마>>의 에마, <<맨스필드 파크>>의 패니 프라이스,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 베넷이나 커티스 시튼펠드의 <<엘리저블: 오만과 편견의 현대적 재구성>>에서 부활한 최신 버전의 엘리자베스 베넷이 느낀 것들을 독서를 통해 얼마나 많이 알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들이 제각각 경험한 감정들을 통해 우리 모두가 저마다 갖고 있는, 종종 모순된 느낌들을 이해할 수 있었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삶의 환경이 어떻든 우리만의 복잡다단한 감정을 품고 살아가면서도 외로움을 덜 느끼게 되지요. C. S. 루이스의 삶을 극화한 연극 <섀도우랜드>에 나오듯이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 읽습니다."
정말이지 아주 운이 좋다면, 우리는 독서를 통해 책 속에 사는 인물들, 그리고 때로는 그런 인물들을 그려낸 저자들에 대한 특별한 형식의 사랑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저자에 대한 사랑을 행동에 옮긴 가장 구체적인 사례가 바로 니콜로 마키아벨리입니다. 그런 일과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인데도 말이지요. 그는 책을 읽을 때는 저자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 '대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시대별로 저자에게 어울리는 의상을 갖춰 입곤 했습니다. 1513년 그는 외교관인 프란시스코 비토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지요.
나는 조금도 부끄러움 없이 그들과 이야기한다네.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묻지. 그러면 그들은 친절히 대답해준다네. 네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지루한 줄도 모르고, 모든 괴로움도 잊었으며, 가난도 겁내지 않고,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네. 나 자신을 온전히 그들에게 맡기지.
이 단락에서 마키아벨리는 깊이 읽기를 통해 타인의 관점을 취하는 것은 물론 눈앞의 현실이 어떠하더라도 아무런 상관없이 그곳에서 내면의 공간으로 옮겨가는 능력을 보여줍니다.
- pp. 80-83
나이와는 관계없이 자기 자신을 떠나, 소설 속의 인물이든 역사 속의 인물이든 그 책의 저자든, 타인과 동행하며 반가운 위안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 p. 84
젊은 독자들이 다른 누군가의 생각과 느낌을 접하거나 이해해본 적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평소에 자신이 알고 지내는 무리나 가족 외의 사람들과는 공감의 느낌이 단절되기 시작한 나이 많은 독자들에게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 p. 84
가장 깊은 형식의 읽기 능력을 개발한다고 해서 그런 비극을 모두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타인의 관점을 이해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위험한 공해를 건너는 무고한 무슬림 어린이가 됐든, 보스턴 마이모니데스 스쿨 출신의 무고한 유대인 소년이 됐든, 나와 다른 이들을 상대하는 대안적인 공감의 방식을 모색해야만 할 다양한 이유들을 깨닫게 됩니다.
- p. 88
오틀리는 요크 대학교 동료인 레이먼드 마와 함께 중요한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동안, 타인의 관점을 취해보는 과정과 소설 내용(인생의 거대한 감정과 갈등이 주기적으로 전개되는 공간) 자체가 공감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도덕 실험실'(사회과학자 프랭크 해크멀더가 만든 명칭입니다)의 역할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소설을 읽을 때는 뇌가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의 의식을 그대로 따라합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따라하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 했을 사람까지 포함됩니다. 이때 우리는 잠시나마 타인이 되어보는 것이 정말 어떤 의미인지를 시뮬렐이션해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우리와 아주 비슷하거나 때로는 너무나 다른 감정과 분투에 지배당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 p. 92
(교양과 관련)
다음 논의로 넘어가기 전에 과학소설 작가인 에일린 건이 남긴 '아주 짧은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녀의 여섯 단어짜리 소설은 얼핏 우주여행에 관한 것으로 보이는데, 제대로 이해하려면 여분의 STEM 세포(만능 세포인 줄기세포)가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컴퓨터, 우리가 배터리를 가져왔던가?
컴퓨터…….
- pp. 98-99
릴케의 (중략) <<사랑하는 하느님 이야기>>에 나오는 가장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중략) 그중에는 한 무리의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아이들은 무언가를 신이라고 믿고 아주 소중하게 교대로 간직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작은 아이가 '그것'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느덧 낮은 밤으로 바뀌어 다른 아이들은 떠나고 가장 작은 아이만 남아서 필사적으로 '그것'을 찾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지요. 소녀는 모든 행인에게 사정합니다. 신을 찾도록 도와달라고. 하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못했지요. 마침내 모든 희망이 사라지려는 순간 이방인이 나타납니다. 그는 소녀에게 몸을 굽히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은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방금 땅바닥에서 작은 골무를 발견했단다."
아이가 '신'을 되찾았을 때 제가 그 아이와 함께 느꼈던 순수한 기쁨의 전율을 저는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야기에는 유년 시절의 믿음에 관한 생각이 얼마나 따뜻하게 담겨 있는지, 우리 인간이 신에게 '매달리는' 수없이 다양한 방식을 어떻게 작은 골무로 표현했는지 그때 알았지요.
- pp. 108-109
이 애정 어린 아버지가 평생 쌓아온 생각의 어깨를 어린 아들에게 내주려는 노력을 보면서 깊이 읽기 중에 일어나는 통찰이 얼마나 애정 어린 기능인지를 깨닫게 되지요. 그것은 우리가 지닌 최선의 생각을 후대에 남기는 것입니다.
- p. 109
우리가 눈 앞에 문장들을 읽어 들이는 마지막 밀리세컨드로 진입하는 순간 그곳에는 사실도 있고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도 있습니다. 문학 연구자인 필립 데이비스처럼 '경험의 관조를 위한 해저'라는 아름다운 은유를 사용하든, 신경과학자인 스태니슬라스드앤처럼 '신경 작업장'이라는 보다 심리학적인 용어를 쓰든, 소설가 기시 젠처럼 방이 여럿인 독자의 '내면성'이라는 단어를 쓰든, 읽기라는 행동에는 읽는 사람의 머릿속에 두 팔을 한껏 벌릴 만큼의 공간이 활짝 열리면서 우리의 모든 인지적, 정동적 과정들이 순수한 주의와 반성의 소재가 되는 마지막 순간이 있습니다. 이 정지의 순간은 인지적으로나 생리적으로나 그저 고요한 시간도 정적인 시간도 아닙니다. 오히려 강렬한 활동이 일어나는 순간이지요. 이 순간은 우리를 텍스트에서 벗어나, 혹은 텍스트를 넘어 통찰 속으로 한층 깊이 이끌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과거의 지각과 느낌, 생각들을 체로 걸러내,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생각했던, 그리고 필립 데이비스가 "보이지 않는 생성적 장소…… 단어들 배후와 내부와 사이의 보이지 않는 정신의 현존"이라고 묘사했던 것을 추구합니다. 두 사람의 생각을 감히 수정하는 것은 거의 신성모독처럼 느껴지지만, 저는 "단어들 배후와 내부, 그 사이를 읽는 정신의 보이지 않는 현존"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 pp. 110-111
쉬르마허가 썼듯이, 이제 문제는 끊임없이 새롭고 감각적인 자극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다양한 디지털 기기에 주의가 분산되거나 아예 주의를 빼앗기는 바람에 밤 시간이 짧아질 때가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최근 <타임>이 20대들의 미디어 사용 습관을 조사한 결과 정보를 얻는 매체를 전환하는 빈도가 시간당 27회라고 합니다. 휴대전화를 확인하는 횟수는 하루 평균 150~190회에 이르고요. 사회 전체로 보면, 우리는 환경에 의해 주의가 끊임없이 분산되는 데다 우리가 타고난 신경회로의 배선은 이것을 방조합니다. 요즘 우리가 보거나 듣는 것에 기울이는 주의의 질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보고 듣는 것이 너무 많은 데다 그런 과다한 정보에 익숙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많은 정보를 추구하기 때문이지요.
- p. 117
사실 지난 몇 년 사이에 문해 기반에서 보다 디지털적인 기반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우리의 읽기 습관에 대해서는 혼동을 하기가 쉽습니다. NEA의 보고서를 근거로 하든, 그보다 최근의 보고서를 근거로 하든, 현재 우리는 너무 많은 정보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제는 미국인 한 명이 하루 동안 읽는 단어 수가 웬만한 소설에 나오는 단어 수와 같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런 식의 읽기는 대개 연속적이거나 지속적이거나 집중적인 읽기는 되지 못합니다.
- pp. 120-121
최근에 저는 <노터데임 매거진>의 편집자인 케리 템플이 쓴 읽기에 관한 에세이를 읽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관찰했더군요.
우리가 받은 원고를 읽을 때면 나는 출력을 한다. 반드시 화면이 아닌 인쇄본으로 읽는다. 그래야 글을 제대로 읽을 수 있고, 주의를 집중할 수 있으며,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 수 있고, 글과 함께 있을 수 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편집자로서의 일이 지면을 통해 우리가 하는 이야기의 깊이와 질과 어감과 내용에 관해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나도 작가로서 산문을 쓰는 일이 얼마나 수고로운지를 알기 때문이다. 필자는 나의 세세한 주의를 누릴 자격이 있다. 나는 원고를 읽는 동안 완전히 몰입함으로써 필자와의 거래를 사려 깊은 주의집중으로 이행한다.
-pp. 133-134
저는 우리 문화가 보여주는 언어 동질화의 경향이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 걱정스럽다고 말했지요. 여기서 동질화란 저자들이 단어를 선택하는 폭이 좁아지는 것부터, 원고의 길이가 짧아지고 복합 구문과 비유적 표현이 제약받는 것까지 다 포함합니다. 복합 구문과 비유적 표현은 모두 배경 지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제는 쉽사리 구사할 수도 없습니다.
-p. 138
만약 '책의 언어'가 지금 문화의 인지적 스타일(빠르고 지나치게 시각적이며 인위적으로 끝을 잘라낸 스타일)에 맞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글쓰기도 변하고 더불어 독자, 작가, 출판사, 언어 자체도 변할까요? 지금 우리는 다양한 직군에서 비교적 고차원의 언어로 구현되던 지적 수준이 뒷걸음치기 시작한 것을 목도하고 있는 걸까요? (중략)
우리는 아름다운 풍경 속 어느 지점엔가 멈춰 섰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발길을 달갑지 않은 생각의 방향에서 돌려보려고 했지요. 시대마다 확장하고 변화하는 것이 언어의 본성 아닐까요? 우리는 서로 물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속한 시대 나름의 최상의 자신감을 되찾는 것이 바로 글쓰기의 역사 아닐까요?
- pp. 138-139
제가 지식의 외부 플랫폼보다는 내부 플랫폼을 선호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는 둘 다 귀중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외부 플랫폼에 자동적으로 의존하게 되기 전에 먼저 내부 플랫폼부터 충분히 구축해두어야 합니다. 그런 순서로 발달되어야만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순간이 언제인지를 알 테니까요.
- p. 141
인터넷과 트위터에서 양육되면서 거대한 단어 더미에 휩싸이고 140자만으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 익숙해진 젊은 세대가 멜빌과 엘리엇의 작품을 읽기란 힘든 일이겠지요. 150~300자가 넘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문장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 p. 143
그중 어느 대학교의 저명한 영어학과장은 한때 인기가 있었던 헨리 제임스 세미나를 이제는 진행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제임스를 읽고 싶어 하거나 읽을 수 있는 학생 수가 너무 적다는 것이었죠. 그 교수들이 관찰한 가장 흔한 현상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밀도 높은 텍스트의 어려운 문장 구조를 이해하려면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데도 학생들은 점점 그런 시간과 노력을 참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 p. 145
제니퍼 하워드는 당혹스러운 에세이인 <사기투성이의 인터넷>에 거짓 뉴스를 전하는 사람과의 인터뷰를 실은 적이 있습니다.
가짜 뉴스 장르의 달인이 <워싱턴포스트>에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사람들은 확실히 멍청하다. 무엇이든 퍼 나르기만 할 뿐이다. 그 누구도 그 무엇에 대해서도 사실 확인을 하지 않는다. 허구에서 진실을 가려내려면 시간과 정보 이해력, 열린 마음이 필요한데 주의가 분산된, 양극화된 문화에서는 모든 것이 부족해 보인다. 우리는 곧바로 공유하고 싶어 한다. 바로 그 점이 조작을 쉽게 한다.
- p. 148
우리 자신의 읽기 생활에 대한 보다 깊은 검토가 필요합니다. 독자 여러분은 혹시 글을 읽을 때의 주의력이 예전보다 못한가요? 심지어 무엇을 읽었는지를 기억하는 능력조차 떨어졌나요? 스크린으로 읽을 때면 점점 핵심 단어만 찾아 읽고 나머지는 건너뛴다는 사실이 느껴지나요? 스크린 읽기의 습관이나 방식이 종이책 읽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나요? 뜻을 이해하지 못해 같은 단락을 반복해서 읽는 때가 있나요? 글을 쓸 때면 생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표현하는 능력이 미묘하게 빠져나가거나 줄었다는 의심이 드나요? 정보를 간결하게 요약한 문장들에 길들여진 나머지 스스로 그 정보를 분석해볼 시간이 없거나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게 된 건 아닌가요? 치밀하고 복잡한 분석은, 심지어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도 점점 기피하나요? 특히 다음 질문이 중요합니다. 예전에 자신의 읽기 자아에서 끌어오곤 했던, 존재 전체를 감싸는 즐거움을 찾기가 어려운가요? 사실상 더 이상은 길고 어려운 글이나 책을 읽어나갈 뇌의 인내심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나요? 만약 어느 날 여러분이 걸음을 멈추고 자신이 정말 변하고 있는지 생각해본 뒤에도 뭔가 어떻게 해볼 시간조차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 p. 150
직업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점점 책임이 커지면서 수많은 디지털 매체로 읽고 수많은 글을 마감일까지 써내야만 했습니다. 결국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아주 조금씩 타협을 하기 시작했지요. 그럼에도 여전히 이메일만큼은 예의를 갖춘 손 편지처럼 쓰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글은 점점 짧고 간결해지고 있었지요. 더 이상 생각을 담기 위해 완벽한 순간을 기다리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 예전 방식은 이제 불가능한 목표가 되어버렸지요. (중략)
읽기의 경우, 제가 더 알거나 읽어야 하는 것들이 있으면 구글, 구굴학술검색(Google Scholar), <사이언스> 같은 저널의 일간/주간 요약, 온라인 뉴스, 온라인 <뉴요커> 기사 등에 점점 더 의존했습니다. 다양한 신문과 잡지도 구독하다 말다 했지요. 저는 더 이상 가장 중요한 것들(공공 생활에 대한 가장 심층적인 논평을 제공하는 것들)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중단했습니다. 놓친 것은 주말에 따라잡으면 된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주중에 지키지 못한 마감시간은 주말로 넘어갔고, 결국 목표는 점점 사라져 갔습니다.
그다음에 사라진 것은 침대 옆에 놓인 채 읽히기를 기다리던 책들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제가 침대에서 책을 읽는 시간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저의 하루를 마감하는 마지막 몇 분을 차지하는 것은 이메일입니다. 덕분에 저는 '덕이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 속에서 잠들 수 있게 되었지요. 하지만 예전처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성찰로 위로받거나, 켄트 하루프나 웬델 베리의 책을 읽으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일은 사라졌습니다. 그런 책을 읽는 동안에는 지구의 리듬과 인간의 사랑, 그리고 시련을 견뎌낸 덕성스러운 사람들의 차분한 통찰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런 일도 제겐 일어나지 않았지요. 그들의 관조는 저의 불안한 기분과 들뜬 마음을 다독여주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많은 책을 샀습니다. 하지만 책에 사로잡히기보다 책에 담긴 내용을 읽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지요.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저는 책에 몰입하기보다는 정보를 얻는 데만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책을 읽는 동안 어디론가 이동하는 것은 더더욱 생각지도 못할 일이 되었지요.
- pp. 152-153
저는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를 골랐습니다. 헤세는 이 작품으로 1946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지요. 제가 그 실험을 시작할 때만 해도 기분이 더없이 좋았습니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 제게 큰 영향을 주었던 책을 강제로 다시 읽게 된다는 생각에 정말이지 신이 났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어가면서 강제라는 말이 실감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유리알 유희>>를 읽기 시작하면서 뇌를 한 방 얻어맞는 느낌이 들었지요. 그 책을 읽을 수가 없더군요. 문체는 고집스럽도록 불투명해 보였습니다. 글은 불필요하게 어려운 단어와 문장들로 빽빽했고(!) 뱀 같은 문장 구조는 의미를 밝혀주기보다 저를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속도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제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한 무리의 수도사들이 계단을 천천히 오르내리는 장면이 유일했습니다. 마침 제가 <<유리알 유희>>를 읽으려고 책을 집어들 때마다 누군가가 걸쭉한 당밀을 제 뇌에 쏟아붓는 것 같았지요.
저는 텍스트를 조금 천천히 읽어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매일 기가바이트 분량의 글을 읽으면서 빠른 속도에 익숙해진 탓에 헤세의 메시지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속도를 늦출 수가 없었던 거지요. (중략) 저는 그 책이 싫었습니다. (중략) 마지막에는 제가 어떻게 이 소설을 20세기의 위대한 소설이라고 생각했는지 의심마저 들더군요. 노벨 문학상까지 받았는데도 말이지요. 뭐, 그때는 다른 시절이었잖아. 지금은 절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 거야. 아마 요즘 같으면 헤세는 그 책을 내줄 출판사도 찾지 못했을 거야.
- pp. 154-155
우리가 읽는 이유는 읽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많을 겁니다. 하지만 왜 읽는가, 그 이유를 묻는 질문을 의식적으로 제기함으로써 세계에게 가장 사랑받는 몇몇 작가들은 우리의 생각을 더없이 크게 자극하는 답들을 제시할 수 있었지요. 저는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여러분 스스로 그 질문을 해보았으면 합니다. 제가 예전의 읽는 자아를 재발견한 후에 돌아온 답은 이것입니다. 저는 이 세상을 사랑할 새로운 이유를 발견하기 위해 읽습니다. 또한 이 세상을 뒤로한 채 저의 상상 너머, 저의 지식과 인생 경험 밖에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는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해 읽습니다.
- p. 160
인간이 자연의 선물로 받지 않고 자신의 영혼으로 창조한 수많은 세계들 중에 책의 세계가 가장 위대하다. 모든 어린아이는 자신의 첫 글자를 석판에 휘갈기고 처음으로 글을 읽으면서 인공적이고 가장 복잡한 세계로 진입한다. 이 세계의 법과 규칙을 완전히 알고 완벽하게 실행할 만큼 충분히 오래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단어가 없다면, 쓰기가 없다면, 책이 없다면 역사도 없을 것이고 인간성도 없을 것이다.
- 헤르만 헤세 에세이 <책의 마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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