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에게는 열쇠가 있었다. 그 열쇠는 신비했다. 열쇠를 다른 사람의 몸에 터치하면 그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를 열쇠를 쥔 사람이 볼 수 있었다. 깡마른 아빠는 무릎을 꿇은 채 흐느끼고 있었다. "사실은 제가 어릴 적에 그런 일이 있었지요"라고 말하며 웃는 듯 우는 듯 찡그리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 열쇠를 들고 뛰었다. 엄마와 동생이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동생은 어린 시절 함께 눈사람을 만들 때 입었던 빨간색 누빔 점퍼를 입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점퍼에 곱슬곱슬한 웨이브 헤어 스타일을 한 동생의 모습이 생전과 같아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며 오열했다.
2. 수영장에서 과일주스를 마셨다.
3. 동해 집이었다. 작은방에선 엄마와 아빠가 자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하숙을 하는 한 교수님이 자정에 들어왔다. 또 다른 하숙생인 교수님은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교수님이 들어오는 순간 문을 여는 소리에 엄마가 깰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엄마에겐 단잠이 필요하다. 잠을 자지 못하면 엄마는 하루 종일 지쳐 있고 우울하다. 들어오지 않은 하숙생 교수님이 언제 들어올까 걱정하다 까무룩 잠이 들어 버렸나 보다. 어렴풋하게 다시 깨어 보니 일찍 들어온 교수님이 책상에 앉아 열심히 업무를 보고 계신다. 그러다 생각났다는 듯 그 교수님은 선물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아주아주 기다란 박스였다. 와인색 박스에 연한 핑크색 리본을 둘러 교수님은 아주 멋진 선물 포장을 완성해냈다. 내가 일어나서 가 보니 교수님은 대뜸 그 선물을 나에게 내밀며 아직 들어오지 않은 하숙생 교수님께 전해주라 한다. 지금 한낮인데 그 교수님 아직도 안 들어오셨어요? 내가 물으니 일찍 들어온 교수님은 웃으며 너무 미안해서 못 들어오겠다네요. 이따 올 거예요, 한다. 엄마가 잠을 깨지 않아 다행이었다.
4. 총을 쏘면서 탐험하는 게임을 했다. 가상의 큰 마을이 있다. 그 마을 안 골목 곳곳을 누비며 벌이는 총격전 게임이었다. 나는 쉴 새 없이 뛰고 총을 쏘고 도망 다니고 장애물들을 넘었다. 그런데 이게 단순한 게임이 아니었다. VR(가상현실)과 AR(증강현실) 기술로 만들어진 이 게임은 몹시 사실적이라 실제 내가 온갖 고초를 겪는 것처럼 느껴졌다. 스릴이 넘쳤고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가까스로 골인 지점까지 다다랐을 때 내 곁에는 한 친구가 있었다. 골인 지점에선 엄청나게 큰 허들을 넘고 장애물에 오른 뒤 슬라이딩해 내려와 부저를 눌려야 했다. 나는 간발의 차로 친구보다 먼저 부저를 누르게 되었다. 게임의 승패를 떠나 이제야 살 것 같다고 느낀 순간 전광판에 내 이름이 떴다. 몇백만 명이 즐긴 게임이었는데 나는 40위에 랭크되었다. 마을로 돌아가 엄마에게 40등을 했다고 자랑했다. 엄마가 칭찬하며 나를 꼬옥 껴안아줄 줄 알았는데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어떻게 40등을 할 수 있냐고 되물었다. 내가 입을 열려는 찰나 내 곁에 서 있던, 가수 성시경을 닮은 오빠가 엄마에게 게임 룰을 설명해주었다. 그러면서 그 오빠는 엄마를 이해시키는 데에 몰두했다. 40위가 얼마나 대단한 순위인지에 대해 제삼자의 타인인 그가 열변을 토하자 그제야 엄마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제야 오랜 긴장으로 굳어 있던 마음이 흐물흐물 녹고 내게도 기쁨과 평안이 찾아왔다.
5. 창밖으로 울창한 나무들이 보였다. 아침이 아직 당도하지 않은 이른 새벽, 일찍 일어난 새 몇 마리가 조그맣게 노래를 속삭였다. 내 곁에선 엄마와 동생이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통유리로 된 베란다 너머 아늑한 세상에 눈을 돌리고 있는데, 아빠가 경비 아저씨와 싸우고 있는 게 보였다. 아빠는 어마어마하게 큰 장롱을 버리려 하고 있었다. 도대체 아빠가 저 큰 장롱을 어떻게 집에서 들고 나갔단 말인가. 그리고 그동안 나는 왜 그를 알지 못했는가.
아빠는 화가 나서 다시 집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이제 더 작은 옷장을 갖다 버리려 했다. 나는 빈티지하고 고풍스러운 갈색의 결이 살아 있는 그 옷장을 굳이 버려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갑자기 화가 난 나는 아빠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새벽에 왜 가구들을 버리고 있는 거냐고, 그러다 엄마와 동생이 단잠에서 깨기라도 하면 어쩔 거냐고 소리쳤다.
꿈에서 깨고 나서 생각해보니 아빠는 오히려 조용히 가구를 옮겼는데 아빠를 향한 나의 대거리 소리가 더 커 오히려 엄마와 동생의 아침잠을 깨우는 건 내쪽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무지 큰 목청으로 아빠에게 소리를 질렀는데 너무나도 선명한 잠꼬대로 실제 일상에서도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고 한다. 남편이 알려줘서 잠이 깼다. 그 뒤론 새벽 다섯 시까지 잠 못 이뤘다.
6. 전 남자 친구와 다시 사귀게 됐다. 그가 자신의 집으로 놀러 오라고 해서 재회 기념으로 가기로 했다. 그 시각 우리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샤워를 시작했다. 화장솜이 떨어져 내 방에 있는 새 화장솜을 가져오려는데 엄마가 와 있었다. 엄마한테 인사를 하고 다시 샤워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을 맞으며 생각해보니 엄마도 왔는데 엄마랑 놀아야지 어딜 남자 친구 집에 가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 친구에겐 좀 미안하고 안 된 일이라 변기에 앉아서 계속 고민을 했다. 그러나 역시 엄마 곁에 남기로 했다. 결정을 내리고 나니 속이 시원해져 나는 다시 따뜻한 물을 맞으며 신나게 샤워를 했다. 샤워가 끝나면 엄마와 놀 수 있다!
요 며칠 꾼 엄마가 등장하는 꿈들. 설사 엄마의 빈자리가 느껴지는 꿈이더라도 그 안을 유영할 땐 엄마를 만날 수 있다. 엄마는 잘 지내고 있을까. 어쩌면 잘 지내고 있다고 소식을 전하는 걸까. 엄마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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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뭉치의 에세이 『엄마는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도 많이 사랑해주셔요.
『엄행다』 북토크가 7월 25일 목요일 저녁 7시 30분, 성산동 골목서점 조은이책에서 열려요.
신청은 chouni.chaeg@gmail.com으로 메일 주시거나 070-7617-6949로 전화 또는 문자 주시면 됩니다.
저만의 이야기보다는 우리들의 엄마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저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댓글로 남겨주시길요.
뵐 날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엄행다』 북토크 신청 : 성산동 골목서점 조은이책 https://www.instagram.com/p/BzflCz2lnT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