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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뭉치 Oct 10. 2018

상실 위의 독서

- 삶과 죽음이 겹쳐진 페이지를 들고

뜨겁고 긴 여름이 지나기가 무섭게 서늘하고 지독한 가을이 왔다. 늘 그렇듯 지나간 계절은 이미 과거형이기에 애틋하고 다가오는 계절은 현재라서 버겁다. 요즘의 나는 가을을 앓으며 시간을 통과하는 중이다. 벅찬 우울이다. 근 1년간 주위 사람들이 잇따라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가을엔 셋째이모가, 올해 5월엔 어머니가, 그리고 지난 추석 때는 친구가 곁을 떠났다. 그들은 모두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그들에게 나는 어떤 조카, 어떤 딸, 어떤 친구였을까. 하나하나 짚어나가다 보면 이내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의 동굴 속에 앉게 된다. 후회와 자책과 아픔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연속된 죽음 앞에서 나는 너무나도 무력했다. 부고를 들을 때마다 우울했고 절망했다. 상실감에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으며 문득문득 나 역시 죽고 싶기도 했다. 내가 아는 한 출판사 대표님은 지인의 부고를 듣고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했고 그 충격이 계속돼 결국 퇴사로까지 이어졌다고 하는데 그때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그 심정이 비로소 이해되었다. 한번 누군가를 잃은 사람들은 절대로 그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어디에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소중했던 사람이 죽고 나서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6개월까지 우울증 진단을 내리지 않는다는 말. 남겨진 사람들의 우울함은 말 그대로 당연하기 때문이다.


최근 열린 제7차 책 생태계 비전 포럼 ‘읽는 사람, 읽지 않는 사람’에서 이순영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독서 실태 조사를 통해 독자가 독서를 하는 이유 중 1순위가 “지식, 정보를 얻기 위해서(25.3%)”이며 2순위가 “위로와 공감을 얻기 위해서(10.6%)”라고 밝혔다. 책을 읽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책을 통해 고민을 해결하고자 하는 욕망을 무시할 순 없을 테다. 나의 슬픔을 다스리는 법을 깨우치고 소중했던 그들을 애도하기 위해, 지난 연휴 책들을 싸 들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사랑했던 대상을 잃어버리는 것은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독서를 통해 그리고 글쓰기를 통해 그들과의 시간을 떠올리고 잡아두고 싶었다. 마음을 다잡고 싶었다. 꼭 그래야 하니까.      




『한 여자』 


『한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열린책들, 2012



“어머니가 4월 7일 월요일에 돌아가셨다.”로 시작되는 『한 여자』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시작된 아니 에르노의 소설 아닌 소설이다. 


사람들은 내가 어머니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어머니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어머니가 살아 있는 시간과 장소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아간다는 느낌이다.(69쪽) 


앞으로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여자가 된 지금의 나와 아이였던 과거의 나를 이어 줬던 것은 바로 어머니, 그녀의 말, 그녀의 손, 그녀의 몸짓, 그녀만의 웃는 방식, 걷는 방식이다. 나는 내가 태어난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 고리를 잃어버렸다.(110쪽) 


아니 에르노가 써 내려간 문장들을 손가락으로 되짚어본다. 나의 애도는 나와 같은 경험을 한 한 여자의 책을 읽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그를 통해 진정한 애도는 기억하는 일이란 걸 깨닫게 됐다. 읽음으로써, 씀으로써, 그렇게 기억함으로써 나의 이모는, 어머니는, 친구는 내 곁에 존재하는 것이다. 




『애도 일기』     


『애도 일기』, 롤랑 바르트 지음, 김진영 옮김, 이순, 2012


어머니의 죽음 이후 글을 쏟아낸 작가는 마르셀 프루스트, 알베르 카뮈 등 셀 수 없이 많지만 그중 빼놓을 수 없는 이가 롤랑 바르트다. 어머니를 잃은 뒤 그는 썼다. 『애도 일기』는 그의 어머니 앙리에트 벵제가 사망한 1977년 10월 25일의 다음 날부터 2년 동안 계속된다.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나를 질책한 적이 없었다”고 읊조리는 바르트를 보며 나 역시 우리 어머니를 관대하고 선한 이로 기억하고 있음을, 아프게 깨닫는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바르트의 슬픔은 그렇기에 더욱 격렬하게 느껴진다. 그는 “다름 아닌 문학이야말로 이런 진실들에 뿌리를 내리고 태어나는 것”이라며 글쓰기를 통해 재생된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니 나 역시 다른 방법이 없다. 상실을 먹고 자라난 책들을 그저 쓰다듬고 읽고 그에 대해 토해내는 것 외에는.      




『죽음이라는 이별 앞에서』


『죽음이라는 이별 앞에서』,  정혜신 지음, 창비, 2018


“우리의 삶은 근본적으로 벼락같은 이별을 한 이들의 삶과 한 치도 다르지 않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을 벼락처럼 잃고 홀로 남거나 사랑하는 이를 남겨두고 이별의 인사조차 남기지 못한 채 떠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 둘 중 하나가 우리의 삶이다.” 정혜신의 『죽음이라는 이별 앞에서』는 친구의 죽음 이후 힘들어하는 내게 발행인이 권해준 책이다. 친구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는 나를 다그치는 대신 그는 수없는 밑줄이 그어진 자신의 책을 보여주었다. 앞서 인용한 책머리의 말에 절실히 공감하며 ‘슬픔안전망’에 대해 생각해본다. 모든 고통은 개별적이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죽음과 마주할 수 있다. 그리고 슬퍼하는 이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주는 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삶을 지탱하는 마음의 안전망”, 슬픔안전망이 될 테다.      




『그때는 당신이 계셨고 지금은 내가 있습니다』 


『그때는 당신이 계셨고 지금은 내가 있습니다』,   전병석 지음, 어른의시간, 2018


마지막으로 나를 위로해준 책은 쉬운 언어로 쓰인 시집 『그때는 당신이 계셨고 지금은 내가 있습니다』이다. 모름지기 시란 어렵게 읽히는 것이 아니라 쉽게 읽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병석의 시들은 심심하고 그래서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이 시집 속 시들을 어루만지며 나는 끝내 눈물을 삼키고야 말았다. “잠자리에 들기 전 / 머리맡 대접 물속에 / 틀니를 담그면 / 당신은 밤마다 하회탈이 된다 / 오물오물 / 몇 번 입 움직이다 / 훠이훠이 / 안개처럼 흩어지는 목숨 / 이승에서 틀니처럼 / 당신 곁에 붙어서 /오래오래 사랑하고 싶었다 / 오래오래 사랑받고 싶었다”(「틀니」 전문)      




우리는 타인의 슬픔을 완전히, 완벽히는 이해할 수 없다. 아파보지 않은 사람이 아픈 사람의 고통을 모르듯이. 그래서일까. 죽음 이후 자석처럼 딸려 오는 상실을 나와 같이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적잖은 위로가 된다. 죽음과 애도는 물론 새로운 질문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도 피하지 못하는 질문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출판전문지 <기획회의> 473호(2018. 10. 05 발행)에 게재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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