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좋은 날
사실은 수말이 양탄자에서 잠자고 있다고 이렇게 변했다고 기억이
잘 들어두세요 사회에서 만난 여인이 내게서 나가는데 기억이
세상을 내버려둬요 우리를
이제야 평등을 생각해요 두서없이 말하지만 나한테서 나갈 거예요 나는
유감이네요
집에 안 가요
싸웠어요 독수리가 심각하게 나는 모습을 보세요
유지하리라 믿으면서 날잖아요
탄생은 끝났어요 그럼 뭐가 남겠어요
아니에요
허구 아닙니다
수말은 안 일어나요 쟤 늙었어요
등불을 켜주기도 했습니다
피를 끓여서요
냄새 잘 맡아요? 언제 와요
두 번째로 중요한 말인데 꽃밭에 낭떠러지 없어요
맨드라미 대롱을 불러내도 빨아 먹을 수 없어요
그래요, 협박입니다
나무라려면 빛줄기한테 가세요
삶이 시체처럼 누워 있을 거예요
수말이 눈을 뜨네요 나를 바라보지 않아요
알고 있어요 내가 나가지 않잖아요
검고 노란 줄무늬를 보세요 털이 수북한 날개를요
비집고 들어갈 수 없게 하소서
방향을 내소서 종족을요
씩씩해, 씩씩해 미치게 하소서
- 윤유나, 『하얀 나비 철수』, 1부 전편에서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을 텐데, pp. 18-19
안녕, 하나
고양이에게 수박을 먹인다 기억이 지쳐가고 있어
사치라서 열어보지 않은 건데
하나야 돌담길에서 울타리 사이에 서 있던 네 옆이야 고양이는 하나를 먹어치우고
나무는 자라는 내내 불안하지
불안하기 위해 자라는 거라고 나무가
내게 수유한다
여관마다 빛이 고인다 악몽을 내주지 않고 문이 닫히고
나는 언덕을 불러낸다 길을 잃고 서성이다가
연못 밖에 되지 못하고
입속으로 모래를 털어 넣는다
나를 끌고 다니느라 계절은 이제 내가 두렵지 않을 텐데
나를 휘두르고
반쯤 썩어 들어간 고양이에게
시간을 묻는다
오늘이 사라진 나머지 시간이 아카시아로부터 흘러나온다
몸속에서 빛이 부패되기 시작한다
사과밭이 뚝뚝 아른거린다
- 윤유나, 『하얀 나비 철수』, 1부 전편에서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을 텐데, p. 27
천도복숭아
공에 맞고 쓰러진다
반칙, 반칙이다, 반칙
경기가 계속 이어진다
어머니가 저녁거리를 넘치도록 들고 들어온다
그동안 고마웠고
방문을 열고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나온다
우리는 식탁에서 조용히 식사를 한다
아버지, 이제 여기 있지 마세요
네가 놀고 먹으니까
저를 죽이세요
애비 앞에서 칼을 들다니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방으로 들어간다
아버지가 쇠파이프를 들고 들어온다
때려라 때려 다 내 잘못이다
아버지의 고독은 연기이다
즐거우니까
공에 맞아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름다운 건 비겁한 게 아니니까
용서하세요, 가능하다면
- 윤유나, 『하얀 나비 철수』, 2부 어디로 가야 분리될 수 있지, p. 46
착한 눈 메우기
저 자는 나를 키우기에 너무 고단해
나쁘지 않았어
저 자는 나를 돌보기에 너무 병들었어
나쁘지 않았어
그럴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하고서 나는 아팠어
낚시를 떠났어
내 입버릇이 결국 나를 떨궜나
저 자는 늙는 것에 중독되었던 거야
나쁘지는 않았어
(하략)
- 윤유나, 『하얀 나비 철수』, 2부 어디로 가야 분리될 수 있지, p. 56
한 사람을 사랑하고 더 못생긴 뚱보가 됐어
나는 자살했어
너는 너를 나라고 부르네
너는 돌아갈 무리와 돌아갈 아내와 돌아갈 집이 있어
지금은 아니더라도
겨울을 지나 들판 너머로 타오르는 연기
군대를 이끌고 돌아갈 식탁이 있어
지금은 아니더라도
밀림에서 길을 잃고 때로는 허공이었지
속삭일 테지만
내게 와
(하략)
- 윤유나, 『하얀 나비 철수』, 2부 어디로 가야 분리될 수 있지, p. 58
둔갑의 즐거움
사람을 사랑하는 데 있어
둔갑술이 필요해졌다는 것은
겁을 먹곤 당신을 잃어버리겠다는 뜻이다
반복적으로 열리고 닫히는 문을 보라
소란스러운 하루다
몹시 고요하여 영혼이 움직이고 있는 게 증명된다
배추를 심는다
때가 되면 두더지를 잡는다
이런, 해가 뜬다
(하략)
- 윤유나, 『하얀 나비 철수』, 2부 어디로 가야 분리될 수 있지, p. 64
고적대
아직도 그는 죽음과의 거리를 이해하려 든다
그가 끊어진다
그가 주저앉는다
오늘도 죽었다는 전갈을 받는다
그가 일어서려다 주저앉는다
나는 작은북을 두드렸었지
그가 신앙을 흘린다
초록개가 그에게 다이빙한다
어머니!
뒤돌아보는 그늘이 그에게 다이빙한다
더 이상
더 이상은 안 되겠어요
나도 같은 나라를 원할지도 모르잖아요
이리 와
그는 웅크리거나 살갗에 죽음을 새긴다
그에게서 흰 여름이 내린다
- 윤유나, 『하얀 나비 철수』, 3부 사회에서 만난 여인을 떠나보내고, p. 73
여기 한 소녀가 있다. 깊은 밤 기차가 지나는 소리를 들으면 그 기차가 자신이 떠나온 고향으로 향하는 것을 알았고 "집에 가고 싶다."고 읊조렸다는 소녀. 고향인 진주를 떠나 마산이라는 공업도시에서 여공이자 산업체부설학교의 여학생으로 살았던 그 소녀가 바로 나의 엄마이다. 진주의 한 시골 마을에서 육남매 중 장녀로 태어나 그놈의 살림 밑천이 되어줬던 엄마. 기차를 타면 공장이 많은 도시로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이 그래도 이 소녀가 할 수 있는 괜찮은 선택지 중 하나였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지 나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상급 학교로 보내주지 않는 고향과 가족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이 소녀가 왜 고향으로 향하는 기차 소리를 들으며 눈물을 훔쳤을까? 그 나약한 눈물은 말해져야 하는데, "집에 가고 싶다."는 음성이, 바로 그 언어가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설거지를 하는 엄마의 뒷모습. 이제 엄마와 아빠만이 사는 곳. 보통 가정집과는 다른 냄새가 났다. 쇠가 열에 달궈져 깎이면서 나는 냄새. 아빠가 도면을 보고 계산을 해 기계에 입력하면 엄마는 그 기계를 돌렸다. 그렇게 우리 집의 기계는 늘 쉴 새 없이 돌아갔고 엄마는 나에게 점점 좋은 옷을 입혔다. 누군가는 나에게 "너는 민중이 키운 딸"이라 했고, 누군가는 나에게 "너는 자본가 혹은 공장주의 딸"이라고 했다. 그런 납작한 말들이 싫었다.
눈을 비비며 물을 마시러 부엌간으로 다가가면 설거지를 하는 엄마의 머리칼 사이로 빛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엄마의 머리칼 사이로 손을 뻗으면 꽈배기 모양으로 꼬불꼬불 꼬인 쇠 부스러기가 닿았다. 엄마의 머리칼로부터 그 꽈배기를 흩어놓으면 엄마 옆에 누워 머리칼을 만지며 노는 어린아이로 계속 지내고 싶은 기분이 든다. 쇠가 깎이면서 만들어진 꽈배기가 묻은 엄마의 머리칼에 여전히 어린 소녀가 산다. 그 어린 소녀의 보호 속에 나는 살면서도, 이 쇠로 된 꽈배기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했다. 어릴 적부터 머리를 꼬아 만들었던 꽈배기. 정신의 꽈배기를 굽고 싶었던 어린 소녀, 그렇게 딸은 펜을 들었다. 엄마를 배반했다.
- 김정은 문화연구자, 『하얀 나비 철수』 부록 '편지에게', pp. 89-90
윤유나의 시는 일부러 평범한 목소리, 속어俗語의 세계를 여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말을 얻지 못해 사라지는 세계들을 가엾어하기 때문일까요? 이 가엾어하는 따뜻한 마음은 자신이 가진 약하고 아름답지 못한 면모를 대면했던 마음이 다른 대상들을 향할 때의 버전이라 여겨집니다. (중략) 철수(「헤어진 순이」)를 그냥 "같이 놀고 싶은 사람"이라 말하며 철수와 함께 있는 시간으로 철수에 대한 형용을 대신하는 것이야말로 말을 얻지 못해 사라지는 세계에 대한 연대를 표시하는 윤유나만의 방식입니다.
- 김정은 문화연구자, 『하얀 나비 철수』 부록 '편지에게', p. 97
사람의 가장 아픈 부분은 사람의 가장 빛나는 부분과 연결되는 것이어서 나는 엄마의 머리칼 속에서 반짝이는 그 빛을 향해 손을 뻗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엄마의 머리칼 속에서 반짝이던 빛은 여자가 준 여자를 끝까지 살아내라는 계시였을까요? 정신의 꽈배기는 쇠로 된 꽈배기와 한 몸이어야 함을 그 빛은 내게 말해줬던 걸까요? 약하지만 아름다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여자가 사람의 마을을 떠나지 않을 때, 일어나는 마음의 일이 있을 것입니다. 나도 아름답지 않은 이 세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그 아름답지만은 않은 삶을 살아내려고 합니다. 여성들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싶은데, "달아나고 싶지 않다"는 인간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 김정은 문화연구자, 『하얀 나비 철수』 부록 '편지에게', p.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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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뭉치의 에세이 『엄마는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도 많이 사랑해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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