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되었다.
올 겨울은 눈이 많이 오지 않았다.
이러다 또 뒤늦게 오지 않을까.
사실 어릴 적에는 눈을 굉장히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면 내리는 눈보다 쌓인 눈을 좋아했다. 자기 전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아침이 되었을 때 소복이 쌓여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눈을 감았다.
내가 사는 동네는 눈이 자주, 많이 오는 동네라서 다행히 눈을 떴을 때 하얗게 변한 세상을 마주할 수 있었다.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창문을 열어본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서 폐 가득 들어오는 짜릿한 한기를 즐겼다. 간밤에 밀폐된 공간에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순환했을 탁한 공기를 아침의 상쾌한 공기가 밀어내는 느낌이 좋았다.
처음에는 신선했을 공기가 밀폐된 공간에서, 그리고 따뜻하게 데워진 공간에서 수도 없이 나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었을 그들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창밖으로 보내준다.
간단히 세수를 하고 겉옷을 껴입고 밖으로 나가면 집 앞은 이미 가지런히 예쁘게 길이 나있었다. 누군가 밤사이 눈이 올 것을 예상하고 아침 일찍 부지런히 움직였을 테지.
반짝
느닷없이 시야를 가린 섬광에 눈을 찡그렸다. 하얀 눈이 햇빛을 반사해 나를 불렀다. 눈을 지그시 뜨고 반짝이는 곳을 바라보았다. 변두리에 소복이 쌓여 아직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눈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분명 아주 깨끗한 소리가 날 거야.
벅찬 마음으로 도화지 같은 눈앞에 선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발을 탁탁 구른다.
여기 도화지에 처음 발을 붙이는 건 누구도 아닌 바로 나!
환하게 웃으며 도화지에 발을 찍으면 기분 좋은 뽀드득 소리와 함께 신발 자국이 남는다. 잘 포장된 아스팔트를 걸어도, 흙과 자갈이 깔린 비포장 길을 걸어도 나를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발을 지탱해준 신발, 그리고 그 신발의 가장 아래에 있는 밑창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친구에게 감사를 느끼며 발을 든다. 이제 첫 발을 디뎠으니 내 마음대로 누워도 보고 만져도 보며 신나게 눈을 즐 겼다. 하얀 도화지는 어느새 울룩불룩하게 변했다.
도전이 좋았다.
정복이 좀 더 맞는 표현이겠다.
아직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깨끗한 것에 처음으로 내 손길을 주는 것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사회가 정해놓은 규칙도, 개인이 만들어놓은 패 턴도 없기 때문에 오롯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점 이 매력적이었다.
하고 싶은 것을 하기엔 너무나도 신경 쓸 것이 많은 현실이다.
‘남들 신경 쓰지 말고 당신 하고 싶은 것을 해보세요.’
아름답지만 어려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