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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집왕 Nov 04. 2022

글을 쓰기 좋은 계절

...물론 그런 건 없다

겨울이 지나 개구리가 깨어나고, 새싹이 올라오는 봄이 다가올라치면 덩달아 마음이 들뜨는 것 같다. (내가 식목일에 태어나서 유독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특히, 꽃들을 시셈하는 추위마저 지나가는 4월이 되면 자연스럽게 벚꽃 개화시기를 찾아보고, 어디를 가야지 벚꽃 놀이를 가장한 셀카 놀이가 가장 적합한지를 자연스럽게 찾아보게 된다.      


하지만 바깥 활동이 적합해지는 날이 다가올수록, 집 구석에 박혀서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이런 날에 꽃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다는 것은 뭔가 인생을 잘못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 같다.

     

이렇게 봄이 본격적으로 접어드는 4월은 작가들에게 있어서 특히 글을 쓰기 어려운 달 중에 하나로 꼽힌다. 4월 외에 글을 쓰기 어려운 달을 꼽자면, 7월, 10월, 9월, 1월, 11월, 5월, 3월, 6월, 8월, 12월, 그리고 2월이 있다.      


그렇다. 글을 쓰기 좋은 계절 따위는 없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나는 이상하게 봄만 되면 싱숭생숭 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계절 모두가 심난하다. 날이 좋으면 글을 쓸 수가 없지만, 그렇다고 날이 궂은 날이라고 키보드를 치는 손 놀림이 날렵해지지도 않는다. 단지, 날씨가 처지면 마음만 더 처질 뿐이다. 그러니 오로지 남은 하나의 방법은 계절이나 날씨 따위와는 관계없이 매일 책상에 앉아서 읽고 쓰기를 반복할 뿐이다.     

 

하지만 매일 같이 글 쓰는 활동을 위해 자리에 앉아 있더라도, ‘위대한’ 글쓰기 코치님들이 말씀하시는 ‘글쓰기 근육’ 같은 것이 생겨나는 것 같지는 않다. 나는 당최 글쓰기 코치님들이 설파하시는 글쓰기 근육이 어떻게 생겨먹은지를 알아채지 못하겠다. 헬스장에서 PT를 받듯이 매일매일 얼마간 글을 쓰면 자연스럽게 ‘글쓰기 근육’이 생겨난다고 하는데, 나는 태초에 글쓰기 헬창이 되지 못할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 못하는 탓인지 득근의 길을 멀기만 한 것 같다.


대신 계속 글을 쓰기 위해 앉아 있으면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한 가지는 바로 ‘디스크’라고 할 수 있다. 정확히는 ‘디스크를 얻기 보다’ 척추 뼈 사이에서 충격 완충 작용을 하고 있는 ‘디스크 수액’이 탈출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인데, 내가 실제로 디스크 탈출증 제거 수술을 받았으니 바로 이러한 효과를 톡톡히 봤다고 할 수 있으며, 운이 좋게 디스크 탈출까지 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엉덩이 근육, 즉 둔근이 약화되는 효과 정도는 볼 수 있을거라는 것이다. 글쓰기 근육을 얻고 엉덩이 근육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꾸준히 스쿼트 같은 고된 운동을 병행해야 하는데, 그렇게 무언가를 얻는데 무언가를 잃게 될바에는 그냥 쇼파에 누워서 낮잠이나 한 숨 더 자는 편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난 “자! 여러분도 꾸준하게 한 번 써보시면 (여러분도 전부 저처럼) 될 수 있다니까요?”를 글쓰기계의 근육맨들의 호언 넘치는 다침보다 오히려 작자로서의 아킬레스건(*글을 쓰기 싫은 작가)을 스스로 드러내는 작가들의 용기 있는 고백이 더 끌리는 편이다.       


일본 유명 작가들의 마감기(?)를 다룬 책 ≪작가의 마감≫에서는 근현대 일문학의 아버지로 추앙 받는 나쓰메 소세키부터 ≪인간 실력≫의 저자 다사이 오사무 까지 일본 최고의 문인들이 ‘글을 쓰기 힘든 순간’을 다루고 있다.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으로 선정된 대문호들에게도 글쓰기는 괴로운 일이었던 셈이다. 나쓰세 소세키는 <어쨋든 쓸 수 없다네>라는 편지에서 ‘쓰려고 하면 괴로워지고, 누군가에게 대신 써달라고 부탁하고 싶을 정도’라는 고백을 하고 있으며, 다자이 오사무는 신문사로부터 수필을 청탁받고 용감하게 달려들었다가 고작 열 매 내외 원고에 사흘이고 나흘이고 끙끙대고 쓰고 있는 원고를 찢어버리는 일을 반복한다. 소설 ≪기계≫로 일본 모더니즘 문학의 정점에 올랐다고 평가받는 요코미쓰  리이치는 더 솔직하다. ‘하지만 생활이 있다.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생활이 예술보다 더 중요하다고 자신을 타이르는 버릇이 느닷없이 튀어나온다“라고 고백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글쓰기에 대한 한탄 혹은 분노는 꼭 일본인 작가들만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다. ≪분노의 포도≫를 쓴 존 스타인벡은 “글쓰기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노동”이라고 평한 바 있지 않았던가.      

나는 이러한 위대한 작가들이 글쓰기 근육이 없는 멸치들이여서 이런 고민을 토로하고 있다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글쓰기에 대한 솔직한 심경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현실에서 착안하자면 개똥철학과 같은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작가만이 존재한다. 하나는 ‘나는 글을 쓰기 싫다’라고 솔직히 고백하는 작가와 이를 평생 모른 척 하는 작가”      

그런데, 우리나라 작가님들의 이야기를 아무리 찾아봐도 ‘글을 쓰기 싫다’고 고백하는 작가님들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딱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글쓰기는 괴로워....”로 시작했다가 “하지만 나는 이런 식으로 쓰곤 하지”로 아름답게 마무리 짓을 글들을 많이 보곤 했다. 또, 다 대문호들만 있는지 작법서는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가 ‘글을 쓰기 싫어하는 우리나라 작가’를 찾는다고 하면 꼭 여기 나의 글을 보여주길 바란다. 나는 책을 쓸 때마다 글을 쓰기 싫다고 징징거리는게 특기이며 (대부분 이런 징징거림은 와이프가 받아준다) 만약 평생을 먹고 살 수 있는 돈이 있었다면 평생 동안 글을 한 줄도 쓰지 않고 살 자신이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글을 쓰는 일은 비록 괴롭지만 기타 다양한 이득을 가져다 줍니다. 여러분도 꼭 쓰세요”라는 아름다운 결말을 낼 생각도 없다. ‘작가’라는 타이틀을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너무 과대평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에게 함부로 ‘써보세요’를 선뜻 권하지 않는다.      


그러한 면에서 미국 드라마 ≪캘리포니케이션(Californication)≫의 주인공 ‘행크 무디’는 별명인 ‘글을 쓰지 않는 작가(Writer without writing)’의 칭호를 받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리기도 한다. 물론 내가 극 중 (국내에서는 X파일의 멀더로 알려진) ‘데이브디 듀코브니’ 같은 사고뭉치 자유연예주의자 작가가 될 확률은 극히 낮지만, 내가 언젠가 빨간색 포르쉐911을 타고, 끊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고 웃고 있다면 분명 그때는 ‘글을 쓰지 않는 작가’라는 승자의 타이틀을 쟁취했을 때 일 것이다.      


그렇게 글을 쓰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글을 쓴다.

자. 다시 의자에 앉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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