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현임 Mar 22. 2021

오늘의 잘한 일

여름 오후  시의 뙤약볕이란 선한 사람의 인상을 일순간 헐크로 바꿔놓기 십상이다. 지레 겁을 먹은 나는 얼음 물이 가득  클린켄틴을 에코백에 챙겨 취재 길에 나섰다. 한쪽 어깨는 햇빛을 가리는 팔의 무게를 지탱했고, 다른 한쪽은 얼음 물이 가득  스틸 보틀의 무게를 견뎌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텀블러를 챙기겠다는 신념이 성가심을 이긴 것이다. 분명 커피든 물이든 밖에서  마실게 뻔한 날씨였지만 이것들이 담긴 일회용 용기가 쓰레기통에 들어갈 것도 뻔한 사실이었다.


나는 굳이 쓰레기를 만들고 싶지 않다. 그게 분리수거가 가능한 것이라 할지라도. 카페에서는 늘 머그컵에 담아줄 것을 주문하지만 어쩔 수 없이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나오게 되면 양치용 컵으로라도 사용하다가 분리수거한다. 분리수거는 쓰레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버려진 플라스틱들을 수거하고, 세척하고, 재 가공하는 데 발생하는 오염물과 비용을 생각하면 밥 먹듯 버릴 일은 아니다.


나의 일상에 ‘환경’이라는 단어가 스며든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한 시점은 잘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우리개 아꿍이와 함께 살며 넓어진 세계관 덕분이고, 또 하나는 화장실에서 손을 씻다 우연히 마주친 이가 페이퍼 타월을 한 움큼(눈대중으로 봐도 대략 열댓장) 집어다 손만 닦고 그대로 휴지통에 처박아 버리는 장면을 본 뒤부터다. 그 무심하고 간편한 몸짓. 그래도 휴지통에 버렸음을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까. 손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털어낼 사려 깊음 따위 빨리 이 물을 휴지로 닦아내고 싶다는 귀찮음에 묵살되었다. 우리는 공공장소에 놓인 공공의 물건을 사용하는데 아주 관대하다. 내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쓰고 버리는데 죄책감이 없는 것. 그러나 과연 내 돈 들여 사둔 물건이 아니라 해도 그렇게 생각 없이 쓰고 버릴 일일까.


그렇게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에서 불편함이 감지되기 시작한 어느 날, 에코백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무심한 듯 어깨에 툭 걸쳐진 멋스런 그것. 그런데 에코백은 정말 에코eco한가. 우리가 흔히 들고 다니는 에코백은 유행이 일기 시작할 당시, 구입하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환경을 위해 솔선수범한다는 뿌듯함을 동반했다. 그러나 이건 난센스에 불과하다. 대량생산이 환경에 이로울 리 없다. 생각해보면 어디서 났는지 모를 에코백 서너 개쯤은 방구석에서 아무렇게나 굴러다니지 않는가. 싫증을 느끼면 아깝지 않게 버릴 수 있는 게 또 에코백이다. 물론 나처럼 비닐봉지를 소비하기 싫어서 에코백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미 에코백은 본연의 의미를 잃은 지 오래다. 이제 에코백의 구입 자체가 환경에 해를 끼치는 일이 되고 있으니까. 너도 나도 에코백에 패션을 입히기 시작하면서 그저 가성비 좋은 악세사리가 되어버렸다. 어깨에 에코백을 버젓이 메고 있으면서도 물건을 사고 비닐봉지를 받아 들고 나오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밤의 일이다. 아이스크림을 사러 동생과 함께 들른 편의점에서 일회용 봉지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나는 돌연 ‘피곤한 인간 되고 말았다. 편의점을 나서면서 동생은 얼굴을 찌푸리며 대차게 쏘아 댔다. “,  시리게 그걸  그냥 들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당시는 후텁지근한 여름이었고, 열대야가 기승이던 늦은 밤이었다. 집과 편의점은 불과 2-3 남짓한 거리였고, 아이스크림을 맨손으로 들고 간다고 해서 동상을 입을 일은 아니었다. 겨우 아이스크림  통에 괜한 쓰레기를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지만 나는 그날로 하나뿐인 남동생에게 피곤한 인간이 되어 버렸다.


굳이 불편함을 고수했기 때문에. 비록 누나를 누나라 부른 적 없는 동생놈이지만 하나뿐인 동생이 누나를 피곤한 인간 취급한다는 건 꽤나 애석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내가, 나름의 타당한 신념을 갖고 지켜나가는 모습이 꽤 마음에 든다. 딱히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에 이런 글이 있다. ‘인생에는 이상 따위 필요 없어. 필요한 건 이상이 아니라 행동 규범이지.’

나는 오늘도 텀블러를 에코백에 넣고 밖을 나섰다. 쓸데없는 쓰레기를 만들지 않기 위해 앞으로도 의도된 불편을 감내하기로 했다. 사무실에선 늘 이면지를 우선으로 사용하고, 페이퍼 타월 대신 손수건을 사용한다. 왠만하면 계단을 오르고, 카페에선 머그컵을 사용하면서 그렇게 오늘도 나의 사사로운 행동 규범은 성가심을 이겼다.


                                                                                                                        여름, 2015

이전 02화 평영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