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페스코 베지테리언’이다.
육식을 하지 않지만 동물복지인증 농장에서 유통된 계란과 해산물은 자유롭게 먹는다.
주5일제 채식 연습을 시작으로 지금은 고기없는 식생활을 하고 있지만 분기별로 강렬하게 찾아오는 치킨의 욕구를 못 이기는 때도 있다. 치킨을 먹고난 뒤에 몰려오는 죄책감의 값을 치러야 하지만 그래도 다시 시작한다.
그래야 하니까. 하루 이틀 하다 말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다보면 그 텀이 점점 길어진다. 그렇게 마트 정육코너를 지날때 시식용 삼겹살을 굽는 냄새가 역해지는 때가 온다. 저 새빨간 고깃덩어리들이 어디서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가 먼저 떠오르는 때가 온다.
그 생생한 사실 앞에서 육식욕은 힘을 잃는다.
“풀뿌리를 캐 먹으면서 살지 않는 한, 내 채식주의는 알량한 자기만족의 일부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다른 생명을 먹으면서 살아갈 힘을 내는 존재로서의 겸손함은 가끔 생각하면서 살고 싶다.”
-서영인, <오늘도 가난하고 쓸데없이 바빴지만>, 46쪽
나는 채식의 형태와 단계가 어떻든 도덕적 신념으로 채식을 선택한 사람들을 존중한다. 중요한 건 채식의 엄격함이 아니라 채식을 선택한 개인의 가치판단과 노력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에선 아직도 채식주의자 역시 페미니스트 못지않게 쉽사리 비난의 대상이 된다.
내가 채식을 한다고 이야기하는 순간 내 앞에 앉은 사람은 심판자라도 된 듯 굴기 시작한다.
-너 베지터리안이라면서 왜 아이스크림 먹어?
(먹을 수 있습니다.)
-너 해산물은 먹어? 횟감은 안 불쌍하냐?
(불쌍합니다. 나는 내가 계속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옳타꾸나 어디 두고보자 비난과 비아냥을 쏟아낸다. 어떻게 해서 그런 식습관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궁금증보다 앞서는 심판의 자세. 이렇게 비아냥섞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치고 선한 영향을 보태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도 어떤 불문율이다. 나는 그냥 너나 잘 했으면 좋겠고.
그리고 육식에 관련해 ‘개고기’를 먹지 말자는 얘기에 항상 따라붙는 딴지가 있다.
-그럼 소, 닭, 돼지는 안 불쌍해? 왜 개고기만 먹지 말라 그래? 너 개 키우지? 개고기만 먹지 말라는 너는 개빠.
관련 이슈마다 따라붙는 악질 댓글은 사실 대꾸할 가치가 없는 수준이나 나는 한 번쯤 제대로 얘기하고 싶었다.
개고기를 먹지 말자는 주장의 상위개념에는 비윤리적인 사육환경에서 자라 잔인하게 도축되는 모든 가축이 포함되어 있다.
이 주장의 전제는 그러므로 인간의 수많은 ‘먹거리(입을 거리) 중 하나’가 되기 위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는 동물들에 최소한 윤리적인 사육 시스템을 마련하자는 촉구이자, 되도록 육식을 줄여보자는 권고다. 허가받은 도축 시설도 없이 되는대로 잡아 죽여 생산하는(녹슨 쇠 방망이에 전기를 연결해 입속에 욱여넣는, 밥을 먹는 사이에 쇠파이프로 때려죽이는, 어차피 죽일 거니까 음식물쓰레기를 먹이거나 굶겨도 상관없는) 개고기의 잔혹함 호소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기를 먹는 너는 나쁜 인간이야!’라고 하지 않는다.
채식의 종류는 ‘비건’부터 ‘플렉시테리언(평소에는 채식을 하다가 모임이나 약속이 있을 때만 육식을 허용하는)’까지 열 가지가 넘는다. 채식이라는 명확한 식습관의 종류가 열 가지가 넘는다는 것은 결국 어떻게 해서든 채식을 오래 실천할 수 있도록 각자에게 최적화된 채식의 형태와 대안들을 고민한 결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덮어놓고(알고 싶지도 않고) 나는 고기 먹겠다는, 그런 걸 따지면 세상에 먹을 게 있겠냐는, 네가 그런다고 세상이 변하겠느냐는 야유는 그러므로 그들의 노력과 고민에 전혀 대등하지 못한, 그저 비난을 위한 비난일 뿐이다.
“육식은 선택 가능한 일이다. 취향은 선택될 수도 단련될 수도 있다”
-서영인, <오늘도 가난하고 쓸데없이 바빴지만>, 44쪽
나의 채식은 도덕적 신념이기도 하지만 결정이고 선택이다. 적어도 동물을 고통스럽게 해치면서 얻는 식생활은 하지 않겠다는. 내가 채식을 하고 있다 선언하는 순간은 나의 선택을 공공연히 드러냄과 동시에 곧 스스로 되뇌는 다짐이다. 내 입술을 통해 울린 이 말을 오늘도 또 한 번 지켜보겠다는 다짐.
인간에게는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 고기가 아니어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다양한 음식들이 있지만 축사의 동물들은 ‘맛’이라는 인간의 선택지 중 하나를 위해 관절이 버틸 수 없을 지경으로 살을 찌우고, 배설물이 범벅이된 우리 안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살다가 구제역으로 살처분돼 죽거나 도살된다.
알고 먹는 것과 모르고 먹는 것은 다르다. 알면서 조금씩만 먹으려 노력하는 것과 마침내 먹지 않는 것도 다르다. 물론 도덕적 가치 판단은 언제나 개인의 몫이다.